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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3-94

碧空 2022. 2. 24. 19:43

?조선왕조실록 제93화,제94화

?(숙종 3) 서인의 복귀와

                       노론, 소론 분열

전회에서 본 경신환국의 연출자는 김석주이지만, 결국 남인이 떠난 자리를 채운 건 서인이었다.

서인은 곧바로 잃어버린 6년의 복구에 나서, 먼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복권시켰다.

임금도, 대비도 높이 받들고, 영상 이하 대신들도 모두 다 제자들이니, 송시열은 예전의 그 권위를 모두 되찾았다 할 만 했다.

송시열의 유배생활은 사형수의 하루하루나 다를 것이 없었다.

남인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목숨을 원했고, 결단이 빠른 왕이 언제 ‘아뢴 대로 하시오’라고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인 정권을 몰아낸 김석주는 구원자나 다름이 없었고, 이런 이유로 송시열은 여러 방면에서 김석주와 뜻을 같이 했다.

최강 권력자의 꿈을 이룬 김석주는 남인의 복귀 가능성을 우려해 남인을 사실상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어영대장 김익훈을 파트너로 삼아 작업을 시작했다.

김익훈은 남인들을 역모로 엮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무리수를 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 때 외척의 발호와 공작정치에 크게 염증을 느낀 서인측 신진사류들은 증거도 없이 사건을 만든 김익훈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다.

이러한 순간에 서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한 송시열은 김익훈을 싸고돌며 그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다른 때 같았으면 송시열의 한 마디로 사태가 잠잠해졌겠지만, 송시열이 김석주로 인해 변했다고 생각한 신진사류들이 이번에는 반발했고, 이때 사림에서 송시열 다음으로 존경을 받던 박세채가 소를 올려 신진사류들을 옹호했다.

이에 신진사류들이 박세채를 떠받들었고, 박세채는 일약 신진사류들의 영수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소론이라 불렀고, 송시열을 따르는 이들을 노론이라 불렀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가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선조 때 동인, 서인으로 파당이 형성되었다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하고,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한 것이다.

한편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는 자신과 송시열에 반대한 박세채를 겨냥해 세찬 공격을 하던 중 51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면 빠른 죽음이 그에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방자함이 그를 어떤 불행에 빠트렸을지 넉넉하게 예상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 제94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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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94화

?(숙종 4) 숙종의 여인

                        장희빈(속1편)

숙종 6년에 왕비 인경황후(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가 천연두로 세상을 뜨고, 그 이듬해에 새로 왕비를 들이니 이 사람이 노론 핵심인사인 민유중의 딸 인현황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인현황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뒤에 장희빈으로 불리게 된 여인 장씨입니다.



장희빈(아직 희빈이 아니나 편의상 장희빈이라 함)은 1659년 장경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 오빠이자 맏아들은 장희재이다.

장희빈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는데, 장현은 남인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장희빈의 어릴 적 환경은 비빈의 자리에 오른 것에 비하면 매우 혼미하다 할만 했는데, 이러한 배경의 여인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는데, 장차 나타나는 장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 하겠다.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우의정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고, 조사석은 인조의 후궁 조귀인의 손자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으며, 그런 요청에 따라 장희빈이 나인으로 입궁했는데, 그녀는 미모가 특출 나게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희빈은 인경황후가 죽은 그 해 21세의 나이에 처음 숙종의 성은을 입었고, 이때부터 이미 큰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장희빈의 꿈은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당파적 색채가 강한 왕대비 명성왕후가 장희빈으로 인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보아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나이는 장희빈이 8세 위였다.

장희빈을 내쫓은 왕대비 명성왕후가 죽자 장희빈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인현왕후가 명문가 출신의 현숙한 여인답게 숙종에게 “성상의 은혜를 입은 여인을 사가에 둘 수 없으니 불러들이소서”라는 청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숙종은 장희빈을 불렀다.

(얼씨구나~)

이 때 장희빈의 나이 25세였다.


?다음 제95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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