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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21
碧空
2013. 10. 23.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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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군(魯山君)이 백포(白袍)·오서대(烏犀帶)·소의장(素儀杖)으로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악차(帷次)에 들어갔다. 명나라 사신 김유(金宥)·김흥(金興) 등이 사현(沙峴)에 이르자, 노산군이 아청 곤룡포(鴉靑袞龍袍)·익선관(翼善冠)·홍정옥대(紅鞓玉帶)·흑화(黑靴)·길의장(吉儀仗)으로 나와 맞았다. 김유 등이 사현 기슭에 이르러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서 영조문(迎詔門)에 이르렀다. 조칙(詔勅)·시고(諡誥)·제문(祭文)을 용정(龍亭)에 안치하고 종친과 문무 백관이 조복을 갖추고 몸을 굽혔다. 노산이 백관을 거느리고 먼저 가고 다음은 황의장 고취(皇儀仗鼓吹), 다음은 향정(香亭), 다음은 용정(龍亭), 다음은 면복 채폐궤(冕服綵幣樻)가 따랐다. 시고·제문 용정은 태평관(太平館)으로 들어가고, 노산군은 먼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 이르러, 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섰다. 조칙(詔勅)·고명(誥命)·용정(龍亭)은 정문(正門)으로 들어가고 김유 등은 광화문(光化門) 밖에서 말에 내려 동쪽 협문(俠門)을 지나서 들어갔다. 노산군이 몸을 굽히고, 김유 등은 조칙·고명·면복(冕服)·채폐(綵幣)를 받들어 각각 안(案)에 놓는다. 노산군이 노대(露臺) 위에 절하는 자리[拜位]에 나아가서 백관을 거느리고 사배(四拜)를 행하고, 서쪽 계단으로 올라와서 수조위(受詔位)에 나아갔다. 김유 등이 조칙을 받들어 노산군에게 주니, 노산군이 동쪽을 향해 꿇어앉아 받아서 근시(近侍)에게 주고, 부복(俯伏)해 머리를 조아렸다. 내려와서 악차(幄次)에 나아가서, 지금 하사한 곤면 구장복(袞冕九章服)으로 갈아입고, 도로 노대 위에 나아가서 네 번 절하고 꿇어앉아, 문무 백관도 또한 네 번 절하고 꿇어앉았다. 선조관(宣詔官)이 올라서 월대(月臺)에 나아가 동쪽을 향해 조서(詔書)를 읽기를 마치자 노산군(魯山君)이 백관을 거느리고 네 번 절하며 산호(山呼)643) 하고, 또 네 번 절하기를 마치고 다시 악차(幄次)로 나아갔다. 김유 등이 소차(小次)로 나오자 노산군이 면복(冕服)을 벗고, 백포(白袍)·오서대(烏犀帶)·익선관(翼善冠)으로 김유 등을 근정문(勤政門) 안에서 전송하였다. 빈(殯)이 사정전(思政殿)에 있기 때문에 전(殿)에 올라 다례(茶禮)644) 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 조서는 이러하였다.
“짐(朕)이 공손히 천명(天命)을 받아 만방(萬邦)을 주재(主宰)하고 제후(諸侯)를 봉건(封建)하니 멀고 가까운 곳이 오직 하나이다. 이는 국가의 대전(大典)이며 조종(祖宗)의 이룩한 법이다. 하물며 조선국은 예(禮)를 지키는 나라이니, 그 백성을 통솔함에 어찌 군장(君長)이 없으랴? 고(故) 국왕【성휘(姓諱).】은 선대(先代)의 벼슬을 이어 받아, 하늘을 섬기고 대국을 섬기기를 시종(始終)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고 능히 경(敬)하고 능히 인(仁)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함께 칭찬하였다. 이제 훙서(薨逝)함에 미쳐 마땅히 후계(後繼)가 있어야 한다. 세자【휘(諱).】는 왕의 적장(嫡長)으로 성품이 충효(忠孝)하여 국론(國論)이 일치하니 이제 내관(內官) 김유·김흥을 보내어 칙서(勅書)를 가지고 가서 조선 국왕으로 봉(封)하여 이어서 국사(國事)를 주장하게 하니, 무릇 너희 나라 대소 신민(大小臣民)은 밤낮으로 오직 공경하여 마음을 다해 도와서 예분(禮分)에 따르기를 힘쓰고 혹시라도 참람(僭濫)함이 없게 하며, 길이 충순(忠順)한 마음을 굳게 하여 영구히 태평한 복을 누리도록 하라.”
