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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75-76

碧空 2022. 2. 24. 19:21

?조선왕조실록 제75화,제76화

?(광해 3) 임금 광해는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선조 40년 10월, 선조는 갑자기 쓰러져 자리에 누웠다.

죽음을 예감한 선조는 오만 가지를 생각했으나 차마 두 살에 불과한 영창대군으로 어찌해 볼 수는 없었고, 결국 비망기를 내려 장성한 광해에게 전위 또는 섭정을 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갑자기 선조가 몸져누워 위와 같은 뜻을 밝히자 급해진 것은 영창대군에 올인한 소북파의 유영경과 인목왕후였다.

인목왕후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선조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으나 유영경은 여러 이유를 들어 선조의 뜻에 반대를 하였다.

반면에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는 유영경이 세자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불충을 저질렀다며 유영경을 강하게 공격하였다.

대북과 소북이 건곤일척의 목숨을 건 대립을 하고 있던 이때에 칼자루를 줜 이는 당연히 선조 임금이다!

선조는 다소간 기력을 회복하자 소북 유영경의 손을 들어 주고 정인홍을 귀양 보내버렸다.

이로써 광해를 지지하는 대북파의 패배가 분명해 보였으나, 장강의 앞물이 뒷물의 흐름을 거부할 수는 없는 법!

선조는 1608년 2월 향년 57세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재위 장장 41년, 초유의 임진왜란을 겪었고 4색당파의 분화와 당쟁을 지켜 본 선조, 권력유지에는 큰 수완을 보였으나 특별히 내세울 만한 업적 하나 없이 그렇게 살다 갔다.

숱한 장애를 딛고 33세의 나이에 마침내 보위에 오른 광해, 일찍이 왕재를 인정받았으나 16년의 세자 생활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하루 하루였다.

창업자인 태조에 견줄 만큼 나라 곳곳을 누볐고 문종에 견줄 만큼 실무 경험이 풍부한 새 임금 광해를 백성과 신료들은 진심으로 반겼다.

그러나 신료들 중 일부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늘 남아 있었다.

그동안 광해를 너무 핍박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겠지요

과연 광해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풍부한 경험을 살려 모두의 소망에 부응할 것인가 아니면 쌓였던 16년의 한을 푸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다음 제76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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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76화



?(광해 4) 폭군 광해!

광해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북은 광해를 대놓고 반대한 소북의 유영경을 탄핵했고, 유영경은 곧 최후를 맞이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광해의 형인 임해군의 역모 고변이 있었는데, 광해는 겉으로는 "내 형이 그럴 리가 없다"라고 하면서도 거론된 이들과 임해군을 모두 죽이니, 조정 신료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광해는 전혀 개연성이 없는 역모 고변임을 잘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사건을 부풀려 수많은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옥사를 수차례 벌렸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였다.

(영화 “광해”에서 광해의 충신으로 나오는 허균 역시 석연치 않은 역모 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광해가 벌인 여러 옥사 중 대표적인 것은 “계축옥사”이다.

이에 대해 잠시만 살펴보겠습니다.

광해는 즉위 후 유영경과 임해군을 죽였고, “봉산옥사”로 수백 명을 죽이는 과정을 통해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으면서도, 근본적인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점차 성장하고 있는 영창대군의 존재 자체가 광해를 불안하게 한 것이지요.

이와 같은 정국이 이어지던 1613년(광해군 5)경, 문경새재(조령)에서 도적이 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그 주모자가 서인의 거물 박순의 서자 박응서, 서양갑 등 유력 집안의 서자들(7명)인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진술이 나왔다.

즉, 박응서와 서양갑의 공초에서 “거사 자금을 확보해 김제남(영창대군의 외조부)을 중심으로 왕(광해군)과 세자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광해는 직접 국문에 나서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사건을 일파만파 부풀려 거대한 역모 사건으로 만들어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수백의 관련자를 모조리 처형하였다.

또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인목대비의 아들 7세의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해 강화도로 유배했다가, 그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밀실에 가두어 증살(蒸殺:아궁이에 불을 지펴 쪄 죽이는 것)로 죽이고 말았다.

졸지에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에게 광해는 아들이 아니라 원수였습니다.

인목대비는 왕실의 법통 상 광해의 어머니였지만, 이제 두 사람은 함께 있기에는 너무나 먼 관계가 되고 말았다.

결국 광해는 ‘어머니’ 인목대비를 1615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겨가게 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으며, 3년 후 ‘서궁(西宮)’으로 명칭을 격하시켰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인목대비를 폐위한 것과 다름이 없는 조치였다.

일찍이 대내외적으로 왕재를 인정받은 광해이지만, 16년에 걸친 혹독한 경험과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묘호도 받지 못한 폭군 중의 폭군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것 역시 무능한 선조의 업보라 할 것이고, 아울러 크게 보면 공화정이 아닌 왕정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다음 제77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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