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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27-128

碧空 2022. 3. 10. 20:14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27,128화
?(고종 4)흥선대원군과 민비의 갈등 속에 흔들리는 조선

1882년(고종 19)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민씨 정권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임오군란은 무위영 소속 옛 훈련도감 군인들이 일으킨 대규모 폭동으로, 1년이 넘게 받지 못했던 급료를 지급받는 과정
에서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
를 비롯한 민씨 척족들과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습니다.

여기에는 민씨 척족들이 권력을 독점해 자행한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과 강화도 조약 이후 드러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대한 적개심이 작용했습니다.

그 와중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민비는 몰래 궁을 빠져나가 장호원으로 피란했습니다.

그 사이 군민들의 지지를 받은 대원군이 복귀했는데, 고종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불러들인 것입니다.
대원군은 민비의 행방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서둘러 왕비가 죽었다고 발표하고 장례까지 치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민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충청도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민비는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시 정권을 되찾기 위해 몰래 청나라와 접촉해 군대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군란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군이 대원군을 납치해 가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그 사이 민비는 환궁해 다시 권력을 잡았습니다.

대원군과 민비의 갈등에 외세까지 개입된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인 흥선대원군과 민비는 왜 이리 사이가 벌어진 것일까요?

흥선대원군은 외척의 득세를 경계해 일부러 별 볼일 없는 가문의 규수인 민비를 왕비로 들였습니다만, 그러나 민비는 정치적 야심이 많은 여장부였습니다.
그는 가까운 민씨 척족들을 정계에 진출시키며 호시탐탐 정권을 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낌새를 눈치 챈 대원군은 민비가 낳은 첫째 아들이 일찍 죽자 고종의 후궁이 낳은 아들로 세자를 삼으려고 했습는데,
이 일로 대원군과 민비의 사이는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갈등은 결국 권력에 대한 야욕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민비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청나라는 점차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일본은 이에 질세라 임오군란 당시 공사관이 습격으로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는 핑계로 조선 조정에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불평등 조약인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이 점점 한심한 지경에 이르는 사이 젊은 개화파들은 세상의 변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2년 뒤인 1884년(고종 21),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무력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갑신정변(甲申政變)입니다.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일본 공사가 이들을 뒤에서 지원했습니다.

이날 밤 우정국(郵政局)에서 낙성식(落成式)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總辦) 홍영식이 주관했습니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때 민영익도 우영사(右營使)로서 연회에 참가했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갔는데, 밖에서 여러 명의 흉도(凶徒)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에 이르러 변고에 대해 급히 아뢰고 속히 이어(移御)
하시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했습니다.

상이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각전(各殿)과 각궁(各宮)도 황급히 도보로 따라갔습니다.

**김옥균 등은 상의 명으로 일본 공사에게 와서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자 밤이 깊어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했다.

?다음 제128화 계속~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28화
?(고종5)고종실록,
고종 21년 10월 17일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은 곧바로 새 내각을 세우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이 즉각 개입함에 따라 이들은 사흘 만에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삼일천하'였습니다.

정변의 주역들은 청군에 의해 피살되거나 겨우 도망쳐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렇게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민간에서는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동학은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서학(西學)이라 불리던 천주교가 민간에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토속신앙이었
습니다.

동학은 교조인 최제우가 1864년(고종 1)에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된 후에도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의해 꾸준히 교세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1892년(고종 29)부터는 교조 신원 운동의 일환으로 열린 집회를 중심으로 가난과 수탈에 지친 농민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94년(고종 31)
에는 마침내 전봉준(全琫準)을 필두로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동학혁명 혹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농민봉기는 반봉건, 반침략 투쟁의 기치 아래 맹렬한 기세로 퍼져 나갔습니다.

동학농민군이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걸고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자 고종과 민씨 정권은 청군의 개입을 요청했고, 이것이 일본의 파병을 불러왔습니다.

톈진 조약에 의해 청·일 양국 중 한 나라가 군대를 파견하면 다른 한 나라도 자동적으로 군대를 파견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의 안방까지 치고 들어와 대치하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곧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제129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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