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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치·경제·과학 589

천년고찰 왕대사

충남 보령 가볼만한곳/왕대사(왕대사마애불-천년고찰.전통사찰 보령시 내항동 왕대산 왕대사 출처 충남 보령 가볼만한곳/왕대사(왕대사마애불-천년고찰.전통사찰) 충남보령시 내항동 왕대산 왕대사의 대웅전 충남 보령 가볼만한곳/왕대사(왕대사마애불-천년고찰.전통사찰) 충남 보령 가볼 만한 곳인 대천과 홍성 1박 2일 코스의 둘째 날로 이른 아침 해돋이는 안개로 제대로 담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 채 보령을 떠나기 전에 보령 가볼만한곳으로 유명한 왕대사를 향했다. 이 앞길을 지날 때 큼지막하게 불을 밝히던 '왕대사'란 글자에 호기심에 검색을 해보고 다음날 찾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왕대사는 천년고찰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머물렀던 전통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왕대사에서 내려다 뵈는 탁 트인 시야는 가슴을 활..

조선왕조실록131(끝)

?조선왕조실록 제131화 ?(순종 2) 이름 뿐이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즉위 직후 일본은 순종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완용 등의 친일 대신과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법령 제정권, 관리 임명권, 행정권 등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에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의 모든 통치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순종은 즉위 3년 만에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대한제국은 주권을 상실했습니다. 이로써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한 지 519년 만에 조선왕조가 망하고 만 것입니다. 순종은 일본에 의해 '이왕(李王)'의 신분으로 격하된 채 창덕궁에 기거하다가 1926년 4월 25일에 죽었습니다. 순종은 살아 있는 내내 병약했고 판단력도 흐렸습니다. 일설에는 고종을 ..

조선왕조실록 129-130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29,제130화 ?(고종 6)대한제국의 자주를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비운의 왕 고종은 1907년 7월,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습니다. 고종의 퇴위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었습니다. 고종은 1907년 4월 20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명의 밀사를 파견해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상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이 비밀외교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고종도 일본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습니다. 고종은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倂呑) 이후인 1919년 1월 21일에 덕수궁에서 68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러한 분노..

조선왕조실록127-128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27,128화 ?(고종 4)흥선대원군과 민비의 갈등 속에 흔들리는 조선 1882년(고종 19)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민씨 정권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임오군란은 무위영 소속 옛 훈련도감 군인들이 일으킨 대규모 폭동으로, 1년이 넘게 받지 못했던 급료를 지급받는 과정 에서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 를 비롯한 민씨 척족들과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습니다. 여기에는 민씨 척족들이 권력을 독점해 자행한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과 강화도 조약 이후 드러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대한 적개심이 작용했습니다. 그 와중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민비는 몰래 궁을 빠져나가 장호원으로 피란했습니다. 그 사이 군민들의 지지를..

조선왕조실록125-126

?조선왕조실록 제125화,126화 ?(고종 2)흥선대원군 집권의 명암, 개혁 정책과 쇄국 정책. 고종의 즉위와 함께 조대비는 3년간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조정의 실권은 흥선대원군에게 넘어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우선 인사권을 장악하고 그동안 세도정치를 해 오던 외척 세력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고 문란해진 국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내정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우선 부패한 유림의 온상이 되어 버린 서원을 철폐하고, 그동안 상민에게만 부과해 오던 군포(軍布)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했습니다. 이러한 과감한 개혁 정책은 그동안 양반들의 착취에 고통받던 백성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는 국가 재정 확충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흥선..

조선왕조실록123-124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23,124화 ?(철종 4)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다. 철종에게는 부인이 8명이나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안동 김씨 세력은 자신들의 세도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만한 종실은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한때 헌종의 후사로 거론되었던 이하전을 끝내 역모로 몰아 사사한 것에서도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하전은 평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인가? 아니면 김씨의 나라인가?"라고 하며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그것이 그의 명을 재촉했습니다. 이렇듯 500년을 이어 온 이씨 왕실의 씨가 말라 가는 가운데 철종은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갑자기 왕위에 ..

조선왕조실록121-12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21,122화 ?(철종 2)아저씨가 조카를 잇는다 철종은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항렬로 따지면 헌종의 아저씨뻘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왕통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를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은 철종을 순조의 아들로 삼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예조에서도 철종이 종묘에 읽을 축문에 순조를 훌륭하신 아버지라는 뜻의 '황고(皇考)'라 칭하고, 철종을 '효자(孝子)'라고 칭하게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헌종의 생부인 익종(효명세자)에 대해서는, 영조가 경종에 대해서 훌륭하신 형님이란 뜻으로 '황형(皇兄)'이라고 하고 영조 자신을 '효사(孝嗣)라 칭한 것에 의거해 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하고 보니 철종이 헌종과 헌종비에 대한 축문을 ..

조선왕조실록119-120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9,120화 ?(헌종 3)흉흉해진 민심과 흔들리는 왕실 이후에도 이양선의 출몰은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민심은 흉흉해졌습니다. 외세의 침투가 시작되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도 서서히 깨달아 갔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 합당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척사 정책을 고수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 또한 견제 세력이 없는 세도정치의 폐단이었습니다. 한편 어엿한 청년이 된 헌종은 점차 외척인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헌종은 궁에 들어온 외숙 조병구를 불러 그의 죄를 따지며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조병구에 대한 경고이자 풍양 조씨 세도에 대한 경고였..

두문동72인

두문동 72인 임신년(1392) 7월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 에게서 왕위를 물려받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고려의 신하였던 권문세가들과 고려 왕족 중에서 조선의 태조에게 항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개성에 남아따라가지 않았다. 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한 고려의 유신들이 은거하였던 마을을 그 지역 사람들은 杜門洞이라고 했는데, 두문동은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의 서쪽 골짜기에 있었다. 고려의 유신인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이곳에 들어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包圍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

조선왕조실록 117ㅡ118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7,118화 ?(헌종1) 외척 풍양 조씨의 보호 속에 즉위한 헌종 헌종은 1827년(순조 27) 7월 18일에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순조의 손자로,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순조의 뒤를 이어 1834년(순조 34)에 즉위했습니다. 이때 헌종의 나이 불과 8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탓에 헌종은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습니다. 이어 1837년(현종 3)에는 안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를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가 계속해서 이어질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순조는 죽기 전에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영에게 헌종의 보도를 부탁했고, 풍양 조씨가 득세하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