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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치·경제·과학 595

조선왕조실록125-126

?조선왕조실록 제125화,126화 ?(고종 2)흥선대원군 집권의 명암, 개혁 정책과 쇄국 정책. 고종의 즉위와 함께 조대비는 3년간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조정의 실권은 흥선대원군에게 넘어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우선 인사권을 장악하고 그동안 세도정치를 해 오던 외척 세력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고 문란해진 국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내정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우선 부패한 유림의 온상이 되어 버린 서원을 철폐하고, 그동안 상민에게만 부과해 오던 군포(軍布)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했습니다. 이러한 과감한 개혁 정책은 그동안 양반들의 착취에 고통받던 백성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는 국가 재정 확충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흥선..

조선왕조실록123-124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23,124화 ?(철종 4)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다. 철종에게는 부인이 8명이나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안동 김씨 세력은 자신들의 세도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만한 종실은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한때 헌종의 후사로 거론되었던 이하전을 끝내 역모로 몰아 사사한 것에서도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하전은 평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인가? 아니면 김씨의 나라인가?"라고 하며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그것이 그의 명을 재촉했습니다. 이렇듯 500년을 이어 온 이씨 왕실의 씨가 말라 가는 가운데 철종은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갑자기 왕위에 ..

조선왕조실록121-12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21,122화 ?(철종 2)아저씨가 조카를 잇는다 철종은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항렬로 따지면 헌종의 아저씨뻘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왕통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를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은 철종을 순조의 아들로 삼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예조에서도 철종이 종묘에 읽을 축문에 순조를 훌륭하신 아버지라는 뜻의 '황고(皇考)'라 칭하고, 철종을 '효자(孝子)'라고 칭하게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헌종의 생부인 익종(효명세자)에 대해서는, 영조가 경종에 대해서 훌륭하신 형님이란 뜻으로 '황형(皇兄)'이라고 하고 영조 자신을 '효사(孝嗣)라 칭한 것에 의거해 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하고 보니 철종이 헌종과 헌종비에 대한 축문을 ..

조선왕조실록119-120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9,120화 ?(헌종 3)흉흉해진 민심과 흔들리는 왕실 이후에도 이양선의 출몰은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민심은 흉흉해졌습니다. 외세의 침투가 시작되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도 서서히 깨달아 갔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 합당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척사 정책을 고수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 또한 견제 세력이 없는 세도정치의 폐단이었습니다. 한편 어엿한 청년이 된 헌종은 점차 외척인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헌종은 궁에 들어온 외숙 조병구를 불러 그의 죄를 따지며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조병구에 대한 경고이자 풍양 조씨 세도에 대한 경고였..

두문동72인

두문동 72인 임신년(1392) 7월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 에게서 왕위를 물려받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고려의 신하였던 권문세가들과 고려 왕족 중에서 조선의 태조에게 항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개성에 남아따라가지 않았다. 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한 고려의 유신들이 은거하였던 마을을 그 지역 사람들은 杜門洞이라고 했는데, 두문동은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의 서쪽 골짜기에 있었다. 고려의 유신인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이곳에 들어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包圍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

조선왕조실록 117ㅡ118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7,118화 ?(헌종1) 외척 풍양 조씨의 보호 속에 즉위한 헌종 헌종은 1827년(순조 27) 7월 18일에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순조의 손자로,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순조의 뒤를 이어 1834년(순조 34)에 즉위했습니다. 이때 헌종의 나이 불과 8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탓에 헌종은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습니다. 이어 1837년(현종 3)에는 안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를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가 계속해서 이어질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순조는 죽기 전에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영에게 헌종의 보도를 부탁했고, 풍양 조씨가 득세하기 시..

조선왕조실록115-116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5,116화 ?(순조 2)벽파의 몰락과 안동 김씨의 집권 1803년(순조 3) 12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14세가 된 순조가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순조의 정치력은 여전히 미약했는데 이러한 가운데 정권을 잡은 것은 외척인 김조순의 집안이었습니다. 시파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가는 비변사를 장악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한편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노론 벽파는 '김달순의 옥사'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김관주를 비롯한 노론 벽파는 후원자인 정순왕후가 죽자 앞날이 걱정되었습니다. 순조가 벽파에 대한 보복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

조선왕조실록113ㅡ114

?조선왕조실록 제113,114화 ?(정조8)정조의 죽음 정조의 나이 49세에 겪은 이런 일들은 그의 말년의 분위기를 보여 줍니다. 그는 14년 동안 온 힘을 기울여 혁신정치를 펴 보려 했지만, 보수세력이나 묵은 권신들의 견제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없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여름에 들어 지병인 종기가 도져 병석에 누웠다가 11세의 세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슬픔은 너무나 컸습니다. 영조의 마지막 왕비인 정순대비 김씨는 15세에 영조의 계비로 들어와 궁중의 어른 노릇을 했습니다. 김씨는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 10년이나 어렸습니다만 혜경궁 홍씨는 지극정성으로 정순대비를 받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순대비는 친정붙이에 휘둘려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을 거들었고 세손인..

조선왕조실록111ㅡ112

?조선왕조실록 제111화,112화 ?(정조6)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다. 정조가 능행길에 나서 한강의 배다리를 건널 때면 그 언저리에 백성들이 앞다투어 몰려나와 고개와 들판을 하얗게 메웠다. 그들은 너도나도 “우리 임금 용안 한번 보세”라고 떠들면서 서로 앞줄에 서려고 자리다툼을 할 정도였다. 정조는 때로 어가를 멈추고 이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백성들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일부 반대세력을 제외하고는 성군이 태어났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특히 많은 핍박을 받던 서민들이 왕의 덕을 칭송하며 살길을 찾아 생업에 전념하는 기풍이 일었다. 정조는 학문과 문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가 사직단에서 사직제사를 지내던 어느 날, 조용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전악(典樂, 음악 지휘 책임자)을 불러서 곡조가 맞..

조선왕조실록109-110

?조선왕조실록 제109화,제110화 ?(정조4)규장각을 두어 정치 엘리트 양성(2) 또한 정조는 처음으로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실시했는데, 문신을 가려 뽑아 규장각에서 일정 기간 공부하게 하고 때때로 성취도를 재는 시험을 보게 했다. 초계문신 가운데 성적이 좋으면 좋은 벼슬자리에 발탁하였다. 초계문신은 바로 신진 정치 엘리트이며, 여기서 배출된 이들이 이가환 · 정약용 등이다. 정조는 부정부패를 뿌리 뽑으려고 때때로 암행어사를 지방에 파견했다. 하지만 암행어사가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지자 암행어사의 부정을 캐는 암행어사를 뒤딸려 보내기도 했다. 정조의 남다른 신임을 받는 암행어사들은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수령을 임명해 현지에 보낼 때에는 늘 개인 면접을 하고 세세하게 백성을 위한 정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