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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71-72

碧空 2022. 2. 24. 19:15

?조선왕조실록 제71화,제72화

?(선조19)명량해전(1)  

백의종군의 길을 가던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부고가 전해졌다.

노모를 걱정하는 마음을 난중일기에 가득 채울 만큼 효자인 이순신. 
그는 1597년 4월 19일자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일찍 집을 나서야겠기에 어머니의 빈소 앞에서 울며 하직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어서 죽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곧 그동안 애써 키운 분신과도 같은 자신의 수군이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며칠 뒤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3도수군 통제사로 복귀하라는 교서를 받고 곧바로 남해안으로 떠났다.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임명하며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합니다. 

"출병을 독촉해 이런 일을 했으니, 이는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엥? 이런 썩을~) 

이순신은 보름 동안 연안 고을들을 샅샅이 훑어 흩어진 장수와 병사들을 불러 모았고, 군량과 무기들도 마련했으며, 병사들도 백성들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장군과 함께라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칠천량 전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휘하의 함대를 이끌고 진영을 이탈함으로써 판옥선 열두 척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3도 수군통제사로 삼기는 했지만, 수군이 무너진 마당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여겨, 이순신에게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복속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대한 이순신의 답변이 유명하다. 

"임진년으로부터 5, 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바로 찌르지 못하고, 퇴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이순신은 왜적이 함대를 총동원해 남해를 접수하려 들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단 12척으로 얼마가 될 지 모를 엄청난 규모의 일본군을 격퇴할 특단의 방안을 강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순신은 벽파진에 진을 치고 왜군 함대를 불러들였다.
과거 한산도에 위풍당당하게 진영을 구축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초라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왜군은 열두 척에 불과한 조선 수군을 짓이겨 버림으로써 지난날의 수모를 한 번에 갚고자 했고, 이를 위해 300척의 배를 동원하였다. 

왜군이 어란진에 도착하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출사표를 던졌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길 것이요,
<死即必生>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生即必死>

또 한 사람이 길목을 막아 지켜도 능히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했는데,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울둘목에서 적을 기다려 모조리 수장시키고야 말겠다." 

명량해전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다음 제72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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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72화

?(선조20 )명량해전(2)  

이순신의 판옥선은 한 척이 더해져 13척, 백성들의 어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후미에 배치하였다.  

왜군 함대는 물살이 순방향인 때를 선택해 급격한 조류를 타고 울둘목을 일거에 통과해 벽파진에 진을 친 조선 수군을 박살내고자 했다.  

또한 설령 울둘목을 조선군이 막아선다 해도 빠른 조류를 타고 대규모 선단이 진격한다면 몇 척 안되는 조선 수군이 견딜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함선이 많아도 해협이 좁아 한꺼번에 나아갈 수 있는 수는 제한될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선 함대의 규모에 겁을 먹고 뒤로 빠지려는 휘하 장수들이었다.  

이순신은 초요기를 올려 장수를 부르고는 다음과 같이 독전하였다.  

"군법에 따라 죽고 싶은가, 도망간들 어디에 가서 살 수 있겠느냐, 울둘목에서는 적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으니 이곳만 죽기로 봉쇄한다면 승산이 우리에게 있다.
나와 함께 싸워 한 번이라도 패한 적이 있더냐?"

조선 함대는 역방향의 물살에도 견딜 수 있도록 배를 횡으로 세우고 특수 제작한 닻을 내려 물살을 버티어 내도록했다.  

드디어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여 척의 왜군 함대가 강한 조류의 물살을 타고 10 ~15대씩 대열을 이루어 울둘목을 최대한 빠르게 통과하기 위해 명량해협에 들어섰다.  

그런데 조선 판옥선이 역방향의 물살을 당당히 견디며 배를 고정시킨 채 우뚝 서 포격을 가하자 왜군은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해협에 줄줄이 들어선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의 좋은 표적이 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이 왜선 선두를 함포로 두들기자 후미의 왜선이 순차적으로 추돌하였고, 이로 인해 왜선의 진영은 급격히 허물어졌다.  

급한 조류를 타고 빠르게 전진하려던 계획이 오히려 급한 순조류로 인해 모두 무위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조선 수군이 울둘목을 가로막고 버티며 선두의 배를 집중 타격하는 방식으로 왜선과 대치하는 사이, 드디어 조류의 흐름이 왜군 쪽으로 바뀌었다.  

왜군은 조류의 흐름이 바뀔 때까지 이곳에 발이 묶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랑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비록 규모는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가능한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한 함포 사격에 빠른 조류와 강한 판옥선을 이용한 충돌 공격, 숨 돌릴 새 없이 몰아치는 자신감에 찬 거친 공격에 일본 수군은 견딜 재간이 없었고, 마침내 왜군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명량해전에서 왜선 130여 척 중 30여 척이 격침되었고, 60여척이 쓸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으며, 최소 1,800명의 왜군이 죽었고, 조선의 전선은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으며 1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니, 실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 명랑해전을 치른 후

“참으로 천행이었다”

고 수 차례 적고 있습니다)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로써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계속 전쟁을 수행할 동력을 잃게 된 것이다.  

?다음 제73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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