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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성종5

碧空 2013. 10. 25. 22:25

성종 98권, 9년(1478 무술 / 명 성화(成化) 14년) 11월 30일(정해) 2번째기사
홍문관 부제학 성현 등이 임금의 정사와 학문·인재 등용 등에 관해 상소하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성현(成俔)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삼가 듣건대, 하늘은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이기(理氣)로써 만물(萬物)을 화생(化生)시켜 농사[歲功]가 이루어지고, 임금은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의 도리(道理)로써 만민(萬民)을 다스려 국가(國家)가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의 지위(地位)는 참으로 큰 것입니다. 온갖 사무(事務)의 계기로서 모든 일이 모이는 바이며, 상벌(賞罰)과 생살(生殺)의 중추로서 치란(治亂)과 존망(存亡)이 나오는 바입니다. 대체로 하늘이 대명(大命)을 내리고 지위를 준 것은 편안한 자리를 주어서 즐기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어려움을 알고서 어려움으로써 대처하게 한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알고서 어려움으로써 대처하게 한 것이 매우 마땅한 것이라면 이는 곧 크게 편안하고 크게 영광스러운 것으로서, 아름다움을 쌓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을 잘하는 자는 비록 많으나, 끝마무리를 신중(愼重)히 하는 자는 적습니다. 창업(創業)하기는 쉬우나 수성(守成)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인데, 신(臣) 등은 그 까닭을 말하려 합니다. 대체로 대업(大業)9131) 은 하루아침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백전 백승(百戰百勝)은 간난(艱難)9132) 함과 창양(搶攘)9133) 한 가운데에서 얻었으나, 오직 간활(姦猾)한 자가 그 틈을 엿볼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사에 관한 것을 널리 문의하여 민막(民瘼)9134) 을 강구(講求)하며, 아언(雅言)9135) 을 받아들이고 서무(庶務)에 근로(勤勞)해서, 나라가 이미 편안해지고 교화(敎化)가 이미 흡족(洽足)해지며, 형벌(刑罰)이 필요 없게 되고 기강(紀綱)이 확립되어, 사방의 오랑캐가 모두 판도(版圖)에 들어오며, 영웅(英雄)과 재걸(材傑)이 모두 범위(範圍)9136) 안에 있게 되면 호령(號令)을 실시함에 있어 하고 싶은대로 다스려져서 마치 털이 바람을 만나고 불이 들판에 번지는 것과 같아 막을래야 막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나면 관뉴(關紐)9137) 파돈(簸頓)9138) 하고 탁약(橐籥)9139) 을 희롱(嬉弄)하여, 동정(動靜)을 제때에 하지 않고 이장(弛張)9140) 을 절도 있게 하지 아니하며, 한 번 기뻐하고 성낸다고 해서 무엇이 손상될 것이며, 한 번 즐기고 욕심낸다고 해서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여, 넓은 집 포근한 털이불이 그 몸을 편하게 하고, 아리따운 계집의 분 바른 볼이 그 마음을 현혹시키며, 요란한 음악[管絃]이 그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구슬·비취·비단이 그 욕망을 사치스럽게 하며,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이 그 눈을 즐겁게 하고, 놀이하고 사냥함이 그 광증(狂症)을 일으켜서, 무릇 이른바 기기 음교(奇技淫巧)9141) 한 것들이 다투어 그 앞에 모이게 됩니다. 그러면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거기에 따라 맞장구쳐서 국가의 형편을 어렵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이는 마치 9층(層)의 대(臺)가 비바람에 이미 그 꼭대기가 흔들리고, 백 아름드리 나무를 좀벌레가 이미 그 가운데 구멍을 낸 것과 같아서, 그 기울어지고 썩는 것을 마침내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의(忠義)로운 선비는 그 기미를 환하게 먼저 알고서 화환(禍患)을 예방(預防)하기 위하여, 현재의 세상이 조금 편안한 듯하고 승여(乘輿)9142) 가 크게 실덕(失德)함이 없는데도 곧은 말로써 적극적으로 간(諫)하여 뇌정(雷霆)9143) 을 격동시킴은 명예(名譽)를 요함이 아니며, 조정(朝廷)을 비방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만에 하나라도 그 가운데 고황(膏肓)9144) 의 병통이 있다면 이를 치료하기 위한 것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밝은 임금이었습니다만, 가의(賈誼)가 태식(太息)의 말을 하였고9145) ,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어진 임금이었습니다만, 위징(魏徵)의 십점소(十漸疏)가 있었습니다.9146) 당시에 두 임금이 두 사람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면, 한나라당나라가 제대로 한나라당나라가 되었을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타고나신 예지(睿知)와 현명(賢明)하신 바탕으로서, 말에는 실수가 없고 행동에는 지나침이 없으시므로, 풍속(風俗)이 거의 순후(醇厚)하게 되고 이륜(彝倫)이 거의 질서가 잡혔으며,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이 거의 갖추어졌고,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이 거의 없어졌으며, 현준(賢俊)한 자가 거의 등용(登用)되고, 간사(奸邪)한 무리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니, 오제(五帝)와 삼왕(三王)9147) 의 정치(政治)와 같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거되어야 할 폐단이 다 제거되지 못하고, 종식되어야 할 해(害)가 다 종식되지 못하여 일은 마땅함에 다 부합되지 못하고, 사람은 올바름에 다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성대(聖代)에 한 가지 흠(欠)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천도(天道)는 10년이 되면 돌아오고 인사(人事)는 10년이 되면 변하며, 《주역(周易)》에서는, ‘부인(婦人)의 정(貞)은 10년이면 반드시 변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殿下)께서 즉위(卽位)하신 지 이제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근심은 늘 적은 것을 소홀하게 여기는 데에서 생기며, 마음도 점차로 습관이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한 가지 생각이 혹 차질이 있다든가 한 가지 사심(私心)이 혹 일어나게 된다면, 오늘날의 근심과 노력이 후일의 게으름이 되고, 오늘날의 공경과 검소함이 후일의 사치함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끝마무리를 잘하려면 처음부터 삼가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오직 그 덕(德)을 새롭게 하여 시종(始終) 한결같게 하라.’ 하였으며,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누구나 시작이 없는 것은 아니나, 끝마무리를 잘하는 자가 드물다.’ 하였으니, 이는 임금으로서는 마땅히 주의하여야 하는 것이며, 중재(中材)로서는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臣) 등은 삼가 치도(治道)에 대한 여덟 가지 일을 다음에 아뢰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유념(留念)하여 살펴주소서.
