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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65~66화

碧空 2022. 2. 1. 23:58

?조선왕조실록 제65화, 66화

?(선조 13) 이순신, 바다를  
                                  장악하다!  


이순신이 2차 출동에 나선 5월 29일, 이 때에는 전라 우수영 이억기 부대, 원균 부대와 합류해 판옥선만 50척이 넘는데다 거북선이 앞을 이끌었다.  

조선 수군은 사천포에서 왜선 12척을 모두 격파하고, 이튿날 당포에서 20척의 왜선을 깨트려버립니다.  

거북선을 선봉에 세운 조선 수군은 이어 당항포에서 26척, 율포에서 3척을 격파한 뒤 각 군영으로 복귀하였다.  
이 싸움에서 원균은 싸움보다는 왜군의 수급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한다.

(저기도 있다~ 건져 올려~~)

원균은 그렇게 확보한 수급과 함께 장계를 올려 선조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한편, 거듭된 수군의 참패에 경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600명으로 5만의 조선 관군을 깨트린 용인전투의 주인공 와키자까 야스하루를 해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와키자까의 주특기는 사실 해전이었습니다.
와키자까는
“이순신?

누군지 모르지만 그대의 무운도 이제는 끝이라오”
라고 호언을 하며, 합동작전을 펼치라는 히데요시의 명도 무시하고 이순신과의 일전을 서둘렀습니다.  

일본 최고의 장수라는 자부심이 너무 강했던지, 와키자까는 왜군의 연전연패에도 상대를 인정할 줄 모른 채 전공에만 눈이 멀어 서둘러 70여척의 전함을 이끌고 견내량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겨 놓고 싸우는 장수 이순신은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포위한 후 몰살시켜버리겠다는 웅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은 7월 4일, 이억기, 원균의 수군과 결진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진을 친후, 어영담의 5척 전함을 동원해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한산도 앞바다로 들어 온 와키자까의 왜군은 이순신이 미리 구상해 놓은 학익진에 걸려들었고, 조선 수군은 특유의 함포 사격과 뒤이은 강력한 박치기, 그리고 정밀한 마무리 공격으로 59척의 왜선을 격침시켰으며, 일본 최고의 장수라는 와키자까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을 치기에 급급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산대첩으로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으로 불리웁니다.  

조선 수군은 50여일 뒤 다시 출병하여 부산포를 공격해 적선 100척을 깨트리는 전과를 올리니, 이로써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조선의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한산대첩으로 인해 해전을 포기하는 등 전쟁의 구도 자체를 변경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불패의 이순신은 조선 백성들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 받기에 이르렀다.  


?다음 제66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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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66화

?(선조 14) 진주성 대학살 

벽제관 패배 이후 명나라 측은 싸움 보다는 강화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행주싸움 패배로 전황이 여의치 않다고 여긴 히데요시는 이즈음 “순차적으로 퇴각하되 명과 유리한 협상을 이루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일본군은 안전한 퇴각을 위해 명나라와 담판을 시도해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만나 명나라가 두 명의 강화사를 일본군에 보내기로 했고, 일본군은 심유경과 강화사, 임해군과 순화군을 앞세우고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그 퇴각 행렬은 여유가
넘치는 나들이 같은 행군이었다. 

권율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고자 했으나 명나라측은 이를 제지했고,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추격하는 시늉만 하였으며, 일본군은 결국 안전하게 남해안 왜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히데요시의 뜻밖의 명이 하달되니, 이는 “군사를 총 동원해 진주성을 쳐서 지난날의 수모를 갚아라”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10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했고,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과 관군, 김천일 의병, 최경희 의병, 충청병사 황진이 이끄는 군사,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의 의병 등 대략 1만 명이 집결했다. 

명나라 측은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 시도를 막고자 협상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뒤로 물러나 앉아 구경꾼 모드를 취하였다.

선조는 진주성 싸움에서 조선병사들의 몰살이 우려된다는 보고를 받고, 명나라 측에 지원을 요청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때는 이미 진주성이 함락당한지 열흘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10만의 일본군은 6월 22일 공격을 시작하였고, 조선군은 죽기로 싸워 버텼으나, 결국 공격 7일 만인 6월 29일 병사들은 사실상 모두 몰살을 당하고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진주성에 입성한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수만 명의 성 안 백성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니 백성들이 흘린 피가 사흘 밤낮을 흘러 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자축연에 참여했던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 물에 투신했다는 이야기가 야사에 나오는데, 그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른 선조의 위신은 선위를 주장하는 상소가 여러 차례 있을 정도로 땅에 떨어졌습니다.

(왕조 시대에 선위 요구는 반역으로 목이 떨어질 일입니다.) 

처음 위기에 마냥 몰릴 때는 요동으로 갈 수만 있다면 선위도 할 수 있다고 하던
선조는 상황이 호전되자 선위 문제를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꼼수를 부리기에 이르렀다. 

선조는 “나는 역사의 죄인이니 선위하겠소”라고 하고, 신하들은 이를 죽기로 말리는, 이런 밀땅이 계속되다가 슬그머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선위의 뜻을 거두었다. 

백성들은 왜적의 칼과 굶주림에 그 반수가 죽어 나가는데 조정은 선위 논쟁으로 소일했고, 재미를 붙인 선조는 조금만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여지없이 선위 카드를 들고 나왔다.

역시 선조는 조선 최악의 임금입니다. 


?다음 제67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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