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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치·경제·과학 590

김대중회고록8

박정희 지시? 이후락 단독 범행? DJ가 본 DJ 납치사건 전말 ⑧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이 내 옆에 나타나셨다. 성당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예수님의 긴 옷소매를 붙들었다. ‘내가 아직도 우리 국민을 위해서 할 일이 많습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973년 8월 9일 0시를 갓 넘은 시각. 나, 김대중(DJ)은 현해탄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국 중앙정보부(중정)의 공작선 ‘용금호’에 감금당한 상태였다. 몸은 관(棺) 속 바닥에 까는 칠성판 같은 판자에 송장처럼 묶였다. 입에는 재갈이 물렸고, 두 눈은 붕대로 가려졌다. 손과 발에는 30~40㎏은 됨 직한 돌처럼 무거운 물체가 매달렸다. 1975년 서울 명동성당에서 이희호 여사(왼쪽)와 함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 73년 납치 사건..

김대중회고록7

Leader & Reader 김대중 육성 회고록 박정희, 망명 중이던 DJ에 “한국 오면 부통령 주겠다” ⑦ 카드 발행 일시2023.05.18 에디터고대훈강병철오욱진우수진 망명(亡命). 망명은 정치적 핍박과 박해를 피하려는 쫓기는 자의 고독한 운명이다. 고향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운의 삶이다.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죄책감을 떠안아야 한다. 망명객은 자신을 적대시하는 체제를 비판하고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한다. 망명 투쟁은 험난하고 절박하다. 김대중(DJ)은 졸지에 망명객이 됐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의 ‘10월 유신 체제’는 반대 세력에 정치적 탄압을 가했다. 이에 맞서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엄혹한 시대를 열었다. 1년 전 대권에 도전해 박정..

김대중회고록6

“DJ 별거없네” 이랬던 박정희…DJ 돌풍에 충격, 유신 꺼내다 ⑥ 카드 발행 일시2023.05.11 에디터고대훈강병철오욱진김한솔우수진 1971년 4월 18일 일요일, 그날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나, 김대중은 장충단공원에 있었다. 4·27 7대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최대 승부처인 서울에서 유세를 했다. 기호 1번 박정희 공화당 후보의 장기 집권이냐, 기호 2번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반란이냐.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었다. 오후 2시쯤 안국동 신민당사에서 출발해 유세장인 장충단까지 갔는데 수많은 인파가 내 차를 에워싸고 행진했다. 길거리는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로 넘쳐흘렀다. 유세가 시작한 오후 3시, 장충단공원은 물론 타워호텔(현 반얀트리) 방향의 도로와 장충체육관 광장까지 약 6만 평에 청중이 발 ..

김대중회고록6

“DJ 별거없네” 이랬던 박정희…DJ 돌풍에 충격, 유신 꺼내다 1971년 4월 18일 일요일, 그날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나, 김대중은 장충단공원에 있었다. 4·27 7대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최대 승부처인 서울에서 유세를 했다. 기호 1번 박정희 공화당 후보의 장기 집권이냐, 기호 2번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반란이냐.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었다. 오후 2시쯤 안국동 신민당사에서 출발해 유세장인 장충단까지 갔는데 수많은 인파가 내 차를 에워싸고 행진했다. 길거리는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로 넘쳐흘렀다. 유세가 시작한 오후 3시, 장충단공원은 물론 타워호텔(현 반얀트리) 방향의 도로와 장충체육관 광장까지 약 6만 평에 청중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한남동에서 유세장으로 넘어가는 남산순환도로에는 ..

김대중회고록5

전라도 몰표 덕에 대통령 됐다…박정희 당선, 김대중의 한탄 ⑤ “박정희씨가 집안 툇마루 밑을 곡괭이로 파도 금이 쏟아져 나올 그런 왕운(旺運)을 타고났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허술한 쿠데타가 성공할 수가 있었겠는가.” 훗날 5·16 쿠데타의 어설픈 듯한 전개 과정을 들은 뒤 내가 지인들에게 농담조로 던진 말이다. 1961년 당시 쿠데타 소문은 심심치 않게 돌아다녔다. 혁명이니 쿠데타니 하는 말이 돌면 ‘또 그 소리냐’ 할 정도로 흔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이었다. 5·16 군사정변이 터지고 사흘 만에 국회가 군사혁명위원회(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의 포고령으로 해산됐다. 나, 김대중은 의원 선서는커녕 금배지 구경도, 의사당 의석에 앉아보지도 못했다. 강원도 인제에서 4전 5기 끝에 첫 당선된..