신 등은 삼가 듣건대, 임금의 도리를 함에 있어서는 학문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학문을 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마음의 사정(邪正)이 달려 있는 것이며, 천하의 치란(治亂)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만일 학문을 좋아하면 군자(君子)들이 기뻐하고 사모하여 그 조정(朝廷)에 벼슬하기를 희망하지만, 만약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소인(小人)들이 방자하게 굴면서 그 권세를 장악하려 할 것이니,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 성왕(聖王)은 반드시 학문에 힘을 기울여 아침에 정사(政事)를 듣고, 낮에는 대신(大臣)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정사를 가다듬습니다. 그러고도 좌우(左右)의 훌륭하고 덕(德)이 있는 선비들의 훈고(訓告)·교회(敎誨)하는 힘과 함양(涵養)·훈도(薰陶)하는 공(功)에 힘입습니다. 그래서 총명(聰明)함이 날로 열리고, 지기(志氣)가 날로 강해지며, 재기(材器)가 날로 이루어지고, 치효(治效)가 날로 드러나게 되어 나에게 있는 명덕(明德)이 날로 새로와지고, 또다시 새로와져서 자연히 자신도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고서도 혹 게으르게 될까 걱정이 되면 반우(盤盂)에 잠(箴)을 새기고9148) 궤장(几杖)에 명(銘)을 새기는데9149) , 이는 그 동용 주선(動容周旋)9150) 과 앉고 일어나고 걸어감에 있어서 정도(正道)와 정학(正學)이 아님이 없이 정사(正事)를 행하고자 함입니다. 대체로 제왕(帝王)의 학문은 위포(韋布)9151) 와 달라서, 분전(墳典)9152) 을 해박하게 아는 것이 학문이 아니며, 물상(物象)을 잘 묘사하는 것이 학문이 아니며, 기송(記誦)을 많이 하는 것이 학문이 아니며, 마름질을 잘하거나 곱게 엮는 것이 학문이 아닙니다. 오직 마땅히 성현(聖賢)의 말을 음미하여 의리(義理)의 올바름을 강구하고 고금(古今)의 변화(變化)를 관찰하여 득실(得失)의 기미를 체험해서, 그것을 자신에게 옮겨 실천(實踐)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학문에 지극한 효과가 이룩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 추향(趨向)9153) 을 분명하게 정하지 아니하고, 널리 많이만 구하려고 힘쓸 경우 고원(高遠)한 데로 쏠리게 되면 그로 해서 노불(老佛)9154) 로 흐르게 되고, 험괴(險怪)한 데로 쏠리게 되면 그로 해서 귀신(鬼神) 숭배(崇拜)로 흐르게 되고, 지교(智巧)한 데로 쏠리게 되면 그로 해서 술수(術數)로 흐르게 되고, 부조(浮躁)한 데로 쏠리게 되면 그로 해서 사부(詞賦)로 흐르게 되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는 육경(六經)을 깊이 연구하고, 치도(治道)를 연마하시어 하루 사이에 세 번 경연(經筵)에 나아가시고, 또 야대(夜對)까지 두어 늘 강관(講官)들에게서 조용히 자문을 받으시니, 학문의 정미(精微)함과 문사(文思)9155) 의 깊음은 마치 해가 바야흐로 솟아오르고 냇물이 바야흐로 이름과 같아서 그만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臣) 등은 하루의 따뜻함은 오래지 못하고, 열흘의 차가움이 쉽게 이르며, 홍곡(鴻鵠)이 급히 옮김에 따라 심지(心志)가 굳어지지 못하게 될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9156)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공경심(恭敬心)도 차츰 해이해져서, 구극(駒隙)9157) 이 빠르다고 생각하시고, 만기(萬機)9158) 가 번거로움을 싫어하게 되면, 반드시 나의 학문이 이미 풍부하고 나의 다스림이 이미 융성해졌으니,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자주 경연(經筵)을 정지하고, 정사(正士)를 드물게 대하여 한 번 안일(安逸)과 유연(遊宴)으로 흐르게 되면, 마침내 사욕(私慾)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옛날 위(衛)나라 무공(武公)은 나이 90이 넘어서도 오히려 날마다 그 신하에게 신칙해서 자기의 과실(過失)을 일깨워주게 했습니다. 그래서 절차 탁마(切瑳琢磨)의 공(功)과 도학 자수(道學自修)의 유익함에 대하여 풍아(風雅)9159) 에서 이를 읊으면서 시인(詩人)이 마침내 잊을 수 없다는 말을 하였으니, 이것은 옛 현군(賢君)이 끝마무리를 삼가한 대덕(大德)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몸소 실천하는 돈독한 행실과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효과를 실제로 체득하시고, 밤낮없이 노력하여 쉬지 않고 나아가신다면 정일 집중(精一執中)9160) 의 학문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삼가 듣건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고, 임금은 간(諫)함을 따르면 성인(聖人)이다.’ 하였고, 전(傳)에서는, ‘간하는 것은 복(福)이고, 아첨함은 적(賊)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천하(天下)의 일은 지극히 광범위하고, 군국(軍國)의 일은 지극히 중한 것이므로, 비록 밝은 임금이 이를 청단(聽斷)한다 하고, 어진 신하가 이를 모의(謀議)한다 하더라도 생각의 실수를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실수한 것을 구제하지 못하게 되면, 해(害)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충량(忠良)한 선비가 소신껏 말하여 일마다 경계해서 바로잡아야만, 일이 시행됨에 있어 어긋남이 없이 태평의 다스림을 마침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씀하시기를, ‘천자(天子)에게 간쟁(諫爭)하는 신하 7인(人)이 있으면, 비록 임금이 무도(無道)하더라도 그 천하(天下)를 잃지 아니할 것이고, 제후(諸侯)에게 간쟁하는 신하 5인이 있으면, 비록 제후가 무도하더라도 그 나라를 잃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자사(子思)가 위후(衛后)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국사(國事)는 날로 잘못되어가고 있습니다. 임금이 한마디 하고서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데, 경대부(卿大夫)가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경대부가 한마디 하고서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데, 사서인(士庶人)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제각기 훌륭하게 여기면, 여러 아랫사람이 다 함께 훌륭하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선(善)이 어디로 해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唐)·우(虞)의 시대에는 위에 요(堯) 순(舜)과 같은 임금이 있었어도 고(皐) 9161) ·기(夔)·직(稷)·설(契)의 무리가 서로서로 책난(責難)하기를 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末世)의 용렬하고 어두운 임금은 교만스럽고 괴퍅하므로, 인하여 위망(危亡)의 화근(禍根)이 즉시에 이르게 됩니다. 하(夏)나라 우(禹)임금은 바른말을 알리는 북[鼓]을 설치하고서 창성하였고, 주(周)나라 여왕(慮王)은 비방을 감독하다가 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3일간 간언(諫言)을 듣지 못하면 반드시 보좌하는 신하를 꾸짖었는데, 마침내 정관(貞觀)의 치(治)라는 효과를 이루었고, 덕종(德宗)은 간쟁(諫諍)하는 신하를 매우 미워하여 곧음을 내세워 이름을 취하는 자들이라고 하다가, 마침내 경원(涇原)의 난(亂)9162) 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간(諫)함을 따르는 자로 흥(興)하지 아니한 자가 없고, 간함을 싫어한 자로 망하지 아니한 자가 없습니다. 은(殷)나라의 본보기9163) 가 소상하게 방책(方策)에 실려 있으니, 임금이 된 이로서 간함을 들어주는 것이 옳고 간함을 거절함이 잘못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정직(正直)한 말은 항상 귀에 거슬리고 아첨하는 말은 쉽게 마음에 들게 됩니다. 