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제83화,제84화
?(인조 5) 병자호란(3)
나라를 완전히 멸해버리겠다는 최후통첩에, 조선 조정은 1월 27일 청 태종에게 마지막 국서를 보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자께서는 뜻을 분명히 밝히시어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선의 국서를 받은 청 태종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생각하라. 그 은혜를 생각해 자자손손 신의를 어기지 않는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청과 조선은 군신의 예로 대하고 조선은 명과 단교한다.
?️장자 등을 인질로 삼는다.
(등등등등등...)
삼전도에 항복식을 거행할 단을 쌓은 청은 몸을 결박하고 관을 끌고 나오는 만주식 예를 면제해주겠다는 큰 인심(!)을 썼고, 다만 죄인인 국왕이 정문인 남문으로 나올 수 없다는 등의 몇 가지 항복식과 관계된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다.
1637년 1월 30일, 마침내 인조는 통곡하는 백성들을 뒤로 한 채 정문이 아닌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나서 송파구 삼전동에 위치한 삼전도에 이르렀습니다.
인조는 “천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치며, 청나라식 항복의 예인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소리가 나도록 부딪혀 조아리는 의식)의 예를 올리며, 항복의 예를 갖추었다.
항복식을 마친 인조는 용골대의 호위를 받으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도성 거리엔 청나라 그리고 함께 온 몽고 병사들이 넘쳤고, 가옥은 불타고 있었으며,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청 태종이 돌아가자 곧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 둘째 봉림대군
등도 통곡 속에 인질로 청나라로 떠났다.
또한 삼전도에 청 태종의 공덕을 찬양하고 항복을 기념하는 거대한 비가 세워졌고, 척화신으로 끌려간 윤집, 오달제, 홍익한(3학사)는 목이 잘리어 나갔다.
또, 청군이 포로로 끌고 간 조선인이 수만에 이르렀다.
(수만에서 수십만이라는 기록까지 있음)
그런데 이들이 목숨을 걸고 도망쳐 오더라도 조선은 이들을 잡아 다시 보내야만 했고, 따라서 이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속환, 즉 돈을 주고 사오는 길밖에 없었다.
붙잡혀 간 사람을 데려오는 속환 금액은 갈수록 천정부지로 뛰어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시도를 하지 못했고, 더 한 문제는 끌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부녀자들의 문제였다.
자기 부인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조선 사대부들은 돌아온 부인의 몸이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나라에 이혼을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인조는 사대부들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이런 저런 다른 이유를 달아 어렵게 돌아온 부녀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조정에서는 이 여인들로 하여금 냇물(홍제천)에 몸을 씻게 하고 그들의 정절을 회복시켜 주는 의식을 거행하기까지 하였다.
이 시대 여인들의 수난사는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지경이라 하겠다.
?다음 제84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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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84화
?(인조 6) 비운의 소현세자(1)
조선왕조에서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인 소현세자!
사도세자와 함께 왕세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34세의 나이에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소현세자와 관련한 가장 큰 의혹은 바로 그의 죽음에 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아직도 현재진행입니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1월 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병자호란 후 1637년 2월 8일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인질로 잡혀온 항복한 나라의 세자, 어찌 보면 참 우스운 처지입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고요한 가운데 언제나 당당했으며, 항상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기를 쉬지 않았고, 조선 백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감추지 않았다.
한 번은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소현세자에게 조선 외교 문제를 따지고 들자, 소현세자는 다음과 같이 답하기도 하였다.
- 내 비록 이역 땅에 와있지만 일국의 세자요.
장군이 어찌 이토록 감히 협박하는 것이요.
죽고 사는 일이야 하늘에 달려 있는 법 내 두렵지 않으니 예를 갖추시오.
심양의 왕들과 장수들은 점차 소현세자의 품격에 반해 시간이 흐를수록 세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특히 용골대는 소현세자의 인품과 자질에 진심으로 반해 소현세자를 왕 모시듯 하였다.
소현세자는 독일 출신의 신부인 아담 샬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는 벽안의 외국인이 흥미롭기도 하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천외천, 즉 하늘 밖의 하늘이라 할 만한 서양의 사상과 문물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담 샬도 소현세자와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겨 세자가 희망하는 대로 서양의 천문학 등을 알려주고 각종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를 선물로 주었으며, 소현세자는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중원을 차지한 청의 힘을 지켜 본 20대 후반의 소현세자는 청국이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인 선진 문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조선도 서양과 청국의 새로운 문물을 배워야 힘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국에서 국제 외교에 능숙했고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글로벌 패러다임으로 전환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은 소현세자의 이러한 성장과 태도에 대해 의심과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어느덧 인조에게 소현세자 내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소현세자를 반대하는 세력은 소현세자가 귀국하기도 전에 세자가 왕이 되고자 청나라를 부추겨 부친인 인조를 심양에 오게 만드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내었고, 인조는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할까 봐 불안해했다.
선조가 이순신과 광해에게 느꼈던 것과 똑 같은 열등감과 두려움을 인조가 자기 아들인 세자에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아들에게도 이런맘을 갖을수 밖에 없으니 말이
다
?다음 제85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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