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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치·경제·과학 589

조선왕조실록93-94

?조선왕조실록 제93화,제94화 ?(숙종 3) 서인의 복귀와 노론, 소론 분열 전회에서 본 경신환국의 연출자는 김석주이지만, 결국 남인이 떠난 자리를 채운 건 서인이었다. 서인은 곧바로 잃어버린 6년의 복구에 나서, 먼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복권시켰다. 임금도, 대비도 높이 받들고, 영상 이하 대신들도 모두 다 제자들이니, 송시열은 예전의 그 권위를 모두 되찾았다 할 만 했다. 송시열의 유배생활은 사형수의 하루하루나 다를 것이 없었다. 남인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목숨을 원했고, 결단이 빠른 왕이 언제 ‘아뢴 대로 하시오’라고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인 정권을 몰아낸 김석주는 구원자나 다름이 없었고, 이런 이유로 송시열은 여러 방면에서 김석주와 뜻을 같이 했다. 최강 권력자의 꿈을 이룬 김석주는..

조선왕조실록91-92

?조선왕조실록 제91화,제92화 ?(숙종 1)경신환국 (庚申換局)(1)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숙종대 초반의 정국에서 정국을 이끌어간 인물은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입니다. 서인의 대표적 명문가 출신에 현종, 숙종의 가까운 외척이기도 한 김석주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신 서인 출신이었으나, 송시열이 김석주의 조부인 김육(대동법 추진)과 반목하는 바람에 송시열과 관계가 좋지 않아졌다. 김석주는 한직에 머무르다 현종 말년의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임에도 자신의 스승인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 정권이 권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4세의 소년 임금 숙종은 즉위 후 곧 과거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이 했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

조선왕조실록 89-90

?조선왕조실록 제89화,제90화 ?(효종 현종 4) 예송논쟁 북벌을 기치로 한 나름대로의 개혁군주 효종은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41세) 효종은 귀 밑에 종기가 심각해 침의 신가귀로부터 침을 맞고 고름을 조금 짜낸 후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곧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한마디 유언을 남길 겨를도 없는 순식간의 일이었고(타살설이 있으나 근거나 배경이 취약합니다), 침을 놓은 신가귀는 교살형을 당하였습니다. ☆-------------☆ 효종이 죽은 후 선양에서 태어난 아들이 18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으니, 이가 조선 제18대 왕인 현종입니다. 현종 시대를 특징지을 수 있는 ..

조선왕조실록 87-88

?조선왕조실록 제87화,제88화 ?(효종 현종 2) 북벌의 실체(1) 전회에서 본 것처럼 효종하면 북벌, 북벌하면 효종으로 알려져 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북벌을 계획했고, 재야 산림의 거두이자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을 불러들여 이들과 합작해 북벌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중원을 정복한 청나라의 힘과 기세가 하늘을 찔러 조선이 청나라를 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말이 되지 않던 시기였다. 또한 효종은 격변의 시대에 8년간 이역 땅에서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등 온갖 경험을 했고, 귀국해서는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의 죽음 등 정치의 비정함까지 두루 지켜 본데다, 세자에 책봉된 이후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을 우려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며 살아온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

조선왕조실록 85-86

?조선왕조실록 제85화,제86화 ?(인조 7) 비운의 소현세자(2) 이즈음 심양에서는 청태종이 병으로 죽고, 그의 동생 도르곤이 청 태종의 여섯 살 난 아들을 황제로 세운 후 전군을 총 동원해 명나라 정벌에 나섰다. 한편, 이때 명나라에서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니 이자성이 급격히 세력을 키워 북경을 접수했다(명나라 승정제의 자살과 함께 명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음). 그러나 청나라의 도르곤은 압도적 전력으로 어렵지 않게 북경을 함락하고 명실공히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북경을 점령한 청나라는 변발을 강요하는 등 한족의 반감을 사기도 했으나, 유연하고 절도 있는 조치로 인심을 얻고, 드디어 북경으로 천도를 하게 되었다. 소현세자와 동갑인 도르곤은 소현세자에게 “이제 중원이 하나로 명확하게 통일되었으..

