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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57~58화

碧空 2022. 2. 1. 23:49

?조선왕조실록 제57화, 58화

?(선조 5 ) 예고된 침략(2) 

조선 통신사의 일본 내 활동과 귀국 후의 활동에 대해 실록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유성룡의 ‘징비록’을 근거로 한 ‘수정실록’에는 김성일이 당당하게 일본의 무례를 꾸짖은 반면, 황윤길은 재물확보에 급급해 비루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김성일이 유성룡과 같은 동인인데다, 전쟁발발에 대해 헛다리를 짚는 걸 보면, 유성룡의 김성일에 대한 후한 평가는 자기 붕당에 대한 자화자찬에 불과한 것으로 봄이 타당합니다. 

김성일은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이 워낙 세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 정세파악을 그르치고 조정에 사실상 허위보고를 하고 마는 크나큰 우를 범한다. 

조선에 돌아온 정사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눈빛이 빛나고 지략이 풍부해보였으며, 여러 사정을 볼 때 머지않아 조선을 칠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에 반해 부사 김성일은 히데요시는 쥐같이 생긴 인물로서 두려워할 바 못되고, 조선을 칠 의사와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보고를 하였다. 

선조를 비롯한 조정은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나, 난상토론 끝에 결국은 "전쟁은 그렇게 쉽게 나는 것이 아니다, 왜구의 노략질 수준이겠지 설마 전면전을 하겠어?"라는 심정으로, 보다 마음 편한 선택인 김성일의 의견을 믿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일단 발생하면 어마어마한 인명이 죽고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그런 속성을 가진 “전쟁”이 과연 실제로 발발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면밀한 과학적 분석과 전략적 탐색이 아닌 토론으로 결론 내리는 이 신기한 문화...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지 조정은 이순신, 송상헌 등을 남쪽 최전방에 배치하고, 전국에 축성, 성곽보수 등을 명했으나, 이마저도 김성일은 민심이반을 걱정하며 반대하였다. 

조선은 유학으로 무장한 학자들이 다스리는 나라, 문신의 나라였고(권력은 붓끝에서 나온다!!!), 이들이 병조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해 무신들을 부리고 다스렸으며, 이렇다 할 전쟁 없이 평화가 유지되면서 그나마 조선 초에 있던 진법훈련이니 병기개량이니 하는 것들마저 없어졌다. 

그들은 자기들 말을 듣는 장수가 여진족 몇을 베게 되면 이를 과장해 명장이라 치켜세워 승진을 시켰고, 장수는 장수대로 인사권을 쥔 문신들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 축재를 하기에 바빴다. 

군졸들은 아무 빽도 없고 도망갈 배짱도 없는 약자 중의 약자들로서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었다. 

위와 같은 삼위일체 체제에, 왕 같지도 않은 왕에, 거기다가 전쟁은 없다는 동인정권의 결정적 오판까지 겹쳤으니, 이 나라가 어찌 성할 수 있었겠습니까?

임진년 봄, 왜인들이 머무르는 왜관은 이미 텅 빈지 오래였고, 전쟁을 예감한 이순신이 홀로 거북선을 제작해서 수시로 선대를 끌고 포격훈련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조선은 조용했고, 예고된 전쟁은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제58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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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58화

?(선조 6) 침략, 그리고
                        조선판 킬링필드  

선조 25년인 1592년 1월 히데요시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수십만 대군이 나고야로 집결했다.
이 소식은 사신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지만, 조정은 이 소식을 무시했다.   

그해 4. 13. 조선은 고니시 유끼나가가 이끄는 18,700명의 왜군 선봉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고서야 침략 사실을 알았으나, 상륙 저지를 위한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었다.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최정예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앞에서 조선은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제1선봉대 고니시 유키나가, 제2선봉대 가토 기요마사군이 속속 부산포로 상륙했고, 부산진과 동래진이 차례로 무너졌다.  

조선군이 왜군과 처음 대적한곳은 부산 진성, 첨사 정발 이하 군민은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성은 곧 함락되고, 성안의 백성 3,000명이 살육당하였다.  

곧이어 동래산성에서는 송상현 등이 죽기로 싸우다 모두 전사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좀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동래성은 동래부사 송상현이 3천여 명의 병력으로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송상현은 부산진에 있던 왜관의 왜인들이 모두 떠나는 등 왜인들의 이상징후를 느끼고 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병력이 너무 많고 전력에 차이가 나 이런 준비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송상현은 절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백성들까지 합세해 왜군과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무참히 패배했고, 왜군은 동래성을 함락한 뒤, 여자, 어린아이 등을 가릴 것 없이 5천의 관민을 모조리 학살했다.  
최근의 발굴과 연구에 의해, 다음의 충격적인 사실들이 확인되었다.  

즉, 왜군은 단순히 전투 과정에서 동래성의 백성과 관군을 죽인 것이 아니라, 전투가 모두 끝난 후 5세 정도의 유아의 머리에 지근 거리에서 조총 조준사격을 하고, 주저앉혀진 20대 여성의 두개골을 위에서 수차례 칼로 내려치는 등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으로 어린 아이, 여성 등을 포함한 무수한 민간인들을 대놓고 학살한 증거들이 속속들이 발견된 것었다.  

이러한 대학살은 단순히 “저항하면 다 죽인다”는 시위를 하기 위한 목적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군은 왜란 내내 조선 군민에 대한 학살을 계속했고, 돌아가는 그 날까지도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문서를 통해 직접적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라는 명령을 하달하였고, 이러한 히데요시의 명령은 전장에서 조선인을 얼마나 많이 죽이느냐가 그의 관심사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장의 왜장들은 조선인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에게 보냈고, 히데요시는 코를 잘 받았다는 영수증을 발행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살인과 방화와 강간은 왜군에게 공식적으로 허용된 행위였고,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자행된 조선판 킬링필드의 현장이 동래성이었으며, 왜군의 이러한 만행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저런 저런  개, 소, 말, 돼지 같은 놈들, 아주 썩을 넘들, 오살할 놈들.
눈감으면 코베어 간단 말이  저때 부터 유래 되었다는 설

일본인의 속성인가?
임진년부터 식민지 시대까지 하는짓이 원~~

?다음 제59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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