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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89-90

碧空 2022. 2. 24. 19:41

?조선왕조실록 제89화,제90화

?(효종 현종 4) 예송논쟁


북벌을 기치로 한 나름대로의 개혁군주 효종은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41세)

효종은 귀 밑에 종기가 심각해 침의 신가귀로부터 침을 맞고 고름을 조금 짜낸 후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곧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한마디 유언을 남길 겨를도 없는 순식간의 일이었고(타살설이 있으나 근거나 배경이 취약합니다),

침을 놓은 신가귀는 교살형을 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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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죽은 후 선양에서 태어난 아들이 18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으니, 이가 조선 제18대 왕인 현종입니다.

현종 시대를 특징지을 수 있는 키워드 둘은 예송논쟁과 전례가 없을 정도의 흉년입니다.

예송논쟁은 왕이 죽었을 때 예법상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남인과 서인 간의 격렬한 논쟁을 말합니다.

이러한 논쟁은 수년간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숱한 사람들이 유배되고 더러는 죽곤 하였습니다.

효종이 죽은 후 그 상례(喪禮)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에 관해 남인과 서인 간에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서인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남인은 3년 동안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송시열 등 서인의 주장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로서 장자(長子)가 아니므로 1년간 모친이 상복을 입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허목, 윤휴 등 남인의 주장은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기는 하나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와 다름이 없으므로 모친이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종시대의 이러한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자의대비는 1년간 상복을 입었습니다.

2차 예송논쟁은 현종 말년에 효종의 부인이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을 몇 년으로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입니다.

이번에는 남인이 1년설을 주장했고, 서인은 대공설(大功, 8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조선을 좌우하는 사대부들이 편을 나누어 몇 해에 걸쳐 논리와 꼬투리 잡기를 총동원해 물고 물리는 싸움을 이어간 것입니다.

?다음 제90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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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90화

?(효종 현종 5) 환국의 시대 돌입

전회에서 본 예송논쟁은 단순히 복상 문제를 둘러싼 당파의 대립이 아니라, 왕권을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서 장자의 예를 따를 수 없다는 서인의 견해는 왕권도 일반사대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신권(臣權)의 강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고,

반면 비록 효종이 둘째 아들이지만 왕은 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남인의 견해는 왕권을 일반사대부의 예와 달리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통해 신권의 약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기준으로는 상복을 몇 년 입는 것을 가지고 온 나라가 몇 해 동안 죽고 살기로 논쟁을 벌이고, 이 문제로 귀양에 사람이 죽기까지 한다는 것이 이해될 리가 없다.
(부국강병을 위해 이리 오래 논쟁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이 그 시대의 본질이고 또 한계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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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백성은 방납과 가혹한 군역 등으로 큰 고통을 받았는데, 현종 말년에는 유례를 찾기 힘든 혹독한 기근이 연속해서 찾아왔다.

조선 8도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각종 전염병이 들끓었으며 곳곳에 파묻지 못한 주검이 언덕을 이루었고, 비가 오면 냇물에 시체가 떠내려갔으며, 거리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넘쳐났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때의 실록에 각 도의 감사들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의 수를 월별로 보고 한 것이 나오는데, 전국의 아사자와 병사자의 합계가 1만 명을 웃도는 달이 많았다.

(축소 보고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1674년 8월 18일, 15년 재위 기간 동안 별다른 치적도 없이, 또한 죽음에 이른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남인과 서인의 예송논쟁과 당파싸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기근 외에는 특별한 것이 전혀 없는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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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죽은 후 그의 외아들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이다.

조선 후기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당쟁(黨爭)이다.
그것은 국정 운영은 물론 사상적 지향과 교유·혼맥 같은 인간관계에 이르는 여러 현상의 향배를 결정한 핵심 요소였다.

숙종은 이러한 당쟁의 중심에 서 한평생을 보냈는데, 이러한 숙종의 치세를 요약하는 정치사적 단어는 “환국(換局)”(정치적 국면의 전환)이다.

환국은 당파의 교체와 정책의 변화, 인명(人命)의 처분 등을 수반했습니다. 장희빈과 관련된 익숙한 주제는 환국의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 사건이다.


?다음 제91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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