조선왕조실록 83-84

?조선왕조실록 제83화,제84화 ?(인조 5) 병자호란(3) 나라를 완전히 멸해버리겠다는 최후통첩에, 조선 조정은 1월 27일 청 태종에게 마지막 국서를 보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자께서는 뜻을 분명히 밝히시어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선의 국서를 받은 청 태종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생각하라. 그 은혜를 생각해 자자손손 신의를 어기지 않는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청과 조선은 군신의 예로 대하고 조선은 명과 단교한다. ?️장자 등을 인질로 삼는다. (등등등등등...) 삼전도에 항복식을 거행할 단을 쌓은 청은 몸을 결박하고 관을 끌고 나오는 만주식 예를 ..

조선왕조실록 81-82

?조선왕조실록 제81화,제82화 ?(인조 3) 병자호란(1) 정묘년의 치욕을 당한지 얼마되지 않아, 인조는 자기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승하여 명국의 승인까지 받게 되자,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는지 후금에 대한 복수와 배척의 뜻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조선이 진정으로 정묘년의 치욕을 갚고자 한다면, 왕실이나 종친, 훈신들 나아가 양반들이 가진 갖가지 특전을 버리고 재정을 확충한 다음 민심을 수습하고, 무기를 장만하는 한편 군대를 모아 훈련을 시키는 등 야무진 각오와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와 중신들은 “소중화”라는 관념과 대의에만 빠져 숨가쁘게 돌아가는 주변 정세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물론이요 실질적인 준비도 전혀 없이 나라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었던 것이다. 후금은 이즈음 중국..

조선왕조실록79-80

?조선왕조실록 제79화,80화 ?(인조 1) 인조 등극과 치욕의 예후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태종이나 세조와 같은 반정의 완전 주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중종과 같이 반정 세력에 의해 왕위에 앉혀진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할 여건은 되었다 할 수 있다. 인조는 반정이 서인 정권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을 잘 알고있었고, 붕당의 폐해 역시 잘 알았기에, “당이란 말은 주자의 말이라 해도 듣고 싶지 않소” 라고 하며 붕당의 활개를 허용하지 않았고, 특정인에게 권력이 쏠리는 것도 늘 경계했다. 또한 반정의 첫 번째 명분인 사대의 예를 지키기 위해 친명배금정책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강하게 휘몰아치는 대륙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약소국의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약한 자..

조선왕조실록 77-78

?조선왕조실록 제77화,78화 ?(광해 5) 광해의 외교 마인드 중원의 지배자 명나라가 만력황제의 방탕, 조선 파병으로 인한 국력손실 등으로 쇠락해가고 있던 즈음, 명의 지배를 받고 있던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는 8기제 등 강력한 전술 전략을 바탕으로 인근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대금(후금)을 건국한 후 1618년에는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구원 파병을 요청해 왔는데,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은 “천자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할 땐 죽어도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광해는 누르하치의 기세가 오히려 명나라를 압도한다고 보고 명나라의 요구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75-76

?조선왕조실록 제75화,제76화 ?(광해 3) 임금 광해는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선조 40년 10월, 선조는 갑자기 쓰러져 자리에 누웠다. 죽음을 예감한 선조는 오만 가지를 생각했으나 차마 두 살에 불과한 영창대군으로 어찌해 볼 수는 없었고, 결국 비망기를 내려 장성한 광해에게 전위 또는 섭정을 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갑자기 선조가 몸져누워 위와 같은 뜻을 밝히자 급해진 것은 영창대군에 올인한 소북파의 유영경과 인목왕후였다. 인목왕후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선조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으나 유영경은 여러 이유를 들어 선조의 뜻에 반대를 하였다. 반면에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는 유영경이 세자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불충을 저질렀다며 유영경을 강하게 공격하였다. 대북과 소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