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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73-74

碧空 2022. 2. 24. 19:19

?조선왕조실록 제73화,제74화

?(광해) 광해의 恨(1) 


광해군은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첫째는 임해군)

공빈은 아들 둘이 서너 살일 때 세상을 떴고, 왕실에는 달리 적자가 없었다. 

광해는 비록 서자이나 형인 임해군과 달리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도량이 넓어 일찍이 왕재로 인정을 받았다. 

왜란이 발발하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는 부랴부랴 광해를 세자로 삼고, 곧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나는 의주로 가 명에 원병을 청할 것이니, 세자는 남아 군무를 담당하라."

광해는 분조를 이끌고 사실상 적지나 다름없는 요소요소를 풍찬노숙하며 내달았습니다. 

세자인 광해가 솔선하여 항전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무하자 흩어졌던 민심이 다시 모이고 도망쳤던 사대부와 조정 중신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18세에 불과한 광해가 평양성 탈환 시까지 사실상의 조정인 분조를 이끌며 훌륭히 임금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명나라도 광해의 이러한 활약을 인정했고, 급기야 명나라 장수 송경락은 광해에 대하여

"영웅의 풍채에 위인의 기상이 드러났다"

는 내용의 자문을 조선에 보내기에 이르렀다. 

선조가 의주에서 요동만 바라보고 있을 즈음, 광해의 활약 소식을 들은 젊은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군국의 기무를 모두 세자 저하께 맡겨 처리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라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금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선조가 생각해 낸 꼼수가 바로 선위 파동입니다. 

선조가 왜란 동안 선위 파동을 일으킨 것은 실록에 나오는 공식적인 것만 해도 19회입니다. 

선위 파동이 있을 때마다 신하들은 죽기로 이를 말려야했고, 세자인 광해는 며칠씩 끼니까지 굶어가며 차가운 뜰 앞에 꿇어 앉아 명을 거두어 달라는 읍소를 하여야 했으니, 전쟁 통에 국력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조는 이런 방법을 통해 흔들리는 권력을 움켜잡았지만, 떨어진 위신까지 회복할 수는 없었다. 

선조는 도망 다니며 제 한 몸 건사하기 바빴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볼 때마다 어린 나이에 위풍당당하게 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한 광해에게, 이순신에게 느껴야 했던 열등감을 또 다시 느껴야 했다. 

선조의 이러한 질투와 열등감은 미움으로 변해갔고, 이는 결국 광해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다음 제74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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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74화

?(광해 2) 광해의 恨(2) 


왜란 통에 어쩔수 없이 광해를 세자로 책봉한 선조는 명나라에 세자책봉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광해를 그렇게 높이 평가한 명나라 조정이 광해의 세자책봉을 반대하였다. 

이는 명나라 황제의 태자 책봉 문제와 맞물려 명나라 조정이

"장자로서 세자를 삼아야 한다"

는 입장을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명나라의 상황과 입장을 파악한 후 세자 책봉 승인을 위한 노력을 대폭 줄이는 한편, 나아가 광해를 사실상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 기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광해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운 일이 또 하나 생겼으니, 이는 선조의 새 장가였다. 

선조는 전쟁 이후 의인왕후가 죽자 새 중전을 맞이했는데 이 때 선조의 나이 51세, 새 중전 인목왕후의 나이 17세, 세자인 광해의 나이가 26세였다. 

광해의 고민은 깊어갔습니다. 

"명나라는 세자 인정을 거부하고, 아버님은 날 미워하신다.
이제 또 새어머니께서 대군이라도 낳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광해의 우려대로 인목왕후는 곧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즈음 정권을 잡은 북인은 정인홍이 이끄는 대북, 유영경이 이끄는 소북으로 분열되었다. 

이 중 소북의 리더 영의정 유영경의 장기는 왕의 의중을 잘 읽고 그 뜻에 부합하는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이었다. 

유영경은 이와 같이 생각했다. 

"임금의 뜻은 광해가 아니라 영창대군에게 있다.
명분만 있으면 바꿀 것이다.
명분은 <적자승계>이다.
10년만 임금이 더 산다면 틀림없이 세자는 바뀐다.
그래서 영창대군을 세자만들기에에 올인하였다."

선조는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유영경을 더욱 총애했고, 덕분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의 무리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후궁들과 심지어 상궁 나인들마저 광해를 임시직 계약직 비정규직 세자로 여기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인목왕후라도 중심을 잡고 후궁 등을 단속하여야 할 것인데, 그러기는커녕 영창대군에게 세자 의상과 비슷한 옷을 입히기까지 하는 등 광해의 마음을 몹시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두려움과 외로움과 울분이 뒤섞인 사면초가의 상태를 광해는 전쟁이 끝난 후 무려 10년이나 견디어 냈으니, 그 속에 품은 한이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다음 제75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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