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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치·경제·과학 589

조선왕조실록115-116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5,116화 ?(순조 2)벽파의 몰락과 안동 김씨의 집권 1803년(순조 3) 12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14세가 된 순조가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순조의 정치력은 여전히 미약했는데 이러한 가운데 정권을 잡은 것은 외척인 김조순의 집안이었습니다. 시파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가는 비변사를 장악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한편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노론 벽파는 '김달순의 옥사'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김관주를 비롯한 노론 벽파는 후원자인 정순왕후가 죽자 앞날이 걱정되었습니다. 순조가 벽파에 대한 보복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

조선왕조실록113ㅡ114

?조선왕조실록 제113,114화 ?(정조8)정조의 죽음 정조의 나이 49세에 겪은 이런 일들은 그의 말년의 분위기를 보여 줍니다. 그는 14년 동안 온 힘을 기울여 혁신정치를 펴 보려 했지만, 보수세력이나 묵은 권신들의 견제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없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여름에 들어 지병인 종기가 도져 병석에 누웠다가 11세의 세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슬픔은 너무나 컸습니다. 영조의 마지막 왕비인 정순대비 김씨는 15세에 영조의 계비로 들어와 궁중의 어른 노릇을 했습니다. 김씨는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 10년이나 어렸습니다만 혜경궁 홍씨는 지극정성으로 정순대비를 받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순대비는 친정붙이에 휘둘려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을 거들었고 세손인..

조선왕조실록111ㅡ112

?조선왕조실록 제111화,112화 ?(정조6)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다. 정조가 능행길에 나서 한강의 배다리를 건널 때면 그 언저리에 백성들이 앞다투어 몰려나와 고개와 들판을 하얗게 메웠다. 그들은 너도나도 “우리 임금 용안 한번 보세”라고 떠들면서 서로 앞줄에 서려고 자리다툼을 할 정도였다. 정조는 때로 어가를 멈추고 이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백성들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일부 반대세력을 제외하고는 성군이 태어났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특히 많은 핍박을 받던 서민들이 왕의 덕을 칭송하며 살길을 찾아 생업에 전념하는 기풍이 일었다. 정조는 학문과 문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가 사직단에서 사직제사를 지내던 어느 날, 조용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전악(典樂, 음악 지휘 책임자)을 불러서 곡조가 맞..

조선왕조실록109-110

?조선왕조실록 제109화,제110화 ?(정조4)규장각을 두어 정치 엘리트 양성(2) 또한 정조는 처음으로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실시했는데, 문신을 가려 뽑아 규장각에서 일정 기간 공부하게 하고 때때로 성취도를 재는 시험을 보게 했다. 초계문신 가운데 성적이 좋으면 좋은 벼슬자리에 발탁하였다. 초계문신은 바로 신진 정치 엘리트이며, 여기서 배출된 이들이 이가환 · 정약용 등이다. 정조는 부정부패를 뿌리 뽑으려고 때때로 암행어사를 지방에 파견했다. 하지만 암행어사가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지자 암행어사의 부정을 캐는 암행어사를 뒤딸려 보내기도 했다. 정조의 남다른 신임을 받는 암행어사들은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수령을 임명해 현지에 보낼 때에는 늘 개인 면접을 하고 세세하게 백성을 위한 정치를..

조선왕조실록105-106

?조선왕조실록 제105화,제106화 ?(영조5) 원릉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왕위에 머물렀던 조선 최장수 왕의 능이지만 비교적 능역이 아담하고 단출하게 조영된 능이다. 웬지 다소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평생 검약과 절제를 덕목으로 삼았던 그의 살아생전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는 능이다. 원릉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하나로 둘러진 난간석 안에 쌍릉을 조성했다. 조선 왕릉은 일반적으로 상중하 3계단으로 나뉘어 중계에 문인석을 하계에 무인석을 세웠는데 영조의 능은 중계와 하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문무인석을 같은 단에 배치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무인석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기에 위풍당당한 모습보다는 어쩐지 유약한 장수의 자태를 보이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영조는 숙종의 2남 서자로 태어나 1699년(숙종..