진실로 그로 말미암아 사욕(私慾)에 빠져서 구부러지고 곧은 것을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마치 비유하면 사람들은 오훼(烏喙)9164) 가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즐기다가 마침내 몸을 죽이고야 마는 것과 같으니, 이 또한 매우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는 즉위(卽位)하신 이후로 바른 말 구하기를 목마른 듯이 하시고, 간(諫)함을 따르시고 거절하지 아니하시어 조신(朝臣) 중에서 어떤 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작상(爵賞)까지 주어 표창하게 명하시고, 비록 그 말이 정당하지 못하더라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죄책(罪責)을 가하지 아니하셨으니, 비록 도유 우불(都兪吁咈)9165) 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臣) 등은 삼가 사람의 마음은 반복(反覆)함이 일정하지 못하고, 성자(聖者)와 광자(狂者)가 쉽게 바뀔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편안하게 다스려진 것을 믿으시고, 차츰 마음이 해이해져서 남의 간하는 바를 많이 받아들이지 아니한다든가, 혹은 상량(商量)한다고 하면서 미적미적 결단하지 않게 되면, 청승(靑蠅)이 점점 극번(棘藩)에 이르고9166) ,백구(白駒)는 장차 공곡(空谷)으로 떠나게 될 것이니9167) , 삼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남의 말을 들음에 있어서 비록 말마다 믿고 일마다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직한 말로 고집스럽게 끊임없이 간하는 자는 자신을 위한 계책이 아니고, 모두 국가를 위한 계책인 것입니다. 만약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생각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만균(萬鈞)의 무거운 위엄을 무릅쓰고 꺾이게 될 화근을 계산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군자(君子)의 책난(責難)하는 참다운 공경을 아시고, 소인(小人)의 비위나 맞추는 간사한 술책을 깨달아 먼저 그 마음을 화평(和平)하게 하여 구부러지고 곧음을 살피시며, 사색(辭色)9168) 을 너그럽게 하여 할 말을 다 할 수 있게 해서 채택할 만한 말이면 즉시 윤허(允許)하여 따르시고, 망설이는 마음으로 선(善)을 따르는 계기를 늦추지 아니하시면, 전하께서 끝마무리를 삼가시는 것이 도리에 있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삼가 듣건대, 소인(小人)이 국가의 근심거리가 된 지는 오래 되었다고 합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나라를 세우고 집을 계승함에 있어서 소인은 쓰지 말라.’ 하였고,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덕(德) 있는 이를 후하게 대하고, 어진 이를 믿으며, 간사한 사람을 멀리 하라.’ 하였으며, 《시경(詩經)》의 소민장(小旻章)·항백장(巷伯章)에서 모두 그 실정을 극진히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자(孔子)주비(周比)·화동(和同)·교태(驕泰)9169) 의 유(類)에 있어서 관심 있게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서로 없을 수 없음은 마치 천지(天地)에 음양(陰陽)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양(陽)이 있으면 반드시 강(剛)하고, 강하면 반드시 밝으며, 음(陰)이 있으면 반드시 유(柔)하고, 유하면 반드시 어둡게 됩니다. 진실로 혹 거듭된 음이 심하게 엉키게 되면 청천 백일(靑天白日)이 매양 거기에 가려서 밝지 못하게 되는데, 이로써 역대(歷代)를 통하여 비바람으로 어두워질 때가 많고, 건곤(乾坤)9170) 이 밝게 개인 날은 적었던 것입니다. 대체로 소인의 정상(情狀)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니, 다만 임금이 분별할 수 없음이 염려될 뿐입니다. 소인들의 행동은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으로 그 얼굴을 꾸미고, 아름다운 말과 아첨하는 표정으로 그 자신을 번드르르하게 하며, 조그마한 절도(節度)와 가장된 행위로 그 세속(世俗)을 기만하고, 시세에 추창하고 급속히 날뛰는 것으로 그 능함을 내세우며, 시기하고 차마 못하는 행위로 그 어진 이를 모해하고, 교활하고 편벽된 수작으로 그 올바름을 미워하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행위로 그 진출을 도모하고, 간사하고 음흉스럽게 그 방법을 숨기는 등 천태 만상(千態萬狀)이 한결같이 영합(迎合)과 진취(進取)로 우선을 삼습니다. 그러나 오직 군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씀이 공평하고 몸가짐이 신중하며 격렬(激烈)한 논란과 사나운 행동을 하지 아니하여도 사람들은 장자(長者)의 풍도(風度)가 있음을 압니다. 의리(義理)를 따르되, 임금도 따르지 아니하는데, 더구나 권신(權臣)이겠습니까? 도(道)를 따르되 아버지도 따르지 아니하는데, 더구나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이것이 군자와 소인의 방법을 택함이 같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이 그 진위(眞僞)를 분별할 수 없어서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서로 혼동이 된다면, 천하(天下)의 일이 더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크게 간사함은 충성처럼 보이고, 큰 속임수는 믿음성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군자로서 소인의 행위를 하는 자는 백에 한둘도 없으나, 소인으로서 군자다운 자는 왕왕 있으니, 이는 더욱 깊이 분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은 대체로 어렵습니다. 구준(寇準) 9171) 처럼 어진 이도 정위(丁謂)의 간사함을 깨닫지 못하여 그 당시 이를 아는 자는 오직 이항(李沆) 한 사람뿐이었으며, 사마광(司馬光)처럼 어진 이도 왕안석(王安石)의 간사함을 알지 못하여 그 당시 이를 아는 자는 오직 여회(呂誨)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대개 이 두 사람은 글은 거짓을 꾸며대기에 충분하고, 재주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비록 밝고 지혜 있는 임금이라 하더라도 현혹(眩惑)을 당하는데, 더구나 어둡고 용렬한 임금은 자기에게 순종하여 거역하지 않는 것만을 기뻐하고, 그들을 의지하여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같이 여깁니다. 상홍양(桑弘羊) 같은 자는 심계(心計)9172) 로써 무제(武帝)를 현혹(眩惑)시켰고, 우문융(宇文融)은 정민(精敏)으로써 현종(玄宗)을 현혹시켰으며, 노기(盧杞)는 구재(口才)로써 덕종(德宗)을 현혹시켰으며, 채경(蔡京)은 간능(幹能)으로써 휘종(徽宗)을 현혹시켰고, 진회(秦檜)는 위절(僞節)로써 고종(高宗)을 현혹시켰는데, 자고(自古)로 소인이 국가를 그르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원인이 없었겠습니까? 무릇 간사한 소인의 윗사람을 무시하는 태도와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을 취하는 방법이 간책(簡策)에 갖추어 있으므로, 성상(聖上)께서 빠짐없이 통촉(洞燭)하였을 것입니다만, 다만 아랫사람이 성상의 뜻에 맞추어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지금 경연(經筵)과 조회(朝會)에서 계사(啓事)할 때에 대간(臺諫)이 법을 내세워 어떤 일을 논(論)하면서 인물(人物)을 탠핵할 경우 전하(殿下)께서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물으며 지론(至論)을 듣고자 하면, 혹 양단(兩端)을 확정짓지 못하고 화합되기를 관망하기도 하고, 혹 마음으로는 그 그름을 알면서도 어물어물 밝히지 아니하며, 혹 그 말을 가로막아 억지로 미봉책(彌縫策)을 쓰기도 합니다. 무릇 중임(重任)을 맡은 대신(大臣)으로서 보필(輔弼)할 책임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화광 동진(和光同塵)9173) 하여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니, 이러한 것은 신 등이 일찍이 마음 아파하던 것입니다. 자색(紫色)9174) 을 미워함은 주색(朱色)9175) 을 어지럽힐까 염려한 때문이며, 가라지와 피[稊稗]를 미워함은 곡식을 해칠까 염려한 때문입니다. 사람을 씀에 있어 간사함을 먼저 분간하지 못하면 임용되는 바가 반드시 현명한 자라고는 할 수 없어 어진 사람이 진출할 수 없을 것이고, 어질다고 믿었던 자도 알고 보면 반드시 간사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어 간사한 자가 반대로 진용(進用)될 것입니다. 예부터 임금으로서 간사하고 아첨한 자의 해(害)가 전대(前代)의 업적을 패망시킨 것을 누가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전철(前轍)을 되풀이하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를 들면, 곁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자는 승패(勝敗)를 알 수 있으나, 직접 두고 앉아 있는 사람은 막연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길흉 소장(吉凶消長)의 이치를 아시고, 진퇴 존망(進退存亡)의 기미를 연구하시어 밝게 사람을 살피시고, 강하게 간사함을 제거하여 용렬한 무리로 하여금 조정(朝廷)에 용납할 수 없게 한다면 국가의 복이 그 한량이 있겠습니까?
