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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碧空 2013. 10. 28. 14:07

대마도對馬島의 일반


대마도는 쯔시마津島(나루가 많은 섬)라 부르면서 타이마對馬로 쓴다.

중국 역사책 위지 왜인전에 처음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대마도의 명칭 대마對馬는 '말이 대칭으로 서있다.'라는 뜻인데

만제키바시에서 보이는 시라다케산의 두개 봉우리가 마주보고 서 있는 데서 나왔다는 설과

대마도가 바다 건너 마한馬韓과 마주 대하고 있다는 뜻으로 대마對馬라고 하는 설도 있다.


대마도의 인구는 1950년 7만명을 최고로 이후 점차 감소하여 현재는 약 3만여명 정도가

살고 있다.


대마도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는 18km로서 길쭉한 고구마 모양의 섬인데

면적은 제주도의 40% 수준이고 울릉도의 10배 정도가 된다.

대마도와 부산 간의 거리가 49.5km인 반면 대마도와 큐슈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에는 섬이 109개나 되지만 그 중에 유인도는 6개 정도다.



지형의 88%가 산지(최고봉이 650m)로 구성되어 있어서 경작면적은 적지만

청정지역으로 잘 보존된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다.

경작면적이 적은 대마도인들이 식량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고기 잡이와 화전을 개간하거나 칡뿌리나 고사리를 채취하는 것으로 했으나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에 힘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느껴진다.

결국 해적이 되어 우리나라 연안을 습격하여 약탈을 감행하게 되었다.



지금도 두개의 항구 주변을 제외하고는 인공의 흔적이 없는 자연상태를 잘 보존한 곳으로

주로 어업, 관광사업, 임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대마도는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해안선 길이가 무려 915km에 달한다.

2.5배나 큰 제주도의 해안선 길이가 253km에 불과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해안선의 굴곡이 얼마나 심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모든 해안가는 천혜의 어장이 발달된 곳인데 모두 자연적인 조업을 하고 있다.

즉 "낚시꾼의 천국"답게 우리나라 관광객중 30%는 낚시 관광객들이랍니다.


관광객은 한국사람이 75%로 압도적으로 많고 일본인 20%, 기타 외국인 5% 정도로

한국사람이 대마도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곳이라 그런지 한국사람이 태극기를 휘두르고

"대한민국 만세 3창"을 외쳐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곳이다.



대마도에는 한국과 관련된 관광요소들이 많이 있다.

방치되어 있다가 한국관광객들이 많아지다보니 다시 정비하여 복원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사무라이 저택과 거리



일본의 옛날 마을 형태가 일반적으로 다이묘가 중심에 있고 신사와 사무라이 주거지들이 있다.

이즈하라도 대마도주가 살았던 성 아래로 신사와 주변에 방화벽 돌담으로 만들어진 사무라이 거리가

잘 보존 되어 있었다.

사무라이 거리 중간 쯤에 있는 나카라이토슈半井桃水 문학관은 임오군란 때

현지보도를 했던 사람으로 춘향전을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한 사람이다.

나카라이토슈는 일본지폐 5,000엔 속의 인물로 등장하는 유명한 여류소설가 히구이치요의

스승이자 연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 덕혜옹주 결혼봉축비



대마도에는 고종황제의 고명딸 덕혜옹주의 결혼봉축비가 있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 나이에 본 아이이고, 장성한 왕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를

금이요, 옥이요 하면서 귀여워했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일제에 의해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고 자랐다.

모국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감당하기 어려워 침울하고 어두운

성장과정을 겪게된 덕혜옹주는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던 대마도의 소로 타케유키 백작과

결혼했으나 옹주의 지참금을 노린 대마도주와의 애정 없는 결혼생활은 남편의 냉대,

몰락한 나라의 왕녀에 대한 무시,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아이의 죽음 등으로 불행했었다.

일국의 공주가 변방의 일개 군수 아들에게 시집간 꼴이 된 셈이었으니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 그 얼마나 컸겠는가 짐작이 된다.

