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강(夕講)에 나아갔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위(曺偉)가 아뢰기를,
“비록 홍문관 관원이라 할지라도, 어찌 한 관직을 오랫동안 지키게 할 수 있겠는가? 유독 나이 젊고 재예 있는 자는 자주 바꿀 수 없으며, 또 나이 젊고 재예 있는 문신은 비록 다른 관직에 있더라도, 마땅히 휴가를 내려 독서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조위가 말하기를,
“지금 성균관(成均館) 관원으로 능히 교훈(敎訓)을 감당할 자는,
이문흥(李文興)·
김계행(金係行)·
반우형(潘佑亨) 3인인데,
이문흥과
김계행은 나이 장차 70입니다. 사유(師儒)로서 적당한 자가 이같이 적은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옛날
세종조(世宗朝)·
세조조(世祖朝)에는
윤상(尹祥)·
김구(金鉤)·
김말(金末)과 같은 무리가 있어서 다 능히 교훈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인재를 양성하였고, 그 뒤에도
이극기(李克基)·
유진(兪鎭)·
장계이(張繼弛)·
노자형(盧自亨) 등이 오랫동안 그 직책에 있으면서 오로지 교훈만을 일삼았습니다. 청컨대 중외(中外)의 문신(文臣)으로서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를 택하여 성균관의 직책을 제수하되, 항상 10여 인으로 하여금 장기간 관중(館中)에 있으면서 교훈토록 하소서.”
“전일에 이미 사유(師儒)를 선발하여 수록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선택하여 계문(啓聞)하게 한 연후에 조처할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