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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77-78

碧空 2022. 2. 24. 19:31

?조선왕조실록 제77화,78화

?(광해 5) 광해의 외교 마인드


중원의 지배자 명나라가 만력황제의 방탕, 조선 파병으로 인한 국력손실 등으로 쇠락해가고 있던 즈음, 명의 지배를 받고 있던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는 8기제 등 강력한 전술 전략을 바탕으로 인근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대금(후금)을 건국한 후 1618년에는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구원 파병을 요청해 왔는데,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은 “천자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할 땐 죽어도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광해는 누르하치의 기세가 오히려 명나라를 압도한다고 보고 명나라의 요구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거의 모든 신료들은 “중국 조정에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전하께 죄를 얻는 게 낫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파병에 응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결국 광해는 명나라의 요구대로 1만 3천 명의 군사를 모아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도록 하였다.

조명 연합군은 심하에서 누루하치의 대군과 맞섰으나 대패하였고, 강홍립의 군대 역시 후금 군대에 포위되어 괴멸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후금은 명나라 정벌을 앞두고 조선과 끝까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보고 강홍립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고, 결국 강홍립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투항을 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에서는 오랑캐에 투항한 강홍립의 처자를 구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으나, 광해는 이를 반대하고, 오히려 더 나아가 강홍립을 통해 후금에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기까지 하였다.

광해의 의사를 확인한 누루하치는 조선에 화친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내기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도 조정의 신하들은 하나 같이 다음과 같은 논리로 화친을 거부하여야 한다며 광해를 강하게 압박하였다.



범같은 기세의 오랑캐 기병이 쳐들어온다면 막을 방도는 없으나 부모와도 같은 명나라의 원수인 저들과 어찌 화친하겠나이까?

이것이 차라리 나라가 무너질지언정 차마 대의를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이옵니다.

(나라가 망해도 화친은 안 된다?)

광해가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비변사의 신하들은 태업을 하였고, 영의정 박승종은 아예 칭병을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는 등 광해의 외교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광해가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역도로 몰아 죽이는 등 공포정치를 펼쳤고, 신하들은 언제 옥사에 내몰릴지 전전긍긍하며 공포에 떨었지만, 그러한 죽음의 공포마저도 “사대주의”라는 완고한 도그마만은 넘어서지 못했으니, 이들의 콘크리트보다 단단한 대뇌구조는 참으로 연구대상이라

할 것입니다.



?다음 제78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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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78화



?(광해 6) 광해의 몰락,

                             인조반정!

광해가 반정에 의해 끌려내려 간 배경과 원인은 무엇일까요?

실록에 나타난 반정 당사자들의 명분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둘째, 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무리한 궁궐 증축을 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셋째,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한 폐륜을 저질렀다.

그러나 중립외교에 관한 부분은 논란이 되기는 했으나 결국 크게 벌어진 결과물은 없다 할 것이고, 무리한 궁궐 증축이 있기는 했으나 이러한 정도의 공사는 다른 왕도 많이 추진했던 것이었으며, 또한 패륜으로 치면 태종 이방원이나 세조가 더하면 더 했지 못할 것이 없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인조반정 주도자들의 명분은 그야말로 명분에 불과한 것이고, 반정의 실제적 원인은 전형적 권력투쟁과 능양군의 원한에 기인한 권력의지가 맞물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늙어서 얻은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다.

그 중 다섯째 아들이 정원군이었는데, 셋째 아들인 능창대군이 17세의 나이에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몸과 마음이 상하여 시름시름 앓다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광해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그 집을 헐고 경덕궁을 짓기까지 하자, 정원군의 큰아들 능양군은 광해를 원수로 알고 광해를 몰아낼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능양군은 이귀, 신경진, 최명길, 김자점 등과 손을 잡고 3년여를 준비하였으며, 궐 안을 관장하는 훈련대장 이홍립까지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들의 반정 준비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반정에 관한 정보가 새어나가게 되었으나, 이즈음의 광해는 그동안의 지나친 역모 고변과 옥사로 인해 역모에 대한 면역성이 강해져, 정세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소실된 상태였다.

(반정 당일에도 거사 상소가 있었으나 광해는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드디어 1623년 3월 12일(광해 15년) 능양군이 이끄는 반란군은 큰 어려움 없이 대궐을 접수하였고, 그 날로 광해는 폐위되었으며, 능양군이 인목대비의 허락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인조이다.

인조반정 후 광해의 사랑을 받던 김개시는 즉시 목이 잘려 나갔고, 광해의 아들과 며느리는 목메어 세상을 하직했으나, 정작 광해는

무려 19년을 유배지에서 더 살다가 67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광해, 15년 세자 생활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훌륭한 임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결국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하고 폭군에 폐위에까지 이르렀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다음 제79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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