딸이 죽은 후에 덕혜옹주의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 병원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하다가

결국은 이혼 후 귀국하여 창경궁 낙선재에서 이방자 여사와 생활하다 쓸쓸히 죽어갔다.



- 대마 역사민속자료관



자료관 입구에는 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세웠다는 고려문高麗門이 서있다.

자료관 옆에는 조선통신사의 활발했던 교류와 우호적인 관계를 기념하는

조선국통신사지비가 과거의 역사를 들려주고 있다.

이 자료관에는 대마도의 역사적 문화유산과 그림, 왜관의 도면, 고서, 민속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조선통신사 행렬의 두루말이 그림은 길이가 16.58m나 되며

그 옆에는 통신사를 접대하는 방법과 음식 차림상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두꺼운 책자가 놓여 있어서 당시 조선통신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마도주가 고려의 관직을 수여받은 수직왜인受職倭人의 교지도 전시되어 있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시면 슬라이드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picasaweb.google.com/105333288504732294048/0102#slideshow/5937493998991139250>



- 몽고군내습지蒙古軍來襲地와 돌지붕 마을



고려와 원나라가 연합하여 일본 정벌을 위해 발을 디딘 곳이 몽고군내습지다.

당시 려원연합군麗元聯合軍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게 되는데

이곳이 최초의 상륙지라고 하며, 때마침 모래를 동반한 태풍이 불어 몽고군이 물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바람을 일본을 구하기 위해 신이 일으킨 바람이라고 하여

신풍神風(카미카제)이라고 하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이시야네石屋根라는 돌지붕으로 된 집(창고)이다.

섬의 특성 상 대마도는 바람이 많은 곳이니 비바람과 화재를 막기 위해 이러한

돌지붕을 이었으나 이제는 역사물로 보존하고 있다.



- 쯔즈자키 전망대



대마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쯔즈자키 해상공원은 거친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과

암초들, 그리고 바다 저편의 새하얀 등대가 절경을 이루어 마치 한국의 해남 땅끝마을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

등대를 중심으로 한바퀴 도는 산책로는 길이 평탄하여 남녀노소 누구든지 360도로 펼쳐지는

바다를 감상하면서 산책할 수 있다.



등대산 아래쪽에 신기의 전설을 안은 천도동자상이 서있다.

한 처녀가 이곳 대마도 최남단에서 센 기氣를 받고 회임하고 낳은 것이 천도동자라 하여

천도신앙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은어가 돌아오는 자연공원)

세강은 쓰시마에서 제일 높은 산인 야타테야마矢立山와 다테라야마龍良山에 둘러싸인

우치야마 분지에서 발원하고 있다. 이 세강 유역을 포함한 다테라야마 원시림의 산기슭

약 26ha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산속 깊은 곳까지 수량이 풍부하여 은어가 많이 거슬러 올라오는 것으로 유명하나

세강은 거친 물살이나 연어는 상류인 우치야마 지역까지 올라 온단다.

세강 위에 걸쳐 있는 구름다리에서 강을 내려다 보면 계곡 전체가 천연의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웅대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제주도와 울릉도에서는 보기 어려운 강과 저수지를 조성하여 놓았다.

표고 144m의 높이에 마련되어 있는 만남의 광장을 중심으로 세강의 사면에

스포츠슬라이더, 잔디썰매장, 퍼팅골프장, 캠프장, 삼림욕장이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다.



- 최익현 선생을 모신 절 슈젠지修善寺


구한말 위정척사의 거두였던 최익현은 1905년 체결된 한일신협약(을사조약)과

이를 허락한 을사5적에 대해 상소문을 내어 항의하는 한편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 관헌에게 붙들려 대마도로 유배되어 박해를 받았으며,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금식하시고 결국 순국하게 되었다.

최익현의 인격과 우국충정은 유배생활을 하던 대마도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 대마도 사람들이 슈젠지에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시면 슬라이드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picasaweb.google.com/105333288504732294048/02#slideshow/5937494045111693602>



- 만제키바시(상대마, 하대마 두개의 섬 연결)



이 다리는 일본이 자랑하는 러일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쓰시마 해전의 대승을

가져다준 아주 의미 있는 다리이다.

