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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87-88

碧空 2022. 2. 24. 19:40

?조선왕조실록 제87화,제88화

?(효종 현종 2) 북벌의 실체(1)

전회에서 본 것처럼 효종하면 북벌, 북벌하면 효종으로 알려져 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북벌을 계획했고, 재야 산림의 거두이자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을 불러들여 이들과 합작해 북벌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중원을 정복한 청나라의 힘과 기세가 하늘을 찔러 조선이 청나라를 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말이 되지 않던 시기였다.

또한 효종은 격변의 시대에 8년간 이역 땅에서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등 온갖 경험을 했고, 귀국해서는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의 죽음 등 정치의 비정함까지 두루 지켜 본데다, 세자에 책봉된 이후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을 우려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며 살아온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이미 떠 있는 해라 할 수 있는 청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정말로 추진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

(미치지 않고서야...)

더욱이 북벌의 파트너라는 송시열은 효종의 거듭된 출사요구를 거절하다가 말년에야 올라왔고, 재직기간도 겨우 10개월에 불과하였다.

실록을 보면, 송시열이 그 기간 동안 효종에 대해 수신제가를 강조하는 진언을 한 것이 다소 나타나고 있을 뿐, 북벌에 관한 어떤 계책이나 사대부 사회를 향한 희생 요구 등 북벌과 관련한 어떤 발언도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군역의 폐해가 극에 달해 백성의 원망이 컸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북벌을 위한 군사력 강화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러한 군역의 폐해에 대해,

유계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하였다.

?️군역의 폐해를 바로 잡아 백성의 마음을 단단히 하여야 국가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으므로, 이제라도 성지를 내리시어 위로는 벼슬아치로부터 진사, 유학, 서얼로서 허통된 자까지 60세 이하 아내가 있는 자들은 모두 군역의 의무를 져 모두 베 한 필씩 바치게 하소서.

이러한 상소가 논의에 부쳐졌으나 송시열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결국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사대부들의 힘이온데, 하루아침에 서민들과 똑같이 군포를 징수한다면 원망이 크지 않겠나이까”라는 신하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유계의 상소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위와 같은 점을 보면, 송시열은 효종과 더불어 북벌을 추진하기는

커녕 북벌과 전혀 무관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효종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도대체 왜 북벌하면 효종과 송시열이고, 효종과 송시열 하면 북벌이라는 등식이 마련될 것일까요?

?다음 제88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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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88화

?(효종 현종 3) 북벌의 실체(2)

:북벌하면 효종과 송시열이고,

효종과 송시열 하면 북벌이라는 등식이 마련된 결정적 근거는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 내용입니다.

송시열이 쓴 ‘악대설화’라는 책에는,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하며 다음과 같이 북벌의 의지와 전략을 깊이있게 상의했다는 말이 나온다.

- 오랑캐(청)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오랑캐를 물리칠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므로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나 송시열이 위와 같은 독대 내용을 공개한 때는 효종 사후 16년이 흐른 숙종 1년 때이고, 송시열은 이즈음 예송논쟁을 잘 못 이끈 죄로 유배되어, 죽은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야 할 절박한 처지였다.

때문에 위와 같은 내용의 독대가 정녕 있었는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고, 설령 위 내용이 독대 후 바로 기록해 둔 진정한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송시열이 북벌에 대한 의견을 밝힌 것이 전혀 없는 점과 전회에서 본 사정을 종합해 보면, 송시열을 북벌의 기수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북벌은 송시열과는 관계가 없고, 오로지 효종의 단독 기치가 되고 맙니다.

효종이 북벌을 꾀한다는 건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야기였고, 이로 인해 효종의 북벌 의지를 들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나, 정작 효종실록에는 북벌과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나 어떤 명령도 보이지 않습니다.(청에서 알면 골치 아프니까?)

그러면, 효종의 북벌 추진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효종 북벌론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 사대부의 나라라는 것과 효종이 가졌던 정통성에 관한 콤플렉스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기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지 못한 군왕의 권력은 사상누각이라 할만 했다

그런데 사대부가 목숨과도 같이 숭배하는 주자의 나라 명을 오랑캐인 청나라가 침범했고, 그 오랑캐에 인조는 무릎을 꿇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계통을 중시하는 주자의 나라에서 장자도 아닌 몸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으로서는 사대부의 지지를 얻을 묘책을 강구할 필요성이 더더욱 컸다.

이에 효종이 사대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주자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멀리하는 것, 즉 북벌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였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본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효종이 북벌을 꾀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나, 북벌은 효종이 현실적으로 달성하고자 한 목표라기 보다는, 북벌을 강조함

으로써 사림의 지지를 얻겠다는 정치적 계산과 더불어, 쉽게 침략당하지 않는, 즉 문약에 빠지지 않은 단단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합쳐진 다목적용 슬로건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음 제89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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