신 등은 삼가 듣건대 옛 성왕(聖王)이 세상에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것은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옳게 임용(任用)하는 데에 달렸을 뿐입니다. 어떤 것을 가지고 사람을 옳게 임용했다고 하는가 하면, 이는 안으로는 공경(公卿)·대부(大夫)·사(士)와 밖으로는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있어서 모두 그 적임자를 채용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것을 가지고 적임자를 채용했다고 하는가 하면, 그것은 어진 자가 지위(地位)에 있고, 능력자가 직임에 있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서 능력자에게 관직을 맡기는 것은 요(堯) 순(舜)같은 분도 어렵게 여겼고, 말을 듣고 행실을 관찰함에 대해서는 공자(孔子)가 경계한 바입니다. 알면서도 능히 가리지 못하면 둔한 말이 천리마에 끼인 것이고, 가리되 정밀하게 하지 못하면 가짜 돌이 진짜 옥에 섞인 것입니다. 임금이 이러한 이치를 살펴서 능력자를 옳게 임용(任用)하여 정치를 해나간다면 허리띠를 드리우고 단정히 앉아서 하는 일이 없어도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이에 반대된다면 비록 현재(賢才)가 있다고 하더라도 등용(登用)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임금이 고립(孤立)되어서 의지할 데가 없게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내 잘못이 아니라 세상에 인재(人材)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옳겠습니까? 대체로 영웅 준걸(英雄俊傑)은 없는 시대가 없습니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이들을 채용함에 있어 그 방법을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제대로 못함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는 너무 급하게 발탁해서 쓰고, 이름만 듣고 그 실제는 구하지 아니하며, 임의대로 하고 대중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데에 불과합니다. 옛날에는 의논이 결정되어야 임관(任官)을 했는데, 임관을 하고서 작위(爵位)를 주었으면, 갑작스럽게 천직(遷職)시키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같으면 덕(德)을 헤아리고, 덕이 같으면 점(占)을 하였으니, 이는 이름만을 듣고 그 실제를 구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좌우(左右)에서 모두 ‘어집니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으며, 대부(大夫)가 모두 ‘어집니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으며, 국민[國人]이 모두 ‘어집니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습니다. 반드시 참으로 어진가를 본 다음에 채용한다면, 반드시 공의(公議)를 따르게 되고, 마음에 내키는 대로 임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한 가지 일이 마땅하고 한 가지 말이 뜻에 맞는다 하여 순서를 밟지 않고서 큰 직임(職任)을 맡기게 되면, 나중에 그가 형편 없음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 뿌리를 내림이 이미 굳어지고,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져서 쉽게 내쫓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 붕우(朋友)와 대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평소에 친하게 교제하여 본말(本末)에 환해야만 그 마음가짐이 간사한가 올바른가를 알게 되는데, 더구나 임금이 신하에게 있어서는 겨우 한 차례 안색(顔色)을 대하고 한 차례 모임을 갖는 정도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채용함에 있어서는 명류(名流)9176) 중망(衆望)9177) 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무릇 명류는 덕행(德行)이 모인 바이며, 중망은 이목(耳目)이 집중된 바이니, 진실로 높이 발탁한다 하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헐뜯을 것도 없고, 칭찬할 것도 없으며, 여진 여퇴(旅進旅退)9178)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로와 업적의 선후(先後)를 헤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을 채용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자격(資格)만을 따지므로, 명류와 중망을 받는 이는 대개 묻혀서 진출하지 못하고, 여진 여퇴하는 자만이 때때로 승진이 되어서 기회를 엿보는 자는 앞을 다투어 선수를 치고, 겸손한 자는 말단에 남게 됩니다. 이는 마치 지란(芝蘭)이 녹시(菉葹)9179) 와 한 집에 있고, 소소(簫韶)9180) 상복(桑濮)9181) 과 음조(音調)를 같이 하는 격입니다. 전조(銓曹)에서도 연수(年數)에만 국한하여 비록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선비가 있다 하더라도 재능(才能)대로 주의(注擬)하지 못하니, 이것이 급암(汲黯)이 적신(積薪)의 비평을 하게 된 것9182) 이고, 풍당(馮唐)이 호수(皓首)의 탄식을 하게 된 것9183) 입니다. 전조의 책임을 맡은 자가 진실로 인아(姻婭)9184) 에게 사정(私情)을 두지 않고, 원수라도 피하지 않으며, 오직 덕(德)이 있는 이를 천거하고, 어진 이를 채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어질고 어질지 못함이 자연 구별되어서 각각 마땅하게 될 것입니다. 진(晉)나라산도(山濤)당(唐)나라최우보(崔祐甫)송(宋)나라구준(寇準)은 모두 전조(銓曹)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으므로, 그 당시에 옳은 사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이조(吏曹)도 신중하게 선택하여 위임(委任)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현능(賢能)함을 논(論)하지 않고, 한갓 훈로(勳勞)와 척완(戚琬)9185) 으로서 연수가 오래 된 것만을 가지고 갑작스레 임명한다면 약한 자는 거취(去就)에 밝지 못하고, 강한 자는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여 도리(桃李)9186) 가 사문(私門)에 빛나고, 호서(狐鼠)9187) 가 성지(城址)에 기탁하게 될 것이니, 이는 국가의 이익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의(公議)를 널리 채택하고, 물망(物望) 있는 자를 널리 방문하소서. 그 사양하며 자랑하지 않는 자는 그 뜻이 가상하고, 공손하여 자랑하지 않는 자는 그 뜻을 취할 만하며, 신중하고 말수가 없는 자는 사람을 용납하는 아량이 있으며, 청렴하고 결백한 자는 돌같이 굳은 지조가 있는 자이니, 반드시 그 덕행(德行)을 고찰해서 진출시켜 요행을 바라는 무리로 하여금 함부로 진출하지 못하게 한다면, 많은 업적이 모두 이루어져 국가가 자연 평안하게될 것입니다.