1900년 일본해군이 대마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뚫어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5년후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 하의 발틱함대를 극동으로 진격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도고 제독은 대마도 아소만에 미리 함정을 대기시켜 놓고 발틱함대를 유인하여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 때 도고가 사용한 전법이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이다.

도고 제독이 가장 존경했던 군인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고 도고 제독은

이순신 장군은 군신軍神이며 본인은 하사관이라고 겸손해 한 요즈음의 일본 정치인들과는

크게 다른 인격자였다.



- 한국전망대



대마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한국전망대는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정자를 모델로 한 팔각정으로

계획부터 완성까지 한국산 재료, 전문가 초빙으로 철저하게 한국풍을 고집했다.

날씨가 좋은 날 육안으로 부산시를 볼 수 있어서 대마도가 얼마나 가까운 이웃인가를 실감케 해준다.



숙종 때 와니우라 해변에서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 108명을 기리는

조선역관사순국비가 있고 역관사가 타고 왔다는 배의 형상이 돌에 새겨져 있다.



- 와타즈미 신사



바다의 신을 모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 와타즈미 신사다.

신사의 문 '토리이鳥居'가 바다 속에서부터 지상으로 이어지는데

만조 시 2m 정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것이 새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새가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을

마련한 게 바로 토리이라고 한다. 특히 문의 방향이 과거 서라벌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서 대마도의 신사가 한반도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을 점치게 한다.



이곳은 텐무 천황 아버지의 출생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천황의 아버지가 용왕의 딸 도요다마 히메와 결혼한 후 부인이 이곳에서 해산을 하게 되는데

해산소에 들어간 부인이 해산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절대 들여다보면 안된다고 했지만

궁금한 남편이 이 해산소를 들여다보니 안에서 용이 고통스런 몸짓을 하며 해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산고로 인한 몸부림으로 떨어졌다고 하는 용의 비늘같이 생긴 조그만

바위가 있었는데 생김새가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 용은 남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다시 용궁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그때 낳은 아이가 천황의 아버지라고 하는 전설이다.

그 천황의 아버지가 홀아비로 이 아이를 키웠는데,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도요다마 히메의

여동생이 육지로 올라와 사내아이를 키워주었고 그 아이가 장성하여 자기를 키워준 이모와

결혼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일본 1대 천황인 텐무 천황이라고 한다.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귀족 중에 일본 천황의 선조가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 에보시타케 전망대와 아소만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아소만을 360도로 돌아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까마귀가 모자를 쓴 형상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아소만은 하롱베이나 중국의 천도호(절강성)를 떠올리게 할만큼 빼어난 비경을 자랑하고 있다.

올망졸망한 섬들이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이 마치 동화 속의 세계 같다.

짓궂은 태풍과 안개로 절경 아소만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대마도 최고의 관광지이다.



- 미우다 해수욕장과 상대마 온천



미우다 해수욕장은 대마도의 최북쪽 해안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마치 한 그루의 분재와 같은 작은 섬과 에메랄드빛 물빛이 보는 사람의 시선을 붙잡아

오래오래 머물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하는 해수욕장이다.

작지만 아담한 백사장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일본 100선 해수욕장 중 하나이다.

여름이면 텐트에서 하룻밤 지낼 수 있게 캠핑시설도 비교적 잘 되어 있다.

대마도에서는 드물게 넓은 주차장이 있는 것도 좋은 점이다.



미우다 해수욕장의 바로 북쪽 언덕 위에는 상대마 온천이 있어서 피로를 풀기에 좋다.

온천 내에서는 수건, 세면도구 등 필요한 물품은 모두 따로 돈을 받으므로 자기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은데 대마도는 화산지역이 아니므로 일본 본토의 온천과 같이

수질이 좋지는 않고 분출하는 물의 온도가 낮아 데워서 사용하는 곳이 많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시면 슬라이드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picasaweb.google.com/105333288504732294048/04#slideshow/5937494310267009282>





여행 중 듣고 배운 대마도와 관련된 이야기.