그 칙서는 이러하였다.
“너의 부왕(父王)【휘(諱).】이 금년 5월 14일에 훙서(薨逝)했다는 주본(奏本)을 받고 짐(朕)이 깊이 슬퍼한다. 이에 내시(內侍) 김유·김흥을 보내어 글을 가지고 너희 나라에 가서 제문(祭文)과 조서(詔書)로 너희 나라 사람에게 유시(諭示)하고 너【휘(諱).】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아 네 아버지를 이어 나라 일을 주장하게 하니, 너는 마땅히 삼가 신절(臣節)645) 을 지키고 더욱 사대(事大)의 정성을 굳게 하여 길이 번방(藩邦)을 튼튼히 하면 거의 선왕(先王)을 잇는 뜻을 이룰 것이니 공경하며 힘쓰라. 그러므로 유시(諭示)하고 관복(冠服)과 예물을 하사한다. 구장 면복(九章冕服) 1부(副), 구류 조추사 평천관(九旒早皺紗平天冠) 1정(頂)【옥형(玉珩)·유주(琉珠)·금사건(金事件)·선도(線絛)·전부[全].】, 구장 견지사 곤복(九章絹地紗袞服) 1투(套) 계(計) 7건(件), 심청 장화 곤복(深靑粧花袞服) 1건, 백소 중단(白素中單) 1건, 훈색 장화 전후상(纁色粧花前後裳) 1건, 훈색 장화 폐슬(纁色粧花蔽膝) 1건【옥구선도(玉鉤線絛) 전부[全].】, 훈색 장화 금수(纁色粧花錦綬) 1건, 훈색 장화 패대(纁色粧花佩帶) 1부(副)【금구(金鉤)·옥정당(玉玎璫) 전부[全].】, 홍백소 대대(紅白素大帶) 1도(絛)【청선조도(靑線組絛) 전부[全].】, 옥규(玉圭) 1지(枝)【대(袋) 전부[全].】, 대홍소 저사석(大紅素紵絲舃) 1쌍(雙)【말(襪) 전부[全].】, 대홍평라 소금운룡 협포복(大紅平羅銷金雲龍夾包袱) 3조(條), 주홍 법복갑(朱紅法服匣) 1좌(座)【호갑(護匣) 전부[全].】, 저사(紵絲) 4필(匹), 직금 흉배 기린(織金胸背麒麟) 2필, 내대홍(內大紅) 1필, 심청(深靑) 1필, 암화 골타운(暗花骨朶雲) 2필, 내심청(內深靑) 1필, 흑록(黑綠) 1필, 나(羅) 4필, 직금 흉배 기린(織金胸背麒麟) 2필, 내대홍(內大紅) 1필, 흑록(黑綠) 1필, 소(素) 2필, 내심청(內深靑) 1필, 흑록 1필, 백모사포(白氁絲布) 10필이다.”
그 고명(誥命)은 이러하였다.