신 등은 삼가 듣건대, 우주(宇宙) 사이에는 한 가지 이치[里]뿐이라고 합니다. 하늘은 그 이치를 얻어서 하늘이 되고, 땅은 그 이치를 얻어서 땅이 되어, 무릇 천지(天地) 사이에 사는 자는 반드시 그 이치를 얻어 성품[性]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그래서 그 성품의 이치를 다 연구하여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며, 법을 만들어 세상에 드리워서 참찬 화육(參贊化育)9188) 의 성과를 이루어 한 가지 물건도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없게 한 것입니다. 불씨(佛氏)9189) 는 성인(聖人)의 도(道)가 아니고 별도로 일단(一端)이 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청정(淸淨)하여 이치에 가까운 듯하나, 그 실제를 탐구해 보면 노망(鹵莽)하여 말과 맞지 않으니, 이는 사실 정도(正道)의 잡목(雜木)이고, 이륜(彝倫)의 해충(害蟲)입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임금이나 후세의 군주들은 이를 추종하여 믿으면서 서로 금수(禽獸)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면서도 알지 못하였으니, 위(魏)나라·양(梁)나라 같은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고명(高明)하고, 학문이 순수(純粹)하여 그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의 이해(利害)에 대하여 진실로 이미 환하게 아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지난해에 축수재(祝壽齋)를 폐지하게 하시고, 금년에는 삼사(三司)에서 제공하는 물품도 없앴으며, 신 등에게는 역대(歷代)의 불교(佛敎)를 배척한 일을 써서 소장(疏章)으로 아뢰라고까지 하셨으니, 중외(中外)에서 기뻐하며 모두 불세출(不世出)의 임금으로서 무언가 크게 하실 때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대간(臺諫)의 원각사(圓覺寺)의 조라치(照剌赤), 불당(佛堂)의 조두장(澡豆匠), 낙산사(洛山寺)의 길을 옮기고 고기잡이를 금하는 것과 사사(寺社)의 세금 받는 밭에 대한 일들을 가지고 성상(聖上)을 여러 번 번거롭게 하였는데, 전교(傳敎)하시기를, ‘조종(祖宗)의 법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다.’고 하시니, 신 등은 실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법이라는 것이 현재에 써도 어긋나지 않고, 후세에 물려주어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면, 진실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혹 정치에 방해됨이 있으면 고쳐서 새롭게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선왕(先王) 때 일시(一時)의 영(令)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대전(大典)》에 오래 실린 법이 아니면 고치기에 무엇이 어려우며, 제거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신 등은 그 폐단을 진술하기를 바랍니다. 조라치(照剌赤)는 궁중(宮中)에서 소제(掃除)하는 사람이지 사사(寺社)에서 소유(所有)할 바가 아니며, 조두(澡豆)는 바로 세수하는 데에 제공되는 물건이지 중[髡首]이 쓸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지금 각사(各司)의 실무를 보아야 할 사람을 이단(異端)의 쓸모없는 무리로 충당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관부(官府)의 피폐(疲敝)함과 인물(人物)의 초췌(憔悴)함이 이로 말미암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절[寺]에서 세금을 거둠은 이것이 무슨 공(功)에 의한 것입니까? 무릇 나라에 농지(農地)가 있고, 농지에 세금을 매기는 것은 조정(朝廷)의 백관(百官)에 대한 용도를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농사짓지 않는 무리로 하여금 또다시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게 한단 말입니까? 지금 양종(兩宗)9190) 에 소속된 사사(寺社)의 밭이 무려 천여 결(結)이나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군자(軍資)에 충당시키고, 궁핍(窮乏)한 자를 진휼(賑恤)하여 준다면, 만민(萬民)의 생명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익도 없이 공름(公廩)9191) 을 소비시킴은 이보다 더 심함이 없습니다. 강원도(江原道)는 산천(山川)이 험악하고 토지가 메말라서, 여러 해 동안 풍년이 들지 못하여 사람들이 자주 굶주리게 되므로, 산중 고을에서는 여곽(藜藿)9192) 에 많이 힘입으며, 바닷가에서는 전적으로 어염(魚鹽)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풍년이 든 해라 하더라도 구학(丘壑)에 뒹굴게 됨을 면할 수 없고, 인가(人家)가 드물며, 도로(道路)가 험하고 멀어서 쓸쓸한 우역(郵驛)에 달팽이 집 같은 몇 개 부락뿐이니, 한 도(道)의 호구(戶口)를 계산해 보면 도리어 하도(下道)의 큰 고을만 못하고, 한 고을의 축적(蓄積)을 계산해 보면 도리어 하도의 부잣집만 못하여, 그 잔폐(殘弊)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낙산사(洛山寺) 때문에 도로(道路)를 구부러진 데로 옮기어 인마(人馬)로 하여금 양장(羊腸)9193) 의 괴로움을 견딜 수 없게 하며, 백성들의 고기잡이를 금하여 동해(東海)를 방생(放生)하는 못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학열(學悅)이란 중은 또 강릉(江陵)에다 논[畓]을 많이 만드는데, 비록 새로 개간(開墾)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의 옛 농토(農土)를 수탈(收奪)한 것이므로, 원근(遠近)에서 떠들썩하여 통분(痛憤)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릇 중[緇徒]은 자신이 요역(徭役)을 하지 않고 편안히 앉아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옷입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만한 것인데, 백성의 생계(生計)를 단절시켜 생활할 수 없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옛 신라(新羅)의 임금이 불교(佛敎)를 믿고 경내(境內)에서 고기잡이와 사냥을 못하도록 금하였으며, 고려(高麗) 때에는 많은 전토(田土)를 사사(寺社)에 시납(施納)하였으므로 역사에서 그것을 기록하여 후대(後代)에 웃음거리를 남겼는데, 어찌 성명(聖明)한 조정에서도 오히려 말세(末世)의 전철(前轍)을 따라야만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보다 더 심한 것도 있습니다. 대비(大比)9194) 때마다 예조 낭관(禮曹郞官)을 양종(兩宗)에 나누어 보내어 문·무과(文武科)의 예(例)에 따라 중들을 선발하고, 이조(吏曹)에서는 또 따라서 관작(官爵)을 내리고 고신(告身)을 주니, 인연(因緣)에 따라 청탁(請托)하여 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선왕(先王)의 제도(制度)에 안으로는 원녀(怨女)9195) 가 없고, 밖으로는 광부(曠夫)9196)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구[生齒]가 날로 번성하여 풍속과 교화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도 근년에 이사(尼寺)9197) 를 철거(撤去)하여 성(城) 밖으로 내보내도록 명하였습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금법(禁法)으로써 그 폐단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처녀와 과부가 머리를 깎는 일이 서로 계속되어 끊이지 않으며, 혹은 선(善)을 권장한다고 하고, 혹은 산에서 놀이한다는 핑계로 친구를 모으고 떼를 지어 중들과 섞여 있으므로, 음란하고 추악한 행위가 그 가속(家俗)을 어지럽히는 사례를 면치 못합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국가에는 이익이 없고, 백성에게는 해만 있는 것입니다. 