* 대마도의 대표적인 음식은 이시야끼와 카스마키다.

이시야끼는 돌 위에 각종 생선과 해산물을 올려서 구워 먹는 요리이고

카스마키는 얇은 카스테라 빵에 단팥을 넣어서 만든 빵인데 선물용으로 많이 이용된다.



* 조선통신사 행렬



일본의 마쯔리는 조상의 영을 위로하건 신에게 빌건 무병장수, 풍어풍작, 액운퇴치 등을

기원하기 위해 치르는 의식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현하는 '아리랑 마쯔리'가 열린다.

축제행사 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라는 아리랑을 부른다.

이즈하라 시청 시계탑은 낮 12시가 되면,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이란 한국동요가 흘러나온다.

한국관광객을 위한 것이다. 얄미울 정도로 실익을 우선시하는 그들의 관광전략이다.



* 대마도는 나카사키현 소속



대마도는 규슈 중서부지방의 나가사키현 소속이다.

18세기 일본 최초 개항 지역인 나카사키현의 특혜를 위해 지리적으로 불리했지만

경제적인 이익때문에 대마도는 나카사키현으로 소속되었다.

지금은 지리적이나 경제적으로 후쿠오카로 소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아

나카사키현에서는 대마도를 종합개발지구로 설정하고 적극 개발에 나서고는 있지만

아직도 후쿠오카로 재편해야 한다는 운동이 아직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여러가지 여건을 감안하여 볼때 조만간 후쿠오카현으로 편입될 것이라고 안내자는 견해를 밝힌다.



* 일본 절에 가면 동자 부처상에 웬 앞치마 같은 가사가 씌워져 있다.

가난한 동네에서 입을 줄이기 위해 낳은 아이를 버리고 그 죄를 씻기 위해 석상에

턱받이를 해둔 것이라고 한다.



* 비밀스런 선착장 오후나에는 옛 선착장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곳으로

대마도 사람들은 이곳이 대마도주의 전용 선착장이란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이곳은 사실

해적들의 비밀 선착장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선착장이 겉에서는 보이지 않고

나무에 가려진 오솔길을 걷다 보면 그제서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 대마도의 3고려

조선통신사를 영접하던 문인 고려문과 고려범종, 고려약사불상을 '대마도의 3고려'라고 한다.

약사불은 인간의 병과 고통을 치유해주는 부처님이다.

현지인들은 고려문화에 익숙하고 존중하고 있으며,

고려 이전의 묘지에서는 육지인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절반정도로 우리와의 밀접했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 신사에 가면 볼 수 있는 것(절과 신사의 차이)



토리이鳥居

신사 입구에 있는 천天자 모양의 토리이는 신성한 세계와 속세를 구분하는 상징이라고 한다.

즉 토리이는 신이 사는 곳과 인간이 사는 곳을 구분 짓는 문이다.



코마이누(수호견)

참배길이나 참배전 앞에 해태 상처럼 좌우에 놓여 있는 코마이누는 경내를 지키는 수호견이다.

신전에서 왼쪽은 입을 벌리고 있고 오른쪽은 입을 닫고 있다.「아, 움」이라고 해 둘이 한 쌍이다.



신쇼쿠(제사장)

신쇼쿠가 되기 위해서는 신쇼쿠 양성기관인 대학이나 양성강좌를 수강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

또, 신사에서 부적이나 점괘를 팔고 있는 여성을 볼 수 있으며 이를 미코라고 한다.

미코는 신쇼쿠가 아니며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스모장

신사가 그 마을의 공동 모임처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작은 음악회



e-CLUB의 작은 음악회가 돌아오는 배편을 기다리면서 열렸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 '만남', '메기의 추억' 등을 명찬규 지휘자가 노련한 솜씨로

다소 침울했던 여행 분위기를 살려 주셨지요.

또한 '고향의 봄'을 전체 합창으로 이끌고 이어 '향수'와 '뱃노래'(명찬규), 하해돈의 '타령'은 일품이었다.

