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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치·경제·과학 590

조선왈조실록 31~32화

?조선왕조실록 제31화, 32화 ?(예종, 성종 1) 세조의 죽음, *예종의 등극(1) 세조는 완전한 권력을 거머쥐게 될 때까지 안평대군 등 가까운 혈육과 김종서, 성삼문 등 시대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인물들을 참 많이도 죽였고, 그 살육의 행진은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조의 이러한 무력질주에 대부분의 계책을 낸 사람은 한명회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정난을 통해 무력으로 왕이 된 절대군주가 원활한 통치와 후대의 안정적 왕권 확보를 위해 취하는 기본 방정식은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공신들을 모조리 죽여 후환을 없애는 방식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세조는 한명회 등 공신들을 끝까지 예우하며 함께 정국을 운영하였는데, 이는 한명회와 신숙..

세종실록29화~30화

?조선왕조실록 제29화, 30화 ?(단종, 세조 7)사육신(死六臣) 지난 회에서 본 바와 같이,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 시도는 한명회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성삼문 등은 김질의 고변으로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댓가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성삼문 등을 우대했던 세조는 격분 하여 성삼문 등을 더욱 혹독하게 고문하였으나, 성삼문 등은 끝내 그 기개를 꺾지 않았다고 합니다. 야사에서 전하는 장면을 조금만 소개합니다. ※성삼문은 세조를 “나으리”라 칭하고, 나라를 도둑질했다면서 세조를 꾸짖었고, 격분한 세조가 “그러면서 왜 나의 녹을 먹었느냐” 라고 하자, “나으리가 준 녹은 창고에 손도 안 대고 쌓아놓았다” 라고 답했으며, 사실이 그러했다. 성삼문은 세조가 나으리란 말을 거두라며 형리로 하여금 시뻘건 인두로 몸을 ..

세종실록27화~28화

?조선왕조실록 제27화, 28화 ?(단종, 세조 5)계유정난 실록에 나타난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결정적 명분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의 역모였스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들이 역모를 꾀했을까요? 단종실록에서 안평과 김종서의 역모 증거로 제시되는 첫 번째는 김종서의 측근 이징옥이 북방의 무기를 한양으로 빼돌렸다는 것인데, 안평과 김종서 등이 힘을 합쳤다면 역모사건을 조작한 후 한양의 군을 동원해 수양을 치고 단종을 압박하면 될 일이지, 대단한 것도 아닌 칼과 창 같은 무기를 굳이 북방에서 한양으로 옮길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영의정 황보인의 노비 아무개가 황보인 등의 구체적 역모계획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갖바치가 등장하는데, 어떻게 일개 종이 거사 계획의 내밀한 부분까지 샅샅이 알게 되었는지는..

세종실록 25화~26화

?조선왕조실록 제25화,26화 ?(단종, 세조 3) *수양과 한명회의 야망 단종실록에는 김종서 황보인 등 정승들이 왕위를 찬탈하여 안평을 옹립하려 했다고 되어 있으나, 늙은 정승들이 역적소리 들어가며 어린 왕을 폐하고 시퍼런 안평을 옹립해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봄이 합당합니다. 단지 왕이 어리고 왕실에 수렴청정할 어른이 없으므로 어린 왕이 성장할 때까지 나라를 맡아 관리할 수밖에 없는 대신 그룹으로서는 대군들에 의한 정변, 특히 수양의 정변 시도를 우려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최소한 보위를 넘볼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의 안평을 끌어들여 수양을 견제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대신 그룹과 안평의 견제로 조급해진 수양은 거의..

세종실록23화~24화

?조선왕조실록 제23화, 24화 ?(단종, 세조 1)열두살의 임금 조선 제5대 임금으로 즉위한 효자 문종은 슬픔을 딛고 세종 못지않은 정치를 펴 나갔지만, 그에겐 치명적인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즉 자신의 건강과 세자의 어린 나이, 그리고 아우들 특히 수양대군의 존재였습니다. 문종은 바로 아래 동생인 수양대군의 정치적 힘과 거침없는 기질, 그리고 언뜻 언뜻 내비치는 야심이 두려웠으나, 행여 섣불리 견제하다가는 오히려 반발의 명분만 주어 정난을 불러 올 수도 있는데다, 무엇보다 그 성격상 수양을 제거하는 일 따위는 어울리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어찌 보면, 수양을 제거하기에는 수양이 너무 커 버려 오히려 문종이 수양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종은 자신이 진정으로 수양을 아낀다..