김대중회고록4

DJ, 박정희 쿠데타로 첫 의원직 3일만에 상실… 18년 악연 시작-김대중 육성 회고록〈4〉 김대중 육성 회고록 〈4〉 추천 영상 4전5기(四顚五起). 나, 김대중(DJ)은 1961년 5월 13일 강원도 인제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민의원)에 당선됐다. 목포(54년)와 인제(58·59·60년)에서 연거푸 네 번 고배를 마신 뒤 다섯 번째 도전에서 성공, 첫 금배지를 달게 됐다. 천신만고 끝에 붙잡은 ‘37세 국회의원 김대중’의 미래를 그리며 행복한 고민에 푹 빠져 있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목포에 무소속으로 첫 출마했으나 낙선했다(앞줄 왼쪽에서 넷째). 이후 4전 5기 끝에 61년 인제에서 처음 당선됐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당선 사흘째 되던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군인..

김대중회고록3

DJ “박정희 ‘하면 된다’ 근대화 업적, 역사적 평가 받아야”-김대중 육성 회고록〈3〉 김대중 육성 회고록 〈3〉 추천 영상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 북쪽 자락에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이 있다. 연면적 5200㎡(약 1600평)에 3층 규모로 꽤 큼지막하고 번듯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의 일생과 고속도로 건설 등 근대화, 새마을운동 같은 업적을 기리는 유품과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 기념관에는 박정희와 김대중, 섞이기 힘든 두 사람의 정신이 함께 깃들어 있다. 산업화의 박정희와 민주화의 김대중이 공존하는 언뜻 부조리한 공간이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은 당시 국민 정서를 고려할 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핍박당한 당사자이기에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김대중회고록2

"천황을 일왕이라 부르는 건 열등감" 도쿄 뒤흔든 DJ 파격 [김대중 육성 회고록 2] 김대중 육성 회고록 〈2〉 김대중 대통령(앞줄 왼쪽)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오른쪽)가 1998년 10월 8일 11개항의 ‘21세기 한· 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천황 폐하!”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통령(DJ)의 일본 국빈 방문 첫날. 도쿄 황궁에서 열린 만찬장이 잠시 술렁였다. 김 대통령이 아키히토(明仁)를 향해 ‘천황 폐하’라고 부르며 깍듯이 예우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천황 폐하 내외분” “천황 폐하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길…”이라며 극존칭을 썼다. 당시 국내에서 주로 쓰던 ‘일왕’ ‘국왕’ ‘일황’이란 호칭의 벽을 깬 파격이었다. 추천 영상..

김대중회고록2

"천황을 일왕이라 부르는 건 열등감" 도쿄 뒤흔든 DJ 파격 [김대중 육성 회고록 2] 김대중 육성 회고록 〈2〉 김대중 대통령(앞줄 왼쪽)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오른쪽)가 1998년 10월 8일 11개항의 ‘21세기 한· 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천황 폐하!”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통령(DJ)의 일본 국빈 방문 첫날. 도쿄 황궁에서 열린 만찬장이 잠시 술렁였다. 김 대통령이 아키히토(明仁)를 향해 ‘천황 폐하’라고 부르며 깍듯이 예우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천황 폐하 내외분” “천황 폐하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길…”이라며 극존칭을 썼다. 당시 국내에서 주로 쓰던 ‘일왕’ ‘국왕’ ‘일황’이란 호칭의 벽을 깬 파격이었다. 추천 영상..

김대중 회고록1

김정일 “우리 먹으려 했던 중·일·러 견제 위해 주한미군 주둔해야”-김대중 육성 회고록〈1〉 중앙일보 입력 2023.05.16 05:00 고대훈 기자 강병철 기자 구독 연재를 시작하며(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58) 김대중(DJ·1924~2009년) 전 대통령은 생전에 자신의 80여년 삶을 반추하며 생생한 육성 구술과 함께 동영상을 남겼다. 자신이 헤쳐온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 10월 유신과 신군부 정권, 민주화 시대와 대통령 통치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간들을 회고했다. DJ의 인생은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관통한다. 그의 자전적 이야기는 이념과 관점에 따라 평가가 충돌할 수 있다. 중앙일보는 역사적 기록과 실체적 교훈으로서 조명할 가치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