조정(朝廷)에서 모두 그르다 하고 간관(諫官)들도 다투어 말하고 있으나, 전하께서는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그대로 둔 채 폐하지 않으시니, 신 등의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 대체로 나무를 심는 자는 반드시 검은 흙을 먼저 넣고 물을 주며, 또 가시와 잡초를 제거하여 그 사이에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은 나무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마침내 잡초에 치여서 죽게 될 것입니다. 불교를 배격하는 방법도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진실로 그 근본(根本)를 단절시키지 못한다면,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 정사를 좀먹게 하는 실마리가 없어질 때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 무리들을 시석(矢石)9198) 으로 보내면 모두 굳센 군사가 될 것이고, 전묘(田畝)9199) 에 보내면 모두 훌륭한 농부가 될 것이며, 각각 전문업(專門業)을 갖게 하면 모두 훌륭한 공장(工匠)이 될 것이고, 남녀(男女)가 서로 짝을 지어 산업(産業)을 이루게 하면 모두 양민(良民)이 될 것인데, 그대로 앉아서 의식(衣食)을 소모시키며 국정(國政)을 어지럽히니, 신 등은 그것이 옳은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그 해를 논(論)한다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어 크게 명교(名敎)에 누(累)가 되고 있으니, 만일 그 폐단을 구한다면 그들을 상인(常人)으로 만들고, 그 책을 불태우며, 그들의 사우(寺宇)를 일반인의 거처(居處)로 만들어 선왕(先王)의 도(道)를 밝혀서 인도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제함에 있어 그 힘을 다하지 아니할 경우 불교를 막지 아니하면 우리 도(道)가 펴지지 못하고, 불교가 그치지 아니하면 우리 도가 시행되지 못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 있는 정치를 행하시어 일체 엄하게 금한다면 백성들에게 또한 큰 다행이겠습니다.
신 등은 삼가 듣건대, 선왕(先王)이 천하(天下)를 다스릴 적에 이륜(彝倫)을 붙들어 도(道)로 이끌고 민의(民義)를 힘써 알맞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商)나라 풍속이 귀신(鬼神)을 좋아하면서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풍습이 비로소 생겼고, 그후 주(周)나라에 이르러 진(陳)나라에서 대희(大姬) 9200) 의 영향을 답습하여 비로소 완구(宛丘) 아래에다 음사(淫祀)9201) 를 만들어 도(翿)9202) 를 잡고 춤을 추니, 그 음탕한 풍속은 정(鄭)나라·위(衛)나라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법(法)을 창제(創制)하여 밖으로는 천지(天地)·산천(山川)·구릉(丘陵)·성황(城隍)과 안으로는 조니(祖禰)·소목(昭穆)·호조(戶竈)·문류(門霤)에 대하여 제사지내는 데에 법제가 있고, 섬기는 데에 도리가 있게 하였고, 야외(野外)의 음흉(淫凶)한 귀신을 집안으로 이끌고 왔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듣건대 좌도(左道)9203) 로써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는 용서 없이 처벌(處罰)하고, 요언(妖言)으로써 대중을 현혹시키는 자는 용서없이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 사람들은 다투어가며 귀신을 신봉하여 무릇 길흉(吉凶) 화복(禍福)에 대하여 한결같이 무당의 말만 듣고서 화상(畫像)을 그려 돈을 걸어 놓기도 하고, 영혼(靈魂)을 맞이하여 집안에 들이기도 하며, 공창(空唱)9204) 을 듣기도 하고, 직접 성황(城隍)에 제사도 지내며, 노비(奴婢)를 시납(施納)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성조(聖朝)에서 금하는 바로서 《속전(續典)》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폐단을 깊이 아시고, 또 법사(法司)로 하여금 무당을 모두 찾아내어 성(城) 밖으로 내쫓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건대 금하는 법령이 차츰 해이해져서 성 밖으로부터 점점 다시 들어와 부인(婦人)들을 유혹시켜 주식(酒食)을 소비시키면서 혹은 액(厄)을 물리친다 하고, 혹은 병을 구제한다 하니, 비록 대가(大家)와 거실(巨室)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초치(招致)하여 다투어가며 저속한 행위를 하면서도 예사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데, 한 사람이라도 이로 인하여 죄를 받았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북 치고 피리 불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길거리나 저자 사이에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신 등이 의혹을 품는 바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몸소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 가르치면 다투게 되며, 명령하는 바가 좋아하는 바에 반대되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성수청(星宿廳)을 아직도 성(城) 안에 두고, 기은사(祈恩使)9205) 가 봄·가을로 끊이지 않으니, 이렇게 하면서 백성만 못하게 한다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이 일찍이 기은사(祈恩使)의 행렬(行列)을 보건대 경도(京都)에서 개성(開城)까지, 개성에서 적성(積城)·양주(楊州)의 경계(境界)에 이르기까지 말을 탄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하고, 그 동복(僮僕)과 치중(輜重)9206) 은 배가 되는데, 혹은 가고, 혹은 머물면서 머뭇거리고 떠나지 않으면 수령(守令)들이 국궁(鞠躬)하고 숨을 죽이며 오직 은근하게 맞이하여 혹은 음식물을 후하게 주고, 혹은 뇌물을 주면서 만에 하나라도 견책(譴責)을 당할까 하여 비록 절하고 무릎 꿇는 것도 거절할 수 없게 되었으니, 폐단의 큼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성수청(星宿廳) 같은 것은 어떤 귀신이며 어떤 제사입니까? 귀신도 분명한 귀신이 아니고, 제사도 올바른 제사가 아니니, 이 또한 왕정(王政)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정당한 귀신이 아닌 것을 제사함은 아첨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하늘에게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공경하지 아니하면 무람해지고, 멀리하지 아니하면 친압하게 되며, 제사지낼 것이 아닌 것을 제사하면 모독이 되고, 빌 것이 아닌 것을 빌면 아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중려(重黎) 9207) 가 무당을 좋아하다가 그 집이 무사(巫史)가 되었으며,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귀신에게 현혹되어 마침내 무고(巫蠱)의 난(亂)9208) 이 있었으니, 이는 밝은 본보기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 있는 정치를 행하시어 풍속을 정돈해서 간사스럽고 음란하고 요망한 것들로 하여금 성명(聖明)의 아래에서는 용납되지 않게 하소서. 이 또한 신 등의 소망입니다.
