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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치·경제·과학 589

조선왕조실록 51~52화

?조선왕조실록 제51화,제52화 ?(인종, 명종 3) 문정왕후 그리고 을사사화(乙巳士禍) 문정왕후(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조정의 실권은 윤임을 필두로 한 대윤에서 문정의 동생인 윤원로, 윤원형을 필두로 하는 소윤으로 넘어갔다.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측 윤원형은 그 측근인 임백령 등을 동원하여 대윤측의 대표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였다고 무고함으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 무수한 신료와 선비들을 사사하니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씨 외척간의 싸움이었으나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으로서,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이후 약 50년간 신료와 선비들이 대규모로 옥사한 사화는 이로써 마지막이 되었다. ※ 4대사화 : 무오사화, 갑자사화(이상..

조선왕조살록49~50화

?조선왕조실록 제49화, 50화 ?(인종, 명종 1) 인종 즉위와 *끝없는 권력투쟁. 중종의 뒤를 이은 조선 제12대 왕은 인종입니다. 인종은 중종의 정비인 장경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듬해 장경왕후가 죽어 궐 밖에 재상가에서 성장하였는데, 그 총명함에 신료들이 모두 탄복할 지경이었습니다. 인종은 관례보다 빠른 6세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 되었고 커가면서 이상적인 군주 상에 가까워진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어린 세자를 둘러싼 주위 환경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즉,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경빈 박씨의 소생인 복성군이 있었고, 새로 중전이 된 문정왕후가 있었다. 그리고 중종은 자기의 왕위 보존에만 관심이 있을 뿐 대승적 견지에서의 국가관이라고는 애초에 없었으니, 말만 세자일 뿐 그..

조선왕조실록 47~48화

?조선왕조실록 제47, 48화 ?(중종 6)조광조의 죽음. 조광조는 임금과 대면할 기회 한 번 갖지 못한 채 그대로 유배 길에 올랐다. 조광조는 오로지 근본에 힘쓰고 원칙과 정도만 걸어온 사람으로서, 반듯하고 사심이 없었으며 온화한 성품에 인재라면 천민이라도 등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누구라도 공부하고 수양하면 성인군자가 될 수 있었다고 믿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임금을 끝없이 계도하여 군자가 이끄는 나라를 만들고자 성심을 다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현실정치의 냉엄함을 잘 알지 못한 치명적 실수, 군왕제 하에서 신하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 중종의 개인적 자질 부족 등 (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지도자는 쇠퇴의 길을 예견함과 다를바 없는데, 중종이 복을 찼네~ ) 여러 이유로 그 꿈을 ..

조선왕조살록45~46화

?조선왕조실록 제45, 46화 ?(중종 4)기묘사화(己卯士禍-1) 조광조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주장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연산군을 몰아 낸 중종반정 자체를 역적질로 본다는 심각한 오해를 살 수 있는 위험천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광조 세력은 과도한 공신 지정에 따른 폐해 수정이라는 명분과 중종의 지지를 믿고 이를 과감히 추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중종은 조광조 세력의 위와 같은 대규모 위훈삭제 주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대했으나, 조광조 세력은 이를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중종은 결국 본인의 의지와 달리,다른 신료들의 지지까지 입은 조광조의 주장을 본심에 반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훈구파의 전횡에 시달린 백성들은 이러한 조광조의 급..

조선왕조실록43~44화

?조선왕조실록 제43화,44화 ?(중종 2) 중종이 살아가는 법 *그리고 조광조의 등장.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성대군은 변덕스러운 연산 형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고, 칼날 위에 선 것과 같이 극도로 조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법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진성대군(중종)은 왕이 되었으나 힘이 없기는 매한가지 였다. 중종은 서슬 퍼런 반정 중신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고, 그런 까닭에 중종의 살아가는 법은 바로, “연산과 반대로 하기”였다. 사냥이나 연회를 피하고 학문에 열중했으며 신하들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중종의 모든 결정은 항상 “조정이 모두 반대하지 않으니 따르노라”식이었고, 왕의 주도 아래 전망을 갖고 추진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이 시기의 백성들은 연산 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실록41~42화

