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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25-126

碧空 2022. 3. 10. 20:13

?조선왕조실록 제125화,126화
?(고종 2)흥선대원군 집권의
명암, 개혁 정책과 쇄국 정책.


고종의 즉위와 함께 조대비는 3년간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조정의 실권은 흥선대원군에게 넘어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우선 인사권을 장악하고 그동안 세도정치를 해 오던 외척 세력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고 문란해진 국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내정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우선 부패한 유림의 온상이 되어 버린 서원을 철폐하고, 그동안 상민에게만 부과해 오던 군포(軍布)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했습니다.

이러한 과감한 개혁 정책은 그동안 양반들의 착취에 고통받던 백성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는 국가 재정 확충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탄 채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중건했습니다.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은 국가와 왕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복궁 중건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는데 흥선대원군은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거두고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했습니다.

초반에는 종친과 양반들이 자발적으로 원납전을 내고, 부역에 참가하는 사람에게는 수고비를 지급하는 등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사 현장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는 등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예상보다 공사 기간이 길어지자 점차 원납전과 부역 모두 강제성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부족한 자재를 충당하느라 각 지방의 고목들이 잘려 나갔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거두고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했습니다.

당백전은 종래 사용하던 화폐인 상평통보(常平通寶) 액면가의 100배에 달하는 것이었으나 실질가치는 5~6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고물가를 초래하고 화폐경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와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습니다.

한편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는 동안 외세 침입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이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더욱 불안하게 했습니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들과 청나라 사이의 갈등을 조정해 주고 그 대가로 연해주를 확보한 후 조선에 대해서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영국은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막고자 골몰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의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대신 쇄국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와 같은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양인들에 대한 조선의 두려움과 거부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력 도발의 원인을 조선 내부의 서양 지지 세력, 즉 천주교 신자들의 내응에 있다고 보고 그들을 더욱 박해했습니다.

순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다소 줄었다가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는 심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천주교 박해를 시작했는데,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도굴되는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박해 의지를 더욱 굳혔습니다.

그리하여 1866년(고종 3)에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1872년(고종 9)까지 8천여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습니다.

또한 신미양요가 발생한 직후에는 전국적으로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주화(主和)는 매국(賣國)'이라는 기치 아래 흉흉한 민심을 하나로 모으려고 했습니다.

척화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략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그러나 이러한 척화 정책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조선을 고립시키고 더욱 무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다음 제126화 계속~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26화
?(고종 3)민씨의 집권과
조선의 개항


굳게 잠겨 있던 조선의 빗장은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함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하야에는 대표적 척사파인 최익현(崔益鉉)의 상소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에는 찬성했지만 서원 철폐 등의 내정 개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습니다.

최익현은 1873년(고종 10)에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고 싶었던 고종은 최익현을 호조참판에 임명해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을 품은 보수 양반층과 척족 세력들도 최익현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마침내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을 통렬히 비판하며 하야를 촉구하는 상소를 다시 한 번 올렸고, 이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10년의 세도를 마감하고 하야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실권으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척족 일가가 정권을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권력을 잡은 민씨 세력은 흥선대원군이 고수하던 쇄국 정책을 청산하고 개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1875년(고종 12)에 일어난 운요호(雲陽號) 사건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런 가운데 민씨 정권은 1876년(고종 13)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의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그런데 총 12개조로 된 강화도 조약의 내용이 조선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에서 고종과 민씨 정권의 외교적 미숙이 드러났습니다.

강화도 조약으로 우려했던 개화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보수 유림층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이 그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하야 직후 상소의 내용이 지나치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쫓겨났던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상경해 궁궐 앞에 엎드려 개화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1880년(고종 17)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조선책략(朝鮮策略)은 위정척사 운동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조선책략》은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의 참찬관 황준헌이 쓴 책으로, 러시아의 남침을 막기 위해 조선이 "중국과 친밀하게 하고, 일본과 손을 잡으며,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親中國 結日本 聯美國)."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민씨 정권은 이것이 앞으로 조선의 외교 문제를 풀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이 내용을 널리 알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는 전국의 보수적 유생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그들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하고 책을 가져온 김홍집의 처단을 요구했습니다.

위정척사 운동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과 저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척사파들은 서양 세력을 무조건 배척하기만 할 뿐 조선의 외교 정책에 대한 올바른 대안은 전혀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제127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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