세종실록21화~22화

?조선왕조실록 제21화, 22화 ?(세종, 문종 3) 새로운 카리스마 *그리고 한글창제 태상왕 태종이 세상을 뜸으로써 세종은 진짜 임금이 되었습니다. 태종이 죽자 신하들은 은근히 세종 길들이기를 시도했으나 세종은 이를 알고도 그대로 넘어가는 등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새로운 제왕의 리더십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종에게는 세종의 부인 심씨 가문을 박살낸 사건의 전모를 새로 밝히는 방법으로 신하들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으나 이 카드를 끝까지 사용하지 않았고, 형님인 양녕에 대해서도 끝끝내 관용적 태도를 보였으며, 그러한 정치투쟁보다는 농업, 천문과 기상, 외국어, 악기, 북방 등 모든 분야에 있어 혁신을 기하기 위한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세종의 업적은 두루 나열하기가 벅차므로 모두 생..

성주사 대낭해화상 탑비

성주사지 국보 ‘대낭혜화상탑비’로 지정명칭 변경 비문의 주인공인 무염국사 시호가 낭혜가 아닌 대낭혜임에 따라 명칭 변경 결정 황대식 기자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지(聖住寺址·사적)에 있는 국보 낭혜화상탑비 © 주간보령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지(聖住寺址·사적)에 있는 국보 낭혜화상탑비가 대낭혜화상탑비로 새이름을 얻었다. 시에 따르면 지난해 문화재청에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탑비의 지정명칭을‘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寜 聖住寺址 大朗慧和尙塔碑)’로 변경했다. 대낭혜화상탑비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에서 지난 2010년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로 지정명칭을 변경했으나, 낭을 표기한 한자에 오류가 있고 비문의 주인공인 무염국사에게 진성여왕이 추증한 시호가 낭혜(朗慧)가 아닌 대낭혜(大朗慧)임이 밝혀짐에..

얼시구 절시구..

조을시구 얼시구 절시구 조을시구 얼(臬)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조상의 빛난 얼’이라든가 ‘민족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그 얼이다. 얼은 명사(名辭)로 정신의 줏대라는 뜻이다. 넓게는 정신이나 넋, 혼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좀 모자라는 사람을 두고 얼빠진 놈이라고 한다. 줏대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얼(臬)은 한자로는 해말뚝 얼(臬)이다. 해말뚝은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재는 말뚝이다. 곧 얼은 해말뚝 시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얼이라는 것은 때를 아는 것을 말한다. 어리석다는 말은 얼이 썩었다는 말이 발음하기 좋게 바뀐 것으로 슬기롭지 못하고 우둔하다는 뜻이다. ​ 어떤 사람이 제일 우둔한 사람인가? 때를 모르는 사람이 제일 우둔한 사람이다. 반대로 가장 슬기로운 사..

네팔의 벌꿀 채취

네팔의 벌꿀​ 벌꿀채취는 수많은 문명의 태고의 문화의 한 부분으로 형성되어 전해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바위의 벽화기록에서 벌꿀채취의 역사는 자그만치 BC1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하고 있다. 네팔에서는 벌꿀 채취가 수천년동안 이어지고 있으며 네팔문화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네팔의 일부 마을사람들은 벌꿀을 체취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일명 벌꿀 사냥꾼(Honey Hunter)이라 불리우고있다. 네팔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꿀벌인 Apis laboriosa 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꿀벌들은 벌통을 이 나라의 산기슭의 절벽위에 지으며, 절벽에 매달려 벌꿀을 채취하고 있는 사냥꾼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벌통의 위치에 따라, 벌꿀사냥꾼들은 벌통 아래에서 연기를 피워 꿀벌을 쫓은 후 벌..

한민족 고려인 학생들 모국방문

할아버지 나라로 돌아온 고려인 학생들의 특별한 여행 중앙아시아 고려인 후손들 한국 돌아와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서 한국어 배우며 가수, 통역사 등 코리안 드림 키워 “세 가지 소원은 여행, 한국인 친구, 교복 입기... 이들은 우리의 자부심” 지난달 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이끈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은 조국 해방을 불과 2년 앞두고 1943년 이역만리 타국 카자흐스탄에서 숨을 거두었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쫓아내면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강제 이주 후 그는 극장 문지기로 살았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연해주로 끌려간 우리 동포는 주로 중앙아시아 등지에 뿔뿔이 흩어졌다. 50만 명가량 거주하고 있는데, 한국으로 귀환하는 후손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