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제79화,80화
?(인조 1) 인조 등극과
치욕의 예후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태종이나 세조와 같은 반정의 완전 주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중종과 같이 반정 세력에 의해 왕위에 앉혀진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할 여건은 되었다 할 수 있다.
인조는 반정이 서인 정권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을 잘 알고있었고, 붕당의 폐해 역시 잘 알았기에,
“당이란 말은 주자의 말이라 해도 듣고 싶지 않소”
라고 하며 붕당의 활개를 허용하지 않았고, 특정인에게 권력이 쏠리는 것도 늘 경계했다.
또한 반정의 첫 번째 명분인 사대의 예를 지키기 위해 친명배금정책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강하게 휘몰아치는 대륙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약소국의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약한 자의 눈치 보기에 불과하였으니, 이는 만고의 진리라 하겠다.
왜란이 끝난 지 반 세기도 지나지 않은 1620년경의 약소국 조선은 또 다시 고통과 치욕의 길로 서서히 들어서고 있었다.
인조 반정이 벌어지기 2년 전인 1621년 요동 땅이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에 넘어가면서, 명나라 요양성 장수 모문룡이 조선 땅으로 도망을 쳐왔다.
모문룡은 의주 일대에서 후금 군에 의해 변발을 하게 된 명나라 한족들을 모아 후금의 발꿈치를 문 정도의 작은 전과를 올린 후 이를 과장해 본국에 보고하니, 명나라 조정은 모문룡에게 승진과 두둑한 상을 내렸다.
모문룡은 후금이 보복에 나서면 도망을 쳤고, 후금이 물러가면 다시 또 싸움을 걸어가니, 당시 광해는 조선 땅에서 후금과 감정적으로 싸우는 모문룡으로 인해 조선이 피해를 입게 될까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이에 광해는 모문룡을 명나라로 돌려보내고자 했으나 실패하자, 모문룡을 가도(국경 근처의 조선 섬)에 들어가도록 했다.
요동의 명나라 한족들을 데리고 가도로 들어간 모문룡은 이내 가도의 기막힌 가치를 알아차리고, 진을 설치해 장기 주둔을 할 태세를 취하였다.
작은 섬 가도에는 수십만의 명나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흉년이 닥쳐 식량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상륙해 약탈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조선의 관아를 쳐 창고의 곡식을 털어가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사기가 오른 모문룡이 툭하면 요동을 점령한 후금을 공격할 액션을 취하여 후금을 자극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아무리 친명배금 정책을 선택한 조선이라 해도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다음 제80화 계속~
-------------------------------------
?조선왕조실록 제80화
?(인조 2) 정묘호란
이즈음 후금에선 중대한 정세 변화가 있었으니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가 1626년 숨을 거두고 평소 조선정벌을 주장하던 8남 홍타이지가 새로운 칸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칸에 오르자마자 모문룡의 일 등을 명분삼아 사촌인 아민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1627년 1월(인조 5년) 3만의 군사로 조선을 정벌토록 하였다.
후금의 막강한 전력 앞에 조선의 방어선이 속속 무너지자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란이 끝난 지 30여년 만에 이번엔 여진족에 의해 또 다시 조정이 피난을 가는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후금 총사령관 아민은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의 완전 항복을 받아내기에는 부족하다고 보고, 한양으로 내려오면서 조선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후금은 조선에 명과 단교하고 양국이 형제(물론 후금이 형)의 나라로 지내는데 동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후금과의 화친은 가능하나 명과의 단교는 어렵다는 답신을 보냈고, 후금은 명과의 단교는 하지 않지 않고 양국이 화친하되,
그 맹세로 백마와 흑우를 잡고 피와 골을 함께 마시는 만주식 의식을 갖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왕이 오랑캐인 여진족과 위와 같은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지나치게 야만스러워 선비의 나라인 조선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우여곡절을 거친 후 인조가 모후의 상중에 있음을 핑계로 선조는 향불을 태우는 의맹식을 거행하고, 백마와 흑우를 잡고 피와 골을 마시는 의식은 신하가 대신하는 방식으로 겨우 겨우 화친을 하게 되었다.
친명배금이니 뭐니 해 봤자 결국 힘 앞에는 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화친이 되기까지 그리고 화친이 된 후, 후금 군사들에 의해 조선 백성이 얼마나 많이 죽었고, 얼마나 수난을 당했는지는 왜란 편에서 충분히 본 것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후금은 완전 철수를 하면서 칸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서를 보내왔다.
?️조선 국왕이 하늘의 뜻을 알아 허물을 즉시 뉘우치고 화친을 이루게 했으니 두 나라는 영원히 형제의 우애로 지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 온 고려인이 조선으로 도망치면 즉시 붙잡아 보내야 할 것이다.
조선은 조선인이 도망쳐 올 경우 가급적 모른 척 했지만, 항의가 거셀 경우 부득이 몇 명이라도 잡아 다시 후금에 넘길 수밖에 없었고
(형제나라가 아니라 웬수죠 웬수!),
조선 사신이 심양에 가면 수많은 조선인이 몰려와 통곡하며 데려가 주기를 호소하곤 했다.
?다음 제81화 계속~
'역사·정치·경제·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실록 83-84 (0) | 2022.02.24 |
---|---|
조선왕조실록 81-82 (0) | 2022.02.24 |
조선왕조실록 77-78 (0) | 2022.02.24 |
조선왕조실록75-76 (0) | 2022.02.24 |
조선왕조실록73-74 (0) | 2022.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