조선왕조실록 103-104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03화,제104화 ?(영조3)임금이 천민의 자식? 영조가 천민의 자식이라고요? 예, 맞습니다. 아버지는 조선 제19대 왕숙종이지 만, 어머니가 천민,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종이었지요. 그런 사람을 어머니로 둔 이가 어떻게 임금이 되었냐고요? 이게 좀 복잡합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았습니다. (기사환국) 그런데 숙종의 희빈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어요. 그녀의 지지 세력인 남인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거든요. 이런 사연 속에 숙종은 내심 인현왕후의 복위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숙종은 궁궐 뜰을 산책하고 있었어요. 달이 휘영청 뜬 늦은 밤, 한가롭게 뜰을 걷고 있는데, 불 켜진 방 하나에서 토닥토닥 칼질하는 소리가 들려..

조선왕조실록101-102

?조선왕조실록 제101화,제102화 ?(영조1)영조와 사도세자 조선의 왕 중 아들을 죽인 이가 있어요. 누굴까요? 바로 영조입니다. 영조는 조선 제21대 임금으로 장장 52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뤄 낸 임금이다 . 그는 탕평책으로 붕당 간의 갈등을 완화시켰으며, 역대 어느 임금보다 백성의 삶을 몸소 챙겼던 명군주였다. 하지만 천민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태생적 한계로 항시 번민해야 했으며, 극심한 콤플렉스 속에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속에 가둬죽였지요. 왜 그랬을까요? 영조와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초청하여 그들 사이의 갈등과 번뇌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영조(1694~1776)는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정치를 하려 했으며,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붕당 ..

조선왕조실록99-100

?조선왕조실록 제99화,제100화 ?(숙종 9)장희빈(속6편) 기사환국으로 남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장희빈으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졌듯이, 갑술환국으로 서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인현왕후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지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숙종은 전 회에서 본 것과 같이 단칼에 권력 교체를 해버린 후 곧 “예로부터 임금은 참작하고 선처하여 용서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 이제 은혜가 아주 없을 수 없으니 폐비를 별궁으로 옮겨 수직하고 늠료(봉급)도 주도록 하라”라는 명을 내렸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별궁으로 옮기는 날 직접 편지를 썼다. - 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이제 별궁으로 옮기면 어찌 다시 만날 일이 없겠는가! 이에 인현왕후는 다음과 같이 답장하며 숙종이 보내 온 의대..

조선왕조실록 97-98

?조선왕조실록 제97화,제98화 ?(숙종 7)장희빈(속4편) 숙종이 폐비의 뜻을 거두려하지 않자, 86명의 대신, 대간이 폐비 반대 상소를 올렸다. 대노한 숙종은 이들의 상소가 모반대역보다 더하다면서 국청을 설치하고 친국을 시작하였다. 숙종은 이들이 임금을 배반하고 부인을 위해 절의를 세우려한다며 고문을 가하였고, 박태보 등이 모진 고문에도 의연히 대처하자 이들에게 압슬을 가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주었다. 결국 박태보, 오두인이 대표로 고문을 받고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숙종의 이러한 행위는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모두 숙종의 의도된 과잉행위였다. (“이래도 반대할래?”) 더 이상 반대가 없자 드디어 숙종은 1689년(숙종 15년) 인현왕후를 폐서인하여 친정으..

조선왕조실록 95-96

?조선왕조실록 제95화,제96화 ?(숙종 5) 장희빈(속2편) 인현왕후의 청으로 다시 궁궐로 돌아온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다. 숙종은 장희빈을 숙원(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로 승급시켜 주었고, 장희빈은 이러한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왕실의 큰 어른 자의대비의 환심을 사는 한편,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을 통해 밀려나 있는 남인과 연대를 구축했다. 이에 집권 서인은 긴장했고, 부교리 이징명과 김만중이 나서 장희빈을 견제하는 소를 올렸지만, 숙종은 오히려 이들을 유배형에 처했다. 그만큼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와 같이 장희빈의 권세가 높아지자 현숙한 여인 인현왕후로서도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은근히 장희빈을 경계하는 말을 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