?조선왕조실록 제41화, 42화 ?(연산군일기 7) 패악의 절정 *그리고 몰락의 시작 갑자사화가 시작된지 70일이 지난 후 연산은 이만하면 백성과 신하들이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는 매우 조심스런 대신들의 간언에, “10년은 풍속을 바로잡아야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대신들을 아연실색하게 하였습니다. 연산의 자칭 개혁은 갈수록 그 범위가 넓어졌고 잔혹해졌습니다. 연산은 죄인을 잡아올 때 손바닥을 꿰어 끌고 오게도 하고, 배를 가르고 뼈를 바르는 광인과도 같은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또한 연산은 어미인 폐비 윤씨의 제삿날엔 후원에서 여럿이 보는 가운데 성관계를 갖기도 했고, 조참에 백관을 꿇어앉도록 하고, 하급 문신과 대간들을 자신의 가마를 메게 하는 등 하는 짓이 점점 해괴해졌습니다. 조선의 태..

조선왕조살록39~40화

?조선왕조실록 제39화, 40화 ?(연산군일기 5)복수의 시작 술 몇 방울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이세좌를 파직한 연산은 그로부터 며칠 후 조정 중신들을 모아 놓고 “내가 이세좌를 파직한 것은 대간들이 반드시 벌을 청할 것으로 알고 그런 것인데, 아무도 벌을 청하지 않으니, 이는 이세좌의 힘이 두렵기 때문이냐” 라며 불호령을 내렸고, 화들짝 놀란 대신들이 이세좌에게 벌을 주기를 청하자 연산은 이세좌를 유배하고 그 아들들을 파직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연산은 두 달 만에 이세좌를 불러들였고 대궐로 불러 친히 술을 따라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신들은 연산의 지난 행동이 해프닝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기쁜 나머지 돌아온 이세좌의 집으로 몰려가 축하를 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느낌이 안오나?)..

조선왕조실록37~38화

?조선왕조실록 제37화, 38화 ?(연산군 일기 3) 무오사화 *무오사화 1(戊午士禍 1) 사초를 살피다가,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과 거기에 세조가 며느리 격인 여자를 탐했다는 내용의 사초를 본 이극돈은 사지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극돈이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사초의 내용은 본래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었다가 나중에 연산이 알게 되면 실록청의 당상인 자신이 목숨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이기에, 이극돈의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이극돈은 평소 아이디어가 풍부한 유자광을 찾아갔습니다. 유자광은 학문만 높은 것이 아니라 당구, 골프, 바둑, 고스톱 등 다방면에 큰 재주를 가졌으나 서자 출신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에 사회불만이 많은 자였는데, 세조..

조선왕조실록33~34화

?조선왕조실록 제33화, 34화 ?(예종, 성종 3) 예종의 죽음, *성종의 등극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세자가 되었고, 5년여의 세자 생활을 거친 후 등극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한명회 등 공신들이 정사를 농단하는 공신의 시대였는데, 온건한 성품의 예종은 등극하자 의외로 강하게 공신들을 압박하였습니다. 예종은 즉위 후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공신을 불문하고 칼을 씌워 잡아와라”, “탐오 불법이 있다면 공신, 당상관을 가리지 말고 구금하고, 고문을 해서라도 진상을 밝혀라”는 명을 내리는 등 공신들을 장악하는 한편,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아울러 몇 년 안에 기어코 부왕인 세조를 능가하는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히..

조선왈조실록 31~32화

?조선왕조실록 제31화, 32화 ?(예종, 성종 1) 세조의 죽음, *예종의 등극(1) 세조는 완전한 권력을 거머쥐게 될 때까지 안평대군 등 가까운 혈육과 김종서, 성삼문 등 시대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인물들을 참 많이도 죽였고, 그 살육의 행진은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조의 이러한 무력질주에 대부분의 계책을 낸 사람은 한명회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정난을 통해 무력으로 왕이 된 절대군주가 원활한 통치와 후대의 안정적 왕권 확보를 위해 취하는 기본 방정식은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공신들을 모조리 죽여 후환을 없애는 방식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세조는 한명회 등 공신들을 끝까지 예우하며 함께 정국을 운영하였는데, 이는 한명회와 신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