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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13ㅡ114

碧空 2022. 2. 26. 18:57


?조선왕조실록 제113,114화
?(정조8)정조의 죽음


정조의 나이 49세에 겪은 이런 일들은 그의 말년의 분위기를 보여 줍니다.

그는 14년 동안 온 힘을 기울여 혁신정치를 펴 보려 했지만, 보수세력이나 묵은 권신들의 견제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없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여름에 들어 지병인 종기가 도져 병석에 누웠다가 11세의 세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슬픔은 너무나 컸습니다.

영조의 마지막 왕비인 정순대비 김씨는 15세에 영조의 계비로 들어와 궁중의 어른 노릇을 했습니다.
김씨는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 10년이나 어렸습니다만 혜경궁 홍씨는 지극정성으로 정순대비를

받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순대비는 친정붙이에 휘둘려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을 거들었고 세손인 정조를 옹호하는

시파를 시기했습니다.

정조가 왕위에 올라 친정세력인 경주 김씨를 몰아내자 불만에 차서 방해를 일삼았습니다.

정조가 종기로 자리에 드러눕자 정순대비는 자주 병실을 드나들었는데
그런데 정조가 마지막 탕약을 먹고 갑자기 죽자 김씨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정조가 죽은 뒤 옥새가 궁중 어른인 김씨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김씨는 어린 왕을 감싸며 친정붙이를 끌어들여 정사를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그리하여 그 뒤 문벌정치가 들어서 19세기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정조가 그토록 염려하던 일이 끝내 현실로 나타난 것이죠.

정조를 반대하던 벽파는 고개를 치켜들고 정조의 세력을 꺾었으며,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온갖

비리를 저질렀습니다.

조선 초기에 세종이 죽고 나서 왕위를 놓고 왕자들이 싸움을 벌였는데, 이때에는 척족들이 어린 왕을

업고 농간을 부렸었지요.

세종과 정조, 그들은 비록 성군으로 역사에 이름은 올랐지만 그 뒤의 현실은 그들 뜻대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세종은 조선왕조가 안정기에 접어 들었을 때 왕위에 올라 빛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좋은 역사

조건을 잘 활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정조는 사회가 급변하고 기강이 극도로 문란하여 민중적 자각이 세차게 일어나는 역동기에

왕위에 있었습니다.  역사 환경이 매우 나빴습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개혁을 단행하고 새로운 역사시대를 열었지만 기득권을 누리는 반대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정조는 신진의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주자학을 탐독했으며 새로운 세력을 등장시키면서도

문벌가들을 직접 탄압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절제된 개혁정치를 폈지만 반절의 성공일 뿐이었죠.

하지만 오늘날 정조는 세종과 함께 위대한 군주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정조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 있는 수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1년에 수십만 명의 외국인들이

발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수원시에서는 화성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진행시키고 있는데,
그러나 이런 외형적 노력보다 정조의 정신을 먼저 알아 가는 게 역사의 진실을 찾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다음 제114화 계속~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4화
?(순조 1)정순왕후의
수렴 청정을 받다.

순조는 1790년(정조 14) 6월 18일에 정조와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의빈 성씨가 낳은 첫째 아들 문효세자는 5세의 어린 나이로 일찍 죽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순조는 왕실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이었죠.

정조는 효의왕후로 하여금 순조를 아들로 삼게 하고 1800년(정조 24) 1월에 왕세자로 책봉했습니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에 정조가 갑자기 죽고 그해 7월 4일 순조가 즉위했는데 당시 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따라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정순왕후는 대표적인 공한파 김한구의 딸이자 김귀주의 동생으로, 정조 즉위 후에는 노론 벽파를 옹호하며 시파와 대립했습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정조가 고수했던 탕평의 원칙은 사라졌고, 정조와 시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장용영은 혁파되었습니다.

다만 임오의리에 대해서는 왕실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던 정순왕후의 뜻에 따라 정조가 천명한 바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정적인 시파, 그중에서도 남인 시파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습니다.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맨 먼저 문제 삼은 것은 천주교였습니다.

이가환을 비롯해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3형제 등 남인에는 유독 천주교 신봉자가 많았습니다.

결국 시파 제거를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그 규모가 점점 확대되어 희생된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박해입니다.

당시 은언군(恩彦君)과 그의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등 왕실 일족,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 등도 천주교와 관련된 혐의로 처형되었습니다.

이 밖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던 순조 재위 초기에는 공노비의 혁파, 서얼 소통의 시행 등 조선 사회 신분 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주요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습니다.

순조는 1802년(순조 2) 10월에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를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정조가 생전에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기 위해 재간택까지 해 놓은 상태였지만, 김조순이 시파였기 때문에 노론 벽파들은 김조순의 딸을 순조비로 삼는 것을 반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정조가 정해 놓은 일을 쉽게 저버리지 못하고 결국 안동 김씨 집안과의 국혼을 성사시켰는데,
이것이 이후 3대에 걸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순원왕후는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3명의 공주를 낳았는데, 24대 헌종은 효명세자의 아들로, 순조의 손자입니다.

?다음 제115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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