신 등은 삼가 듣건대 예의염치(禮義廉恥) 이것을 사유(四維)라 하는데, 이 사유가 지켜지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라면 이 네 가지를 버려두고서는 정치를 할 수 없었으니, 마땅히 관자(管子)가 그것을 말하여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도왔고, 가의(賈誼)가 그것을 취하여 한(漢)나라 문제(文帝)를 깨우치게 한 것입니다. 아! 세상의 도의(道義)는 날로 낮아지고, 인심(人心)은 옛날 같지 아니합니다. 옛날의 선비는 공손하였는데 지금의 선비는 방탕하며, 옛날의 선비는 청렴하였는데 지금의 선비는 탐욕스러우며, 옛날의 선비는 정직하였는데 지금의 선비는 간사하여 소위 예의(禮義)니 염치(廉恥)니 하는 것이 여지 없이 폐지되어 사람들이 지킬 바를 알지 못합니다. 선비의 기풍이 이미 아름답지 못한데 민속(民俗)이 어떻게 순박할 수 있겠으며, 민속이 순박하지 못한데 조정이 어떻게 존중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현재 눈으로 보는 폐단을 가지고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우서(虞書)9209) 에 이르기를, ‘백료(百僚)가 서로 스승으로 여기며, 군후(群后)들은 덕(德)으로 양보한다.’ 하였고, 문왕(文王)이 기산(岐山)에서 정치를 할 때, 선비는 대부(大夫)에게 양보하고, 대부는 공경(公卿)에게 양보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여 후진(後進)이 선배(先輩)를 멸시(蔑視)하고, 하료(下僚)가 좌상(座上)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선배와 좌상이 된 자도 엄격하게 아랫사람을 통솔하지 못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대간(臺諫)이 어떤 사람의 과실(過失)을 논(論)하면, 그 사람이 스스로 허물을 반성하지는 않고,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나에게 혐의가 있어서 시끄럽게 고알(告訐)한다.’ 하면서, 반드시 서로 배격(排擊)하고 있으니, 이른바 예의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군신(君臣)의 분수는 마땅히 조회(朝會)할 때에 엄격해야 하는데, 요즈음의 백료(百僚)들은 전정(殿庭)에 출입할 때 추창(趨蹌)하지 않으며, 반열(班列)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고,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맞대고서 속삭임을 멈추지 않으며, 심지어는 의관(衣冠)·환패(環佩)나 진퇴(進退)·부복(俯伏)함에 있어서 공근(恭謹)하고 정숙(整肅)한 태도가 없으니, 이른바 예의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요구함이 있으나,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요구함이 없으며, 위에서 시키는 바가 있으면 아래에서 그 수고로움을 거절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분경(奔競)9210) 을 업(業)으로 삼고, 기회를 노리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혹은 친척에게 의지하고, 혹은 고향 사람이라고 하여 사명(使命) 구하기를 벼슬 구함보다 더 심하게 하며,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경영하고 청탁함에 있어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일이 없으며, 이익이 없는 곳이라면 온갖 방법으로 반드시 모면하려고 하니, 이른바 예의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대체로 재상(宰相)이나 대신(大臣)은 임금이 의지하는 바이며, 온 나라에서 사모하는 존재이니, 그 책임이 진실로 가볍지가 않습니다. 옛날에는 재상의 첩(妾)이 비단옷을 입지 못하고, 말에게 곡식을 먹이지 못하는 자도 있었고, 아욱[葵]을 뽑아 버리고 베틀을 제거하여9211)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아니하는 자도 있었으며, 남의 돈을 받지 않고 청백함을 잠(箴)으로 남긴 자도 있습니다. 우리 조종조(祖宗朝)에 있어서도 조신(朝臣)이 축재(畜財)를 하지 않고, 재상(宰相)은 이익을 말하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 욕심대로 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탐욕이 풍조를 이루었고, 이익에 만족함이 없어 대신(大臣)으로서 농단(隴斷)의 이익을 설치하고9212) , 삼공(三公)으로서 수령(守令)의 행차를 전송합니다. 그래서 선물[苞苴]이 백주(白晝)에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뇌물이 권문(權門)에 몰려 들어 녹봉(祿俸)을 구하여 명예(名譽)를 사려는 행위를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곤궁(困窮)하게 시골에 있던 자라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요직(要職)에 앉게 되면 밭이 천맥(阡陌)을 연하고, 재물이 거만(巨萬)이나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재물을 늘린 자는 성인(聖人)이라 하고, 가난하면서도 편하게 여기는 자는 능제하기도 바쁜 처지인데, 어느 여가에 쓰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나라는 예부터 문헌(文獻)으로 알려진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대(事大)·교린(交隣)함에 있어서 반드시 사조(詞藻)9213) 의 문채에 힘입었으니 문장을 경시(輕示)할 수 없음이 이러한데, 어느 한 사람 근유(瑾瑜)9214) 을 품고서 국가의 위대함을 선양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오늘날 한스러운 것입니다. 이상은 모두 큰 문제로서 마땅히 먼저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음률(音律) 같은 것은 귀신과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 것인데, 아악(雅樂)과 속악(俗樂)이 모두 그 차례를 잃었으며, 역학(譯學)은 중국과 교통(交通)하는 것인데, 이문(吏文)이나 한어(漢語)에 대해서는 정통(精通)한 자를 보기가 드물어 의사(醫士)에게 완전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고, 상관(象官)9215) 칠정(七政)9216) 의 궤도에 밝지 못하니, 태평 시대의 문학을 지키는 세상이라 하면서 제도가 이렇게 미비(未備)할 수가 있습니까? 