즉석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주신 김훈 회장님, 명찬규 지휘자를 비롯한 단원들께 감사드립니다.



* 대마도는 비교적 벌레와 산 모기가 많은 듯합니다.



체류기간 내내 벌레와 모기에 물리는 회원들이 많았다.

따듯한 날씨와 다습 끈적거려서 모기나 벌레들이 극성을 부리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대마도는 벌레나 모기들의 천적인 새들이 많지 않은 특징이 있단다.

가끔 솔개나 큰매가 돌아다니는 것은 보았지만 까마귀 이하 크기의 새는 안 보였다.



* 감사하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민족은 어디일까?



사람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붙임성"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감사하는 마음과 행동에서 생기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생활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적게 사용한다.

일본에 가면 더욱 그것을 느끼게 된다.

영어나 중국에서도 thank you, 謝謝를 밥 먹듯이 하는 것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우리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먹어야겠다.

감사하는 것으로부터 행복이 찾아와 삶의 질이 달라지게 된다.



- 대마도에서 등산으로 적당한 산



산세가 제주도나 울릉도와 달리 600m 이하의 산악지역이 고루 분포되어 있어

어느 한 지점이 높은 곳은 없다.

그 가운데에서 등산으로 적당한 곳은 아리아케(558m)와 시라다케(518m)가 있다.

우리 팀 일부 인원들은 아리아케를 비 속에서도 불구하고 유쾌히 다녀왔다.



두번째 날 대마도의 유명산, 아리아케산(558m)을 올랐다.

땀이 났지만 산등성이로 부는 태풍의 바람이 아주아주 시원하였다.

인공의 바람이 아닌 자연의 그 바람, 최고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니 운무로 가려져서 주변을 보기조차 어려웠고

태풍의 바람이 너무나도 세서 잠시도 있기가 어려웠다.

정상은 어디를 가나 바람이 세고 잠시 머무르기조차 어렵다.

우리 인생에도 최고에 오르기도 어렵지만 정상에서는 잠시 머물다가 다시 내려와야 한다.



대마도에는 아름드리 삼나무가 빽빽한데 그 삼나무의 경제적 가치는 일본 국민 전체가

2년간 먹걸이가 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산림의 보고가 바로 대마도인 것 같다.

일제 하에 한국의 좋은 산림을 황폐화 시켜놓고 자국의 산림을 지금까지도 잘 보존하는 게 얄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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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casaweb.google.com/105333288504732294048/20131007#slideshow/5937813258034270274>





대마도에서 태풍 다나스를 영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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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casaweb.google.com/105333288504732294048/03#slideshow/5937494213840387106>



가을 태풍은 귀하다고 하며 올 한해는 태풍 없이 잘 지내가는가 싶더니

10월8일(화) 오후 9시경에 태풍의 눈은 우리들의 숙소를 관통하였다.

결국 우리가 한국에서 태풍 다나스가 오는 길목에 마중을 나가서 그 중심에서 놀다온 꼴이 되어버렸지요.

태풍의 눈에서는 바람과 비가 적다는 것을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음에 태풍의 신께 감사한다.


3일째 돌아오는 날 오전에도 관광하기로 되어 있었우나 산사태와 나무가 쓰러저 도로가 훼손되어

두군데 관광이 생략되고 긴급 조치된 온천욕에 만족해하는 회원들에게 감사드린다.

귀국 배편이 어떻게 될까? 마음 조리던 일도 약간 지연 출항정도였다.

태풍이 지나간 현해탄은 한결 조용하고 순조로운 항해가 이루어졌으며 부산항이 보일때에는 환호와 안도가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을 느끼게 하였으며 다시 한번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태풍상식>



* 태풍의 종류



태 풍 -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여 아시아 동부로 불어오는 열대저기압

허리케인 - 대서양 서부에서 발생하는 열대저기압
사이클론 - 인도양, 아라비아해 및 벵골만에 발생하는 열대저기압

윌리윌리 - 오스트레일리아 북동부 해상에서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발생하는 열대저기압



* 우리나라의 역대 최악의 태풍 WORST 5는 루사, 사라, 매미, 셀마, 에위니아 인데

그중 3개의 태풍이 2000년대에 온 태풍이다. 점점 강한 태풍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환경파괴로 인한 급작스런 기후변화에 영향이 있는 것 같아 생활하면서 자연을 헤치는 것을

가급적이면 줄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 태풍의 이름을 짓는 방법

태풍 이름은 태풍의 영향을 받는 14개국에서 제출한 140개의 이름이 번갈아 붙여진다.

