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성준(成俊)이
경상도(慶尙道)에서 돌아와서
미조항(彌助項)의 지도(地圖)를 올리고, 인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경이 가서 보니 어떠하던가?”
“미조항은 삼천진(三千鎭)에서 거리가 40여 리인데, 경작할 만한 땅은 1백 결(結)에 지나지 아니하고, 토지도 후(厚)하지 아니하며, 방어의 편리함도 없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병선(兵船) 4, 5척을 삼천진에 두고,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가서 지키게 하면 비록 미조항에 진(鎭)을 두지 아니할지라도 족히 방수(防戍)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으니, 영사(領事)
이극배(李克培)가 대답하기를,
“신도 이 땅에는 진을 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쥐나 개 같은 도둑은 족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다만 절도사(節度使)로 하여금 그 방수를 삼가게 할 뿐인데, 또 어찌하여 진을 두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이 말과 같으면 진을 두지 아니하는 것이 가하다.”
“양계(兩界)는 의 병사가 밤낮으로 항상 지키면서 삼가하여 후망(候望)하는데, 남쪽 지방은 그렇지 아니하여 낮에는 지키지 아니하고 밤에만 봉화(烽火)를 들 뿐이니, 적선(賊船)이 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청컨대 절도사에게 유시(諭示)하여 봉수(烽燧)의 법을 거듭 밝히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으니,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낮에는 번수(燔燧)하고 밤에는 거봉(擧烽)하는 것인데, 그렇지 아니하면 어떻게 적변(賊變)을 알겠습니까?
성준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병정(李秉正)이 아뢰기를,
“의주(義州) 사람이 삼진(三津)을 건너서 삼도(三島)에서 경작하니, 신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일의 의논에 3백 척과 대선(大船) 50척을 만들기로 하였는데, 벌목(伐木)하는 역사(役事)로 온 도(道)가 시끄러우니, 중국 조정에서 들으면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만약 비가 내리면 삼도(三島)가 침몰할 것이니 신은 농민이 모두 죽을까 두렵습니다.”
하자,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신도 삼도를 개간해서 경작하는 것은 진실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사간(司諫)
김종(金悰)과 지평(持平)
최호(崔浩)가 아뢰기를,
“유자광(柳子光)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로 삼았으되, 예악은 중대한 일이라, 유자광이 비록 재주는 있으나 물망이 없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게 물으니,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장악원 제조는 옛 전악(典樂)에 비할 것이 아닌데, 유자광이 어찌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
이계명(李繼命)은 광패(狂悖)하고 행실이 나쁜데 이제 정랑(正郞)에 제수되었으니, 지극히 미편합니다. 청컨대 바꾸어 정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게 물으니,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
이계명의 죄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
이계명이 죄를 받은 지 이미 오래인데 한 번의 실수로써 버릴 수 없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대사성(大司成)
성현(成俔)이 아뢰기를,
“에는 여러 학생을 가르칠 만한 사유(師儒)가 없으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사유와 전경(專經)하는 사람이 이따금 강문(講問)하는 일을 내려 주어서 권장해 힘쓰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좌우에게 물으니,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김구(金鉤)·
김말(金末) 등과 같은 이가 있어서 모두 사유(師儒)로 뽑혀 임명되었고,
정자영(鄭自英) 등도 그 직무에 오래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 일을 싫어하고 괴로와합니다. 진실로
성현의 말과 같이 사유와 전경(專經)하는 사람이 강문(講問)하는 것을 자주 내려 주면 거의 거기에 적합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을 고르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교서관(校書館)에 책지(冊紙)가 부족하니, 제가(諸家)의 은 아직 인출(印出)을 정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시독관(侍讀官)
황계옥(黃啓沃)이 아뢰기를,
“이에 앞서 제가의 사집을 자손이 고을에서 더러 개간(開刊)하였는데, 국가에서도 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 《사가집(四佳集)》은 그 수량이 지나치게 많은데, 그 인출하는 종이는 모두 백성의 힘에서 나오니, 청컨대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이 옳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235권 2장 B면
【영인본】 11책 54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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