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조위(曺偉)가 아뢰기를,
“
이계동(李季仝)이 처음에 불경(不敬)의 죄를 지었으니 그것이 방면(放免)된 것만해도 다행한 일인데, 또 직첩(職牒)을 주고 조금 후에 즉시 다시 임용하게 되니,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징계된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성명(成命)을 빨리 회수(回收)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그가 허물을 고쳤다면 어찌 오래 되기를 기다리겠는가?
이계동은 재주가 있어 임용할 만하니, 버릴 수는 없다.”
하였다. 조위가 아뢰기를,
“재주는 있어도 행실이 없으면 장차 그들 어디에 임용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이계동은 그 때에 술에 취해 있었을 뿐이다.”
하였다. 조위가 아뢰기를,
“술에 취하여 의식(意識)을 잃어서 인사(人事)를 차라지 못할 정도라면 어찌 과일을 던져 기생(妓生)에게 수작(酬酌)하였겠습니까? 재주는 비록 임용할 만하더라도 행실이 나쁨이 이와 같으니, 임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정언(正言)
박경(朴璟)이 중시(重試)와 를 정지하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좌우(左右)의 신하를 돌아보고 물으니, 영사(領事)
홍응(洪應)이 대답하기를,
“지금 이미 와 와 에서 선비를 뽑은 지 겨우 두서너 달을 걸렀는데, 지금 또 선비를 뽑는다면 다만 너무 자주할 뿐 아니라 유생(儒生)들로 하여금 만 교묘하게 꾸며서 도리어 을 버리도록 할 뿐입니다. 옛날에 선비를 뽑을 적에는 사람들이 반드시 칭찬을 늘어 놓기를, ‘아무 사람은 아무 재주에 능하다.’고 했는데도 지금은 그런 소문(所聞)이 없으니, 어찌 과거(科擧)가 너무 잦아서 본업(本業)을 폐기(廢棄)하여 실재(實才)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중시(重試)는 더욱 적당하지 못하니, 이미 과거(科擧)에서 출신(出身)했는데 어찌 다시 중시(重試)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事大之邦]이므로 문예(文藝)는 진실로 뒷전으로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문신(文臣)이 겨우 과거(科擧)의 명성을 얻게 되자 그 은 버리게 되니, 옳지 못한 일이다. 내가 뜻밖에 만들어서 문예(文藝)를 시험하려고 한다면 사람들이 장차 스스로 힘을 쓸 것이다. 하물며 무재(武才)와 같은 경우는 연습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연습하지 않는다면 폐공(廢工)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무재(武才)만 연습하고 문예(文藝)를 배워 익히지 않으면 되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이런 행사(行事)를 만들어 인재(人才)를 격려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하니, 조위가 아뢰기를,
“당(唐)나라는 굉사과(宏詞科)로써 선비를 뽑았는데도 또 로써 시험하여 문사(文士)를 가려 뽑아 중서(中書)와 로 삼았으니, 지금도 만약 중시(重試)를 시행한다면 마땅히 다시 시험보는 법을 정해야 할 것이며, 초시(初試)와 더불어 이를 같이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지제교(知製敎)의 임무도 또한 중요하므로, 예전에는 승지(承旨) 등이 또한 이를 겸무(兼務)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박경(朴璟)과 시독관(侍讀官)
김흔(金訢)은 아뢰기를,
“근년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게 되니, 청컨대 를 정지시켜 하늘의 경계에 근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루어진 명령은 회수(回收)할 수가 없다.”
하였다. 동지사(同知事)
이극기(李克基)가 아뢰기를,
“근일에 유생(儒生)들이 시(詩)를 지어서 사장(師長)을 업신여기고 있으니, 이는 실제로 윗사람을 능멸(凌蔑)하는 기풍(氣風)이므로 마땅히 엄하게 징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추문(推問)하여도 근거가 없으니, 이는 비록 유생들의 경박하고 나쁜 행위이지마는, 또한 사장(師長)이 인망(人望)에 만족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신(臣)이 옛날에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적에는
김구(金鉤)와
윤상(尹祥)이 사장(師長)이 되었는데, 그 당시의 유생(儒生)들이 우러러 섬기면서 마음속으로 복종하고 있었으니, 어찌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조위가 아뢰기를,
“
이극기(李克基)의 말이 지당(至當)합니다. 유생(儒生)들이 비록 광망(狂妄)하지마는, 그러나 그 뜻이 고상(高尙)하니 위력(威力)으로써 복종시킬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재주와 덕망이 있은 연후에야 진정(鎭定)하여 복종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비방한 시(詩)에 관한 일은
하형산(河荊山)이 먼저 말을 꺼내었는데,
하형산은 성품이 본디부터 단정(端正)하지 못했으므로, 익명서(匿名書)를 보고 몇 달 후에 전송(傳誦)하여 실제로 얽히고 설키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끝까지 추문(推問)하려고 했지마는, 그러나 어찌 모두가 시(詩)를 지었다고 해서 형벌을 받겠는가? 애매(曖昧)한 점이 없지 않은 까닭으로 이를 버려두었을 뿐이다.”
“
이승언(李承彦)은 사족(士族)의 부녀(婦女)를 간통했으니, 마땅히 과거(科擧)를 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의 좌우의 신하를 돌아보고 물으니,
이극기(李克基)가 대답하기를,
“
어우동(於于同)은 행실이 창기(娼妓)와 같았으므로,
이승언이 우연히 간통했던 것이니, 그가 사족(士族)인 것을 알지 못했음은 의심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
이승언(李承彦)이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실제로 알 수가 없지마는, 그러나 이 일로써 종신(終身)토록 폐기(廢棄)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하니, 조위가 아뢰기를,
“
이승언은 생원과(生員科)에 장원(壯元)을 했으며, 또 활을 잘 쏘고 또 음률(音律)도 잘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은 임용할 만합니다. 또 알지 못하고서 이를 간통했으니, 정실(情實)이 용서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2책 146권 15장 B면
【영인본】 10책 396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인사-선발(選拔) / *농업-농작(農作) / *신분-양반(兩班)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