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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19-120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9,120화 ?(헌종 3)흉흉해진 민심과 흔들리는 왕실 이후에도 이양선의 출몰은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민심은 흉흉해졌습니다. 외세의 침투가 시작되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도 서서히 깨달아 갔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 합당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척사 정책을 고수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 또한 견제 세력이 없는 세도정치의 폐단이었습니다. 한편 어엿한 청년이 된 헌종은 점차 외척인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헌종은 궁에 들어온 외숙 조병구를 불러 그의 죄를 따지며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조병구에 대한 경고이자 풍양 조씨 세도에 대한 경고였..

봉이 김선달

⚘金先達 앞에 '鳳伊'가 붙은 理由 김선달은 서울 장안을 자주 드나들었다. 어느 날에 사람들로 붐비는 장터로 구경을 나섰다. 그런데 장터 한쪽에 닭시장(鷄市場)이 서 온갖 닭들이 우글댔다. 김선달이 닭장 속을 이리저리 보니까 유난히 살이 포동포동하고 털에 윤기가 흐르는 닭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김 선달은 시치미를 떼고 닭장수 에게 물었다. “주인장, 이게 무슨 날짐승이오? 거참 통통한 게 보기 좋구먼.” 주인은 눈을 크게 뜨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세상에 얼치기가 많다고 하더니만 이런 놈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구나. 닭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보니 꽤나 어리석은 놈인가 보다.' 주인은 김선달이 얼치기인 줄 알고 골려 먹을 셈으로 말하였다. “이것은 봉(鳳)이오.” 난데없이 닭을 봉황새라고 속이는 말을..

우리나라에도 이런 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분이 있습니다. ♡ 실제 감동 사연 ♡ 이 이야기는 서울 서초동 소년법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 난 혐의로 구속된 소녀..... 그 아이는 홀어머니가 방청석에서 지켜 보는 가운데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 니다. 조용한 법정 안 중년의 여성 부장판사가 입장했습니다. 전과 14범의 소녀는 무거운 보호처분을 예상한 듯 어깨를 잔뜩 움츠렸습니다. 판사는 그런 소녀를 향해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따라 힘차게 외쳐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 거리던 소녀는 나지막하게 “ 나는 이 세상에서.....” 라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큰소리로 따라하라며 이렇게..

두문동72인

두문동 72인 임신년(1392) 7월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 에게서 왕위를 물려받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고려의 신하였던 권문세가들과 고려 왕족 중에서 조선의 태조에게 항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개성에 남아따라가지 않았다. 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한 고려의 유신들이 은거하였던 마을을 그 지역 사람들은 杜門洞이라고 했는데, 두문동은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의 서쪽 골짜기에 있었다. 고려의 유신인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이곳에 들어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包圍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

♥︎매화(梅花)♡

♥︎매화(梅花)♡ * 梅一生寒不賣香 (매일생한불매향) * 매화는 일생에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매화(梅花)나무일까? 매실(梅實)나무일까? ♡꽃을 강조하면 매화 나무, 열매를 강조하면 매실나무가 된다. 아직 봄을 논하기는 이르다고는 하지만, 매화는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중 하나다. '매화가 피었는데 그 꽃 위로 눈이 내리면 설중매(雪中梅), '달 밝은 밤에 보면 월매(月梅), '옥같이 곱다해서 옥매(玉梅), '향기(香氣)를 강조하면 매향(梅香)이 된다. '이른 봄에 처음 피어나는 매화를 찾아 나서는 것을 심매(尋梅) 또는 탐매(探梅)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는 절은 순천 선암사다. 몇 년전까지는 경남 산청 단속사지에 있는 정당매가 최고령이었는데 최근에 고사하고 말..

조선왕조실록 117ㅡ118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7,118화 ?(헌종1) 외척 풍양 조씨의 보호 속에 즉위한 헌종 헌종은 1827년(순조 27) 7월 18일에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순조의 손자로,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순조의 뒤를 이어 1834년(순조 34)에 즉위했습니다. 이때 헌종의 나이 불과 8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탓에 헌종은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습니다. 이어 1837년(현종 3)에는 안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를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가 계속해서 이어질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순조는 죽기 전에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영에게 헌종의 보도를 부탁했고, 풍양 조씨가 득세하기 시..

조선왕조실록115-116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5,116화 ?(순조 2)벽파의 몰락과 안동 김씨의 집권 1803년(순조 3) 12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14세가 된 순조가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순조의 정치력은 여전히 미약했는데 이러한 가운데 정권을 잡은 것은 외척인 김조순의 집안이었습니다. 시파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가는 비변사를 장악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한편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노론 벽파는 '김달순의 옥사'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김관주를 비롯한 노론 벽파는 후원자인 정순왕후가 죽자 앞날이 걱정되었습니다. 순조가 벽파에 대한 보복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

"동무생각"에 깃든 사랑 이야기

청라언덕 위의 첫사랑 이야기♧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 자를 써서 '푸른 담쟁이 덩굴'이란 뜻으로 당시 박태준이 다니던 대구 계성학교의 아담스관과 맥퍼슨관, 그리고 언덕에 위치한 동산의료원 선교사 사택들이 푸른 담쟁이덩굴로 휘감겨 있는 모습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동무생각’(思友)의 배경이 된 대구 동산동의 ‘청라언덕’은 대구 근대문화의 중심지다.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 치료로 유명한 대구의 이 바로 동산의료원이다. 박태준은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선구자로서 1920년 동요 ‘기럭기럭 기럭이...’ 라는 ‘기러기’, 1925년 ‘24세의 나이에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의 ‘오빠생각’ , 새나라의 어린이 등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를 작곡했고, 1922년 그가 작곡한 우리나라 첫 가곡..

조선왕조실록113ㅡ114

?조선왕조실록 제113,114화 ?(정조8)정조의 죽음 정조의 나이 49세에 겪은 이런 일들은 그의 말년의 분위기를 보여 줍니다. 그는 14년 동안 온 힘을 기울여 혁신정치를 펴 보려 했지만, 보수세력이나 묵은 권신들의 견제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없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여름에 들어 지병인 종기가 도져 병석에 누웠다가 11세의 세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슬픔은 너무나 컸습니다. 영조의 마지막 왕비인 정순대비 김씨는 15세에 영조의 계비로 들어와 궁중의 어른 노릇을 했습니다. 김씨는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 10년이나 어렸습니다만 혜경궁 홍씨는 지극정성으로 정순대비를 받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순대비는 친정붙이에 휘둘려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을 거들었고 세손인..

조선왕조실록111ㅡ112

?조선왕조실록 제111화,112화 ?(정조6)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다. 정조가 능행길에 나서 한강의 배다리를 건널 때면 그 언저리에 백성들이 앞다투어 몰려나와 고개와 들판을 하얗게 메웠다. 그들은 너도나도 “우리 임금 용안 한번 보세”라고 떠들면서 서로 앞줄에 서려고 자리다툼을 할 정도였다. 정조는 때로 어가를 멈추고 이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백성들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일부 반대세력을 제외하고는 성군이 태어났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특히 많은 핍박을 받던 서민들이 왕의 덕을 칭송하며 살길을 찾아 생업에 전념하는 기풍이 일었다. 정조는 학문과 문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가 사직단에서 사직제사를 지내던 어느 날, 조용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전악(典樂, 음악 지휘 책임자)을 불러서 곡조가 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