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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15-116

碧空 2022. 2. 28. 18:4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5,116화
?(순조 2)벽파의 몰락과                 
안동 김씨의 집권


1803년(순조 3) 12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14세가 된 순조가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순조의 정치력은 여전히 미약했는데 이러한 가운데 정권을 잡은 것은 외척인 김조순의 집안이었습니다.

시파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가는 비변사를 장악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한편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노론 벽파는 '김달순의 옥사'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김관주를 비롯한 노론 벽파는 후원자인 정순왕후가 죽자 앞날이 걱정되었습니다.
순조가 벽파에 대한 보복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죠.

김관주는 순조가 장성하기 전에 사도세자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관주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조카 박종경을 만나 박종경에게 영조 때 사도세자의 잘못을 간했던 박치원과 윤재겸 두 사람을 포상하도록 주청할 것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도세자가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덕이 있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김관주의 추천으로 우의정에 오른 김달순이 순조에게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면 그것으로 사도세자에 대한 벽파의 입장이 정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종경은 이 말에 동의하고 김관주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박종경이 입궐하려는 날, 공교롭게도 박종경의 아버지 박준원이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되었는데,

박준원은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박종경의 입궐을 막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우의정 김달순은 김관주의 계획대로 박종경이 이미 순조를 만나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순조에게 〈영남만인소〉의 주모자인 이우를 처벌하고 박치원과 윤재겸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려 줄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순조는 김달순의 주청에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순조는 박치원, 윤재겸 두 사람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릴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임오의리는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평소 김달순과 정적 관계였던 김명순이 김달순을 비난함과 동시에 조득영으로 하여금 김달순을 탄핵하게 했습니다.

결국 김달순은 유배되었다가 그해 4월에 사사되었습니다.

김달순의 처형으로 김관주, 심환지등 벽파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권력에서 밀려나고 시파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벽파의 몰락과 시파의 집권은 사실상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는 또 다른 외척인 반남 박씨 세력과 풍양 조씨 세력의 협력을 얻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정조 때 홍국영의 세도정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도정치 아래서는 정승을 비롯한 모든 관료들이 세도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국가의 모든 사무와 결정도 세도가를 통해야만 왕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홍국영의 경우에는 그런 세도가 불과 3년 만에 끝이 났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는 대를 이어 6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안동 김씨는 충절과 학문을 숭상해 온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집안으로, 대대로 명문가로 명성을 이어 왔습니다.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김좌근, 김문근, 김병기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조정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을 행사 하였습니다.

?다음 제116화 계속~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16화
?(순조 3) 세도정치의 폐단과
농민반란


조선의 지배층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을 시작한 이래, 당쟁은 당파들 간의 지나친 반목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실정을 견제하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도정치에서는 그들의 실정을 바로잡을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왕권조차 세도가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견제 세력이 없는 권력은 결국 부패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순조 재위 기간 동안 삼정(三政, 전정·군정·환정)이 문란해지고 지방관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세도가들은 부패한 관리들의 뇌물로 가산을 늘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811년(순조 11)에 일어난 홍경래 난이 대표적입니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군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스스로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고 병서를 익힌 홍경래는 뿌리 깊은 조선 조정의 서북인 차별과 부패한 관리들의 가혹한 착취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홍경래는 우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새롭게 성장한 부호 세력, 즉 상업과 광산업의 발달로 탄탄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그리고 일반 백성과 천민들을 모아 봉기를 준비했습니다.

1811년(순조 11) 12월 18일, 홍경래는 우군칙, 김창시 등과 함께 거병해 10여 일 만에 청천강 이북지역을 거의 장악했습니다.

반란군은 1812년(순조 12) 1월에 정주성을 함락하고 남진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정부 토벌대의 공격에 막혀 정주성에 고립된 채 4개월가량 버티다가 섬멸당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평정되었지만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조선 시대 내내 모순된 신분 제도와 세금 제도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삶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순조 대 이후 빈번해진 농민들의 무력봉기는 불만이 극에 달한 백성들의 저항의식이 표출된 것이
었습니다.

?다음 제117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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