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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11ㅡ112

碧空 2022. 2. 26. 18:54

?조선왕조실록 제111화,112화

?(정조6)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다.

정조가 능행길에 나서 한강의 배다리를 건널 때면 그 언저리에 백성들이 앞다투어 몰려나와 고개와 들판을

하얗게 메웠다.
그들은 너도나도 “우리 임금 용안 한번 보세”라고 떠들면서 서로 앞줄에 서려고 자리다툼을 할 정도였다.
정조는 때로 어가를 멈추고 이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백성들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일부 반대세력을 제외하고는 성군이 태어났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특히 많은 핍박을 받던 서민들이 왕의 덕을 칭송하며 살길을 찾아 생업에 전념하는 기풍이 일었다.

정조는 학문과 문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가 사직단에서 사직제사를 지내던 어느 날, 조용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전악(典樂, 음악 지휘 책임자)을

불러서 곡조가 맞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였는데,
전악이 악기를 점검한 끝에 잘못 연주한 악기를 발견했던것이다.

정조는 음악만이 아니라 문장, 그림, 도장 등 문체와 예술의 취미도 높았고 안목도 있었다.

그는 언제 책을 읽고 정무를 볼 시간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늘 글을 지었고 도장을 새겼다.

박지원과 그 제자들이 비어 · 속어를 쓰는 문체를 유행시키자, 그는 박지원을 불러 꾸짖어 반성을

촉구 하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 교도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이 발각되자, 그 당사자들만 처벌하고 모든 천주교도들을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종래 역적의 글이라고 해서 보기를 금하던 정도전 · 허균 등의 글을 모아 규장각에 보관하게 했다.

정조는 현실개혁 이론을 담은 실학자들의 글을 즐겨 읽었는데 앞시대에 살았던 반계 유형원 · 성호 이익 ·

순암 안정복의 글을 읽고 현실정책에 반영하기도 했다.

또 실학자로 시골에 묻혀 있던 장흥의 위백규를 불러 벼슬을 내렸으며 그들의 개혁이론에 귀를 기울였다.

정조는 상업의 장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종래에는 물건을 만든 사람이 그 물건을 팔지 못하게 금지했는데 이는 장사꾼만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하여

세금 따위 통제를 가하려는 의도였다.
정조는 이러한 관례를 철폐하고 통공정책(通共政策)을 허용, 누구나 물건을 사고 팔 수 있게 하여 상업과

공업의 발전을 기했던 것이다.

정조는 문풍(文風)을 일으키기 위해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태도와 의지를 보여 주었는데, 정조 자신이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글쓰기에 정진하기도 했다.

특히 정조는 도장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수많은 도장을 손수 새기기도 하고, 나무나 돌 따위의 여러 재료로 도장의 모양을 바꾸어 보기도 했다.

그는 술 따위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나 도장파기 등 예술적인 일에 전념 하면서 심신을 수양했던

것이다.
그가 판 도장은 규장각의 책들에 찍혀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선명하게 전해 주고 있다.

?다음 제112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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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112화

?(정조7) 새 서울을 꿈꾸며
화성을 쌓다

1793년 정초에 정조는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수원 행궁에 이르렀다.
그는 붓을 들어 화성(華城)이라고 쓰고는  이 글씨를 현판으로 만들어 수원부라고 쓰여 있던 현판을 뜯어내고 대신 걸었다.
수원부를 화성으로 바꾼 것이다.

정조는 화성을 방위하는 군대를 새로이 설치하고 장용영이라고 명명했다.

곧이어 정조는 화성 축조를 발표했는데 이로써 오랜 구상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정조는 그동안 정약용을 은밀하게 불러 성쌓기 기계를 설계하라고 일렀고, 정약용은 고심 끝에 무거운 돌 따위의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는 기중가(起重架) 도면을 완성했다.

화성 공사는 2년 7개월 만에 완성을 보았는데 총둘레가 5744미터였고,  동원 연인원은 1만 1820명, 총경비는 돈 87만 냥쯤, 곡식 1만 3000석쯤 소요되었다.

예전과는 달리 동원된 인부들에게 규정된 임금을 지불했고 들어간 경비의 내역은 1냥까지 꼼꼼하게 장부에 적게 했다.

정조는 완성된 성을 둘러보고 나서 정약용을 불러 기중가를 사용해 돈 4만 냥을 절약할 수 있었다고 칭송했다.

느닷없는 공사에 벼슬아치들은 국가재정을 낭비한다고 수군거리기도 하고 아버지를 위해 거대한 성을 쌓은 것이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만 정조는 단호했다.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정조실록》 15년)

이게 무슨 뜻일까요?
정조는 오래전부터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당쟁의 뿌리가 깊은 서울을 옮겨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고 문벌이 대궐 같은 저택을 가지고 있는 서울을 벗어나 벼슬아치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큰 뜻이 있었던 것이다.

기득권 세력을 제거하지 않고는 혁신정치와 개혁정책을 제대로 펼 수 없고 성공을 거둘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을 끝내 이루지는 못했다.

정조는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능을 철 따라 참배하는 지극한 효성을 보였고, 한 많은 어머니를 공손히 대접하기에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조는 가장 신임하던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무상을 느껴 곧잘 감상에 젖곤 했다.

앞으로 중용할 마음으로 키우던 정약용마저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사직을 하고 마재의 집으로 돌아가자 그는 더욱 쓸쓸해 했다.
정조는 곁을 떠난 신하들을 항상 그리워했다.

?다음 제113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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