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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85-86

碧空 2022. 2. 24. 19:39

?조선왕조실록 제85화,제86화

?(인조 7) 비운의 소현세자(2)

이즈음 심양에서는 청태종이 병으로 죽고, 그의 동생 도르곤이 청 태종의 여섯 살 난 아들을 황제로 세운 후 전군을 총 동원해 명나라 정벌에 나섰다.

한편, 이때 명나라에서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니 이자성이 급격히 세력을 키워 북경을 접수했다(명나라 승정제의 자살과 함께 명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음).

그러나 청나라의 도르곤은 압도적 전력으로 어렵지 않게 북경을 함락하고 명실공히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북경을 점령한 청나라는 변발을 강요하는 등 한족의 반감을 사기도 했으나, 유연하고 절도 있는 조치로 인심을 얻고, 드디어 북경으로 천도를 하게 되었다.

소현세자와 동갑인 도르곤은 소현세자에게 “이제 중원이 하나로 명확하게 통일되었으니 양국이 서로 못믿을 것이 없소.

세자는 그만 본국으로 돌아가시오”라고 하며 세자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 일행은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은 벽제에서 대궐 앞까지 거리를 메우고 이들을 반겼다.

그러나 부왕 인조의 태도는 쌀쌀하기 그지 없었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데다 거듭된 전란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한 인조는 왕권 유지에 항상 불안감이 많았고, 세자가 청국 세력과 백성의 지지를 업고 자기 대신 왕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의심에 쌓여 있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2개월 남짓 만에 오한이 나 병을 치료 받다가 4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세자의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다.

말라리아는 증세가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으나,

열대의 말라리아와 달리 온대지역의 말라리아로 어린이나 노약자도 아닌 건장한 젊은이가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믄 것이었다.

소현세자는 병명이 학질로 진단된 후 침을 맞았으나,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 갑자기 사망했다.

급작스러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돌연사에 가까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의 태도는 더 의아했다.

대신들은 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원 이형익을 국문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인조는 그런 일은 다반사이므로 굳이 처벌할 필요 없다고 했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마저 거의 박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했으며,

그 예법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새로이 세자를 정함에 있어서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이 있음에도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서둘러 세자에 삼았다.

위와 같은 제반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대단히 신빙성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자식까지 죽이면서 권력을 유지해야

했던 임금,  조선왕 중 최악의 왕이 아닐까요?)

?다음 제86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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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86화

?(효종 현종1)효종 즉위

소현세자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의 궁녀들 몇을 지목하여 죽였고, 강빈의 오라비들을 유배 보냈다가 불러 곤장을 쳐 죽였으며, 급기야 강빈을 폐서인하여 사사시켰다.

또한,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을 제주로 유배보냈고, 첫째와 둘째 아들은 현지에서 죽고 말았다.

참으로 잔혹한 아비이자 시아비이자 할애비입니다.

소현세자!

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겠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서양의 과학 문물을 보급하고 장려하여 조선을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꾸었다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아주 어쩌면 일본보다 200년 앞서 개화를 하고 중흥을 해 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조는 왕위에 오른 지 27년만인 1649년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무너진 지 30여년 만에, 이번에는 여진족 수장에게 삼배구고두의 모욕을 당했고, 백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주었으며, 장자를 죽였다는 의혹을 받는 임금!

참으로 오욕으로 얼룩진 재위기간이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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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조선 제17대 왕 효종(1649~1659)입니다.

효종은 18세이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우인 인평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강화도 함락으로 청의 포로가 되었고, 부친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형인 소현세자, 척화신 등과 함께 볼모가 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갔으며, 볼모지로 가는 도중에 등에 업혀가던 세 살 난 딸이 병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세자의 자리에 오른 효종은 청나라에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이에 따라 효종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북벌’입니다.

지금까지의 정설은 “대군시절부터 반청의식이 투철했던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청을 배척하는 세력인 재야 산림(삼전도 굴욕 이후 벼슬을 거부하고 재야에 묻힌 사림세력)을 대거 기용하고,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讎雪恥)를

목표로 북벌을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하

다.

?다음 제87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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