140개를 모두 사용하고 나면 1번부터 다시 사용된다.

남한과 북한이 각각 10개씩 이름을 제출했기 때문에 우리말 태풍 이름은 20개가 된다.

태풍이 큰 피해를 끼친 경우 그 태풍의 이름은 폐기시키고 다른 이름으로 바꾸게 된다.

2005년 일본 규슈지방에 상륙한 태풍 '나비'는 20여 명의 인명피해와 막대한 기상재해를

일으켰기 때문에 '나비'라는 태풍 명칭은 없어지고 '독수리'가 대신 들어왔다.



대마도는 우리 땅



요즘 한일관계가 극도로 경색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마도를 다녀와 느끼는 것이 많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근거는 충분히 있다.

고려 이전 시대에 대마도나 큐슈, 이키의 무역선이 고려를 왕래하면서 상인들 간의 교역이나

표류민 송환 같은 민간교류는 여러가지 흔적에서 발견이 되고 있다.

그당시 대마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절반은 살게 되면서 한자를 가르치고

우리말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중기 문종(11세기 중엽) 대에는 조공의례를 치르게 한 다음에 회답 예물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12세기 후반에는 소위 진봉선進奉船 무역이라는 것이 정착되었으며

이 진봉선을 접대하기 위해 고려는 김해에 객관을 설치하였다.



조선 초기에(태종)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는 "대마도는 조선을 주군으로 하며

그 주명을 지정받고자 합니다, 조선 조정에서 주군인을 사여해주십시오."라는 글을 보낸다.

이에 태종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게 된다.

이후 우리 영토로서의 필요성의 감소와 관리의 소홀로 다시 일본 규슈 관할로 돌아가게 된다.



세종시대에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토벌은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확실히 할 수 있는 계기였다 생각된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이하 2만여명이 5일분의 군량을 병선 227척에 나누어 싣고

거제도에서 출전하여 정벌하고는 일단 돌아왔다.

이때 잔당을 뿌리 뽑는 완전함이 없었으며 겁만 주는 소극적인 처리가 아쉬웠다.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15세기 대마도의 생활상과 토착세력 및 소오씨 일행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잘 정리 기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수직왜인受職倭人'이라 하여 조선의 벼슬을 받은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1785년 일본의 '하야시 시헤이'가 대마도와 독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한 지도를 만들고

일본정부가 이 지도의 프랑스어판을 이용하여 1862년 서양 각국으로부터

오가사와라小笠原를 일본영토로 확정짓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832년 프랑스인 클라프로토가 제작한 삼국접양지도에서도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표기되어 있으며

1865년에 제작된 미국의 일본지도, 1864년 존슨의 아시아전도, 1877년 영국지도에서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당시 대마도인들은 결사항전 했다는

의병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남아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는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첫 연두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대마도는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 시에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했다.

일본의 정치적 안정이나 막부 장군의 습직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통신사는

총원이 400~500명 규모로 260년동안 모두 12번에 결쳐 파견되었다.



또한 대마도에 묻혀있는 시신을 조사해보면 평균신장이 일본의 원주민보다 훨씬 컸다는

(원주민 155.7cm, 도래인 165.6cm) 사실은 대마도인의 선주민은 우리들의 선조였고

그 후에도 우리 민족으로 구성되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 된다.



대마도는 한국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먹고 살 수밖에 없었던 터였지만

조선시대 때에 정벌을 하고도 일본인들이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사용하고저 하는 필요성에 비해

우리나라는 해안지역 평화 유지만을 기대했던 안이한 관리로 일본의 실효 지배 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