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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63~64화

碧空 2022. 2. 1. 23:56

?조선왕조실록 제63화, 64화

?(선조 11) 승전의 시작 


왜군 침입이 이순신에게 알려진 것은 왜군 부산상륙 이틀 후인 4월15일이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적 함대를 처음 대면하고는 그 규모와 위세에 눌려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도망을 친 후,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조정에 전라좌수군과 합세하여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는 장계를 올렸다. 

원균의 구원 요청에 이순신은 "각자 맡은 지역과 소임이 있으니 함부로 쉽게 군사를 이동시킬 수 없다"며, 지원요청을 거절하여버립니다. 

그러나 곧 이은 선조의 명령서의 내용은 "원균이 여러 포구에서 싸울 준비를 마쳤다고 하므로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힘을 합쳐 맞선다면 능히 왜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순신이 출정을 위해 경상우수군의 상황을 파악해 보니 군사도 배도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사실상 전라좌수군의 힘만으로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쨌든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을 필두로 여수 수영을 출발해 경상우수영 관할 포구에서 결진을 하니, 원균의 판옥선은 4대에 불과하였다. 

5월 7일 점심쯤, 척후선이 적선 30척이 옥포 포구에 정박해 있고 왜군은 상륙하여 분탕질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여왔다. 

조선 수군은 소리 없이 포구로 접근을 하였고, 이를 발견한 왜군은 황급히 배로 돌아와 다가오는 조선 수군을 향해 조총을 난사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넓게 진을 이루어 포위해 들어가다가 일제히 벼락같은 포격을 가하였다. 

그동안 일본 수군의 기본적 전투 양식은 빠른 배를 이용해 적선에 접근하여 배에 올라탄 다음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칼싸움에 도가 텄고 조총까지 갖추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왜군은 조선 수군의 예기치 못한 포격에 혼비백산했고, 조선함대가 접근하자 백병전을 펼치고자 했으나, 조선 수군은 그동안 훈련한 그대로 더 두껍고 튼튼한 판옥선을 이용해 충돌 공격을 감행하여 왜선을 좌초시키는 한편 일본 배보다 높은 판옥선 갑판 위에서 화살공격을 퍼부으니, 왜군은 도저히 대적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이날 전투로 왜선 26척이 좌초되었고 수많은 왜군이 수장되었으나,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겨우 부상 1명에 불과했으니 실로 압도적인 승리였다.(옥포해전)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수군은 이어 합포에서 5척, 그 다음날에는 적진포에서 11척의 왜선을 깨트린 뒤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개선하였다. 

히데요시는 육군보다 더 강하다고 자부하던 해군이 그들 입장에서는 “듣도보도못한 인" 이순신에게 완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대노하여 장검으로 평소 가장 아끼던 분재를 난도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서막에 불과했다. 

?다음 제64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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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64화

?(선조 12) 비장의 전함
                            거북선(龜船) 


이순신은 장졸들의 전공을 치하한 뒤 곧바로 전함을 수리하고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는 등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다.

조선 수군과 백성들은 그동안 "이런다고 과연 우리가 왜군을 이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옥포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을 믿고 따른다면 능히 왜군을 물리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5월 29일, 이순신 함대는 2차 출동에 나섰는데, 이때는 비장의 전함 거북선이 함께 했습니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개전 이듬해인 1593년 조정에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입니다. 

이순신이 이 장계에서 자신 있게 언급했듯이 거북선(龜船)과 판옥선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 중 하나였다. 

왜군들이 조선의 배로 뛰어들어 단병접전을 시도하지 못하게 막고, 조선의 장기인 활쏘기와 화약무기 사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본 갑판 위에 갑판을 한 층 더 높인 군함이 판옥선이고, 갑판 위에 아예 덮개를 씌운 군함이 거북선입니다. 

조선 수군은 어느 정도 적선과 떨어진 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승부 가르는 것을 선호했지만,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대포를 쏘아 적함을 맞추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해상에서 사거리가 100미터가 넘는 경우 명중 정확도에 한계가 있었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쓰인 배가 거북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은 판옥선보다 강한 방호력을 바탕으로 적선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코앞에서 명중탄을 날려 보낼 능력이 있었고, 최선봉에서 인파이터처럼 돌격함으로써 후방의 판옥선이 적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됐으며, 적의 전투대형을 직접적으로 교란하는데도 그만이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가장 훌륭한 전투 파트너였던 셈이었다. 
거북선이 이처럼 초근거리로 접근해서 전투를 했다는 목격담은 일본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일본 측 기록인 [고려선 전기
(高麗船戰記)]는 1592년 7월10일 벌어진 안골포 해전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큰 배 중에 3척은 메꾸라 부네

,(盲船:장님배)인데, 석화시·봉화시·안고식 화살촉 등을 쏘며 오후 6시까지 번갈아 접근해 공격을 걸어와 망루로부터 복도, 방패까지 모조리 격파되고 말았다. 

이러한 거북선은 태종실록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런 것과 괸련해 거북선의 발명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두루 두루 종합해 보건대, 거북선은 이순신이 휘하의 사람들과 함께 조선 태종 때 존재했다던 거북선을 모티브로 실제 전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실전적으로 건조한 창조적 함선인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거북선은 나중에 건조된 것 까지 도합 5척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운이  풍전등화 상황 에서 백성 모두에게 이길 수 있고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한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는 당시 백성들에게 얼마나 반가운 소식 이었을까요?


?다음 제65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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