신 등이 일찍이 그 폐단을 연구해 보건대 반드시 까닭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무능한 자는 덕(德) 있는 자라 이르고, 재주가 많은 자는 도(道)에 위배된다 하며, 육경(六經)에 통달하면 오활(汚闊)9217) 하여 임용(任用)하기 어렵다 하고, 문학(文學)이 풍부하면 부과(浮誇)9218) 해서 진실하지 못하다고 하니, 학문에 있어서도 이러한데 더구나 잡술(雜術)이겠습니까? 그래서 재예(才藝)에 구애를 받아 드러나게 발탁되지 못하고, 높은 지위를 지낸 제배(諸輩)에게 서로 조소(嘲笑)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종사하는 학업(學業)을 마치 진질(疹疾)9219) 처럼 괴롭게 여깁니다. 그러니 인재가 날로 줄어드는데 대해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세종(世宗) 때에는 경학(經學)으로는 황현(黃鉉)·윤상(尹祥)·김구(金鉤) 등이 있었고, 역학(譯學)으로는 김하(金何)·이변(李邊) 등이 있었으며, 이문(吏文)으로는 김청(金聽), 음악(音樂)으로는 박연(朴堧) 등이 있었으며, 그 밖에 조그마한 재능과 천술(賤術)에 있어서도, 각각 그 적격자가 있었으므로, 그 위의(威儀)와 문물(文物)의 성대(盛大)함을 지금까지도 정치하는 데 힘입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학교를 중하게 여기시고, 스승을 높이 받들며, 잡예(雜藝)에 있어서도 권장하고 유도하여 그 뜻을 이끌어가면, 선비로서 분수 안에 일을 누가 즐겨 종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면 비록 날마다 매를 때리고, 달마다 벌을 준다 하더라도 어찌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 등은 또 듣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끝마무리를 신중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끝마무리를 신중히 하는 요점은 또 그 마음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합니다. 대체로 마음이 사람에게 붙여 있음은 지극히 은미(隱微)하고 지극히 큰 것으로서, 방촌(方寸)9220) 으로 말미암아 만리(萬理)를 포괄(抱括)할 수 있으며, 일념(一念)으로 말미암아 만사(萬事)를 발견(發見)할 수 있으므로, 그 마음을 잡아두기는 매우 어렵고, 놓아버리기는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심(私心)을 이기고, 욕심(慾心)을 버려서 선(善)을 밝혀 본연(本然)의 것을 되찾아야만 이 마음을 보존할 수 있고, 몸이 편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이라도 그 공부를 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더구나 한 사람의 몸으로 만민(萬民)에게 임(臨)하는 자이겠습니까? 대체로 임금은 깊은 궁중(宮中)에서 생활하므로, 그 마음의 사정(邪正)을 규찰(窺察)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험(符驗)9221) 이 외부(外部)에 나타남은 항상 여러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여러 사람이 보는 바와 같아서 끝내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 철왕(哲王)들은 삼가고 두려워하며 경계심(儆戒心)을 가지고 마음을 지켜가기를 마치 신명(神明)을 대하거나 깊은 골짜기에 임한 듯이 하여 경(敬)으로써 지키고, 성(誠)으로써 임하여 감히 엎어지고 자빠지는 순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근간에 추위와 더위가 순서를 잃음으로 인하여 자책(自責)하심을 하교(下敎)하시고, 또 백료(百僚)로 하여금 각자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게 하셨으니, 이는 사실 대단히 조심하고 삼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진실로 바르면 억울하고 그릇된 것이 모두 상달(上達)되어서 형옥(刑獄)이 넘치지 않고, 조정(朝廷)의 만사(萬事)가 올바른 데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실로 바르지 못하면 사람의 사정(邪正)을 분변할 수 없고, 일의 시비(是非)를 알 수 없어 조정의 만사가 하나라도 올바른 데에서 나올 수가 없어서 어지럽게 진소(陳訴)하는 자가 죄과를 모면하기 위하여 성상(聖上)의 총명(聰明)을 현혹시키려 하는 데에 불과할 것입니다. 옛날 태무(太戊)가 상곡(桑穀)에 대해서9222) 고종(高宗)이 구치(雊雉)에 대해서9223) 송(宋)나라 경공(景公)이 형혹(熒惑)에 대해서9224) 모두 마음을 바로잡고, 덕(德)을 닦아 재앙(災殃)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정심(正心)으로써 끝마무리를 신중히 하는 근본을 삼으시고, 성경(誠敬)으로써 마음을 바로잡는 근본을 삼아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곳에서도 삼가하시고, 옥루(屋漏)9225) 에 혼자 있을 때에도 시종(始終) 한결같이 하셔서 조금이라도 단절됨이 없게 하시면, 천지(天地)와 함께 위치(位置)할 수 있으며, 만물(萬物)이 잘 생육(生育)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는 사실 우리 나라 만세(萬世)의 무궁한 복(福)입니다.”
하였다. 상소(上疏)가 들어가자, 명하여 승지(承旨) 등에게 보여주게 하고 말하기를,
“그 가운데 ‘공경함이 차츰 해이해집니다.’라고 한 것은 반드시 본 바가 있어서 한 말일 것인데, 내가 해이해졌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경(卿) 등은 각각 숨김 없이 말하도록 하라. 내가 요즈음 며칠간 경연(經筵)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아무 까닭 없이 정지한 것이 아니고 몸이 약간 불편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하니, 승지 등이 대답하기를,
“홍문관(弘文館)에서는 전하께서 그 당시 공경함이 해이해졌다 하여 그러한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전하께서 후일(後日)에 혹 게으르게 될까 염려하여 더욱 전하의 마음을 굳히기 위한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나의 병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내일은 조하(朝賀)를 받고 경연에 나아갈 것이니, 그렇게 알라. 또 내일은 홍문관에서 합사(合司)하여 오도록 부를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98권 21장 B면
【영인본】 9책 669면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과학-천기(天氣) / *과학-지학(地學) / *정론-간쟁(諫諍)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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