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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61~62화

碧空 2022. 2. 1. 23:52

?조선왕조실록 제61화, 62화

?(선조 9 ) 북으로 북으로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쳐 온 후, 한양 방어를 도원수 김명원, 유도대장 이양원에게 맡기고, 부원수 신각에게 한강 방어를 맡겼다. 

한강 북단에 진을 친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남단의 일본군이 헤엄쳐 강을 건너는 자세를 잡자, 겁을 집어 먹고 병사들에게 무기를 버리게 하고는 자신은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임진강 방면으로 도망을 쳐버렸다.

이런 겁쟁이,비겁자를 도원수에 앉힌 자가 선조 임금입니다.

부원수 신각은 양주 방면으로 후퇴한 후, 왜군이 무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약탈을 다닌다는 정보를 듣고는 해유령에 매복해있다가, 약탈하고 돌아가는 왜군 수십 명을 발견하고 이들의 목을 베었는데, 이것이 작지만 개전 이래 조선 육군의 최초 승리이다. 

신각은 조정에 70 수급과 승전보를 보냈는데, 곧 선정관이 내려와 상을 주기는커녕 바로 신각의 목을 베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도원수 김명원이 “신각이 말을 듣지 않아 패배하였다”는 허위보고를 함으로써 선조가 대노하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뒤늦게 신각의 참수가 잘못된 것임을 알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원에게 죄를 묻기는커녕, 장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에게 그대로 임진강 방어를 맡겼다. 

근대사에서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은 이유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임진강 방어를 맡은 김명원은 임진강 건너 왜군이 철수하는 폼을 잡자, 지난 번 패배를 만회해 볼 요량으로 부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토란같이 모은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왜군을 쫒았다. 

그러나 이는 왜군의 유인작전으로, 조선군은 왜군의 매복에 걸려 괴멸해 버리고, 자신은 또 다시 평양으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이때에도 조정의 비호를 받은 김명원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 왕에 그 신하, 선조는 도대체 무슨생각을 하고 사는지...? ㅉㅉ

한편, 왜군의 진격로에서 벗어나 있던 전라도, 충청도와 경상도 일부의 지휘관들은 이곳의 남자라는 남자는 사실상 모두 모았다고 할 수 있는 5만의 병력을 집결시킨 후 근왕의 기치를 내걸고 북상했고,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 병력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5만의 대 병력은 용인에서 와키자까 야스하루가 선봉대 1천 6백을 이끌고 급습하자 무너져 버렸고, 가까스로 수습해 진을 차리고 밥을 지어 먹던 이틑날 아침, 다시 기습해 온 적군에 허둥대다가 거짓말같이 와해되어 버리니, 선조의 마지막 희망은 이렇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선조는 격렬하게 앞을 가로막는 백성들 목을 여럿 친후 겨우 길을 내어 평양을 떠나 임시 거소를 정한 후, 이제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를 논의 하였으나, 의견이 분분하였다. 

선조는 "함경도건 평안도건 나라 안에 있으면 외적이 미치지 못할 곳이 없으니 중국 요동으로 가려고했다.
죽어도 중국 땅에서 죽겠다.
광해에게 국내를 맡긴다면 광해가 능히 대임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명나라로의 "귀부"를 주장하였다. 

"귀부"는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선조의 이런 뜻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국 광해군은 선조와 헤어져 분조를 이끌기로 했고, 선조는 의주로 이동해 여차하면 중국 요동땅으로 튈 준비를 마쳤다.

소갈딱지 밴댕이...
인재를 몰라보는 선조
인재를  버리는 무식이...
선위 운운해 연장한 선조
왕이라 칭하기에 한없이
부끄럽지 아니한가요 ?...

?다음 제62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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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62화

?(선조 10)위대한 성웅 이순신 !


100년에 걸친 실전으로 단련된 수십만의 최정예 군대, 최신식 조총으로 무장, 거기에 죽거나 이기거나만을 외치는 사무라이 정신, 이러한 전력을 소유한 히데요시가 명나라 정벌을 꿈꾸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히데요시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1.파죽지세로 밀어붙여 일단 조선 전역을 장악한다.

2.진격한 군대가 고립되지 않게 안전하게 군수물자와 응원군을 보내준다.

3.어떻게?

서해를 통해 곧장 한양으로, 평양으로, 이른바 수륙병진전략을 사용한다.

4.이리되면 조선은 항복할 것이고, 그런 다음 조선군을 보조군대, 즉 총알받이로 삼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군수기지로 하여 명을 친다.

이와 같은 전략은 조선 수군을 아예 유령 취급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실제로 조선이나 일본이나 모두 수군은 당연히 일본이 강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육군이 평양까지 진격했다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선조를 쳐 죽인 후 명나라를 칠 것인가, 아니면 명나라와 협상을 하여 조선의 일부만 먹을 것인가라는 즐겁고도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전혀 예측 못했던 하이 킥이 솟아올라 히데요시의 턱을 강타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니, 이는 바로 이순신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인종 원년인 1545년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철들 무렵에는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사해 살았다.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은 10여 년 간 승진과 파직을 거듭하며 제자리걸음을 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이순신이 승진을 위한 노력, 즉 "빽"쓰는 일을 혐오하고 멀리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조정의 높은 대신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부당거래로 보고 거절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순신은 독불장군이라는 평을 받아 배척되기도 했지만, 반면에 소수 나마 이순신의 됨됨이에 탄복한 사람도 있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소수의 긍정적 평가로 인해 왜란 발발 바로 전 해인 1591년 47세의 나이에 전라좌수사에 제수될 수 있었으니, 아직 조선이 망할 운명은 아니었나 봅니다.

이순신은 조정의 판단과는 달리 일본에 잡혀갔다 풀려나온 백성들의 증언, 상인들의 전언과 조선 내 왜인들의 동태 등을 근거로 왜군의 침략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또한 독자적으로 왜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왜군의 전함은 빠르기는 하나 삼나무로 건조하여 견고하지 못하고, 조총으로 무장한데다 칼싸움에 능해 접근전에 강하나, 포는 별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순신은, 해전의 핵심은 '포격전'이고, 포격전은 대형을 어떻게 갖출 것인가에 달려있으며, 여기에 물길에 밝은 이점을 살려 유리한 곳에서 싸움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아울러 전라좌수군이 무너진다면 서해를 이용한 바닷길과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이 왜군에 넘어가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조선은 계속 왜군에 맞서 싸울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이순신은 위와 같은 형세 판단을 전제로, 배를 건조하고 포와 화약을 힘써 마련하는 한편, 실전과 같은 훈련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비장의 전함 거북선도 차츰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제63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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