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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1-92

碧空 2022. 2. 24. 19:42

?조선왕조실록 제91화,제92화

?(숙종 1)경신환국

                       (庚申換局)(1)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숙종대 초반의 정국에서 정국을 이끌어간 인물은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입니다.

서인의 대표적 명문가 출신에 현종, 숙종의 가까운 외척이기도 한 김석주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신 서인 출신이었으나, 송시열이 김석주의 조부인 김육(대동법 추진)과 반목하는 바람에 송시열과 관계가 좋지 않아졌다.

김석주는 한직에 머무르다 현종 말년의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임에도 자신의 스승인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 정권이 권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4세의 소년 임금 숙종은 즉위 후 곧 과거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이 했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송시열 등 서인들을 줄줄이 내쳤고, 이로써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허적 등을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다.

강력한 소년군주 숙종의 지원에다 김석주의 은밀한 공작을 발판 삼아 집권을 하게 된 남인세력은 오래지 않아 송시열 등 서인에 대한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측과 비교적 온건한 측으로 갈리게 되었는데, 전자의 사람들을 청남(淸南)이라 불렀고, 후자측 사람들을 탁남(濁南)이라 불렀습니다.

(남인의 분열)

권력을 잡은 남인은 너무 오래간만의 집권이어서 그랬는지 힘이 강해지고 도가 지나치면 임금의 의심과 버림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안일에 젖기 시작했다.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무사안일이 불러온 대가는 혹독했다.

한편 소년 숙종은 성장해가면서 권력에 눈이 트여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서인을 악으로 간주하고 남인에게 힘을 주었으나 남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결국 임금도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숙종이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에는 김석주의 처세와 공작의 힘이 컷다.

원래 서인 출신인 김석주는 남인 정권 탄생에 기여했지만 허적이 이끄는 남인 정국을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은 당초부터 전혀 없었다.

김석주는 뛰어난 처신으로 자신은 근왕파라는 것을 숙종에게 강하게 인식시키는 한편 허적 등 남인에 대한 숙종의 경계심을 한껏 자극시켰다.

?다음 제92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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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92화

?(숙종 2) 경신환국

                       (庚申換局)(2)

    

1680년(숙종 6년) 2월, 남인의 리더 영의정 허적은 조부의 시호를 받은 것을 축하해 대신들을 불러 축하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렸는데, 숙종은 허적을 위해 왕의 잔치 때 쓰는 유악(기름 먹인 장막)과 차일을 영상에게 갖다 주라는 지시를 하였다.

그러나 허적은 이미 유악과 차일을 갖다 쓰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안 숙종은 "과인의 허락도 없이 임금의 물건을 가져갔단 말이냐.

한명회도 못한 짓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며 대노했다.

숙종은 그날로 남인이 맡고 있던 훈련대장, 총융사 등의 병권에 관한 요직을 서인측 인사로 물갈이해버렸고, 승지와 대간마저 대거 서인으로 교체했다.

이어서 남인인 좌의정, 우의정, 대사헌이 사직 소를 올리자 즉시 이를 수리해버렸다.

또 새로 제수된 서인 대간들이 남인의 비위를 들먹이며 파직과 유배할 것을 아뢰자 숙종은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사건을 "경신환국"이라 한다.

그러나 경신환국의 원인으로 늘 제시되는 이러한 유악사건은 갑작스런 환국을 만들어내기 위한 소설이라고 보여진다.

허적의 잔치는 숙종이 이미 아낌없는 지원을 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고, 특히 임금의 유악을 말도 없이 가져다 쓰는 일은 매우 신중한 허적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신환국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김석주가 오래도록 준비한 드라마였고, 김석주의 노련한 공작에 세뇌된 숙종의 전격적 뒤집기 한판이었다.

김석주는 곧이어 정원로 등에게 허견(남인 실세)이 종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아들들로, ‘삼복’이라 불리웠음)과 함께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게 하였다.

일찍이 정원로의 집에서 허견과 삼복이 모인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복평군이 허견에게 “왕은 곧 돌아가실 것이오.

그대의 아비는 나를 왕으로 세우려 했는데 나는 곧 병조판서가 될 것이오.

그대와 피를 나누어 마셔 맹세하고 함께 의논하여 서인을 몰아냅시다”라고 말한 것을 김석주가 정원로로 하여금 고변하게 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남인의 실세 허적과 허견 그리고 삼복(三福)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김석주가 주도한 정치 공작은 결과적으로 남인 축출, 서인 득세의 권력 교체를 가져왔다.

당시 사람들은 김석주가 확실한 증거 없이 역모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음 제93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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