“국가에서 사해(四海)를 모두 점유(占有)하여 화·이(華夷)의 군주(君主)가 되어 일시동인(一視同仁)646) 하며 멀고 가까움에 사이가 없다. 덕이 있는 이를 명하여 한 지방의 책임을 맡기고 여러 어진 이를 높여서 누대(累代)의 습작(襲爵)을 주었다. 이로써 민중(民衆)의 마음을 묶고 다스려 편안한 데 이르게 하는 바이다. 고(故) 조선 국왕 【성휘(姓諱).】은 단정하고 무게가 있으며 겸온(謙溫)하고 총명(聰明)하고 근검(勤儉)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상국[上]을 섬기기를 시종(始終)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여 부왕(父王)을 도운 것이 이미 몇 해가 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믿어 순종하지 아니함이 없고 공손히 조명(朝命)647) 을 받아 잠시라도 어기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그 선왕의 어진 자손이었다. 어찌하여 향국(享國)648) 한 지 얼마 아니 되어 갑자기 고종(告終)649) 을 아뢰는가? 응당히 계승자(繼承者)가 있어서 그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 너【휘.】는 이【휘.】의 적자(嫡子)로서 이미 어질고 또 장성하니 전하여 이음이 오직 마땅하므로 이에 특별히 봉하여 조선 국왕을 삼는다. 아아! 오직 공경(恭敬)하여야 사대(事大)를 할 수 있고 오직 어질어야 민중을 무휼(撫恤)할 수 있으며, 오직 경토(境土)를 보호하여야 나라를 편히 할 것이고, 오직 순정(順正)650) 하여야 복을 누릴 수 있다. 오직 너의 할아버지와 너의 아버지의 행실을 따르면 거의 조정에서의 어진 이를 권장하는 뜻을 맞출 것이니, 가서 공경히 힘쓰고 짐의 훈계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이다.”
이를 마치고 노산군이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면복(冕服) 차림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시고(諡誥)와 부물(賻物)에 배례하고 다시 소복(素服) 차림으로 들어와서 김유(金宥) 등과 재배(再拜)하였다. 김유 등이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노산에게 남향(南向)해 서기를 청하여 사례(私禮)를 행하고자 하니, 노산군이 사양하였다. 김유 등이 동남(東南)쪽의 모퉁이에 서서 서북(西北)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손으로 교의(交倚)를 잡아 남쪽 가까이 옮겨 놓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토의 백성이나 곧 전하의 가노인데 어찌 감히 마주앉겠습니까?”
하니, 노산군이 말하기를,
“이제 대인(大人)이 명을 받들고 왔으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전에 윤(尹)·정(鄭) 두 대인도 또한 마주앉았었다.”
하였다. 김유 등이 말하기를,
“윤(尹)·정(鄭)은 그것이 예(禮)이고, 우리들은 또한 이것이 예입니다.”
하니, 이에 노산의 교의(交倚)를 북쪽 가까이 옮기고 김유 등의 교의를 남쪽 가까이 옮겨 놓고 앉아서 다례(茶禮)를 행하기를 마치고 얼마 후에 잔치를 베풀고 환궁(還宮)하였다.
교서(敎書)를 내려 경내(境內) 〈죄인을〉 사유(赦宥)하였다. 교서는 이러하였다.
“일은 처음을 바르게 하는[正始]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정사(政事)는 인(仁)을 베푸는 데 급급히 함이 마땅하다. 내가 어린 몸으로서 대위(大位)를 권수(權守)하여 오로지 짊어진 짐의 중대함을 생각하고, 밤낮으로 감히 편할 겨를이 없었다. 경태(景泰) 3년651) 윤9월 17일에 공경히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으니, 이르기를, ‘국가에서 사해(四海)를 모두 점유하여 화·이(華夷)의 군주가 되어 일시동인(一視同仁)하고 멀고 가까움에 사이가 없었다. 덕 있는 이를 명하여 한 지방의 책임을 맡기고 어진이를 높여서 누대(累代)의 습작(襲爵)을 주었다. 이로써 민중의 마음을 묶어 다스려 편안한 데 이르게 하는 바이다. 고(故) 조선 국왕 【성휘(姓諱).】은 단정하고 무게가 있으며 겸온(謙溫)하고 총명(聰明)하고 근검(勤儉)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상국[上]을 섬기기를 시종 한결같이 정성(精誠)으로 하고 부왕(父王)을 도와 이미 몇 해가 되었는데 국민이 믿어 순종하지 아니함이 없고 공손히 조명(朝命)을 받아 잠시도 어김이 없었다. 대저 그 선왕(先王)의 어진 자손이었다. 어찌하여 향국(享國)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갑자기 고종(告終)을 아뢰는가? 응당 계승자가 있어서 그 민중을 통치해야 한다. 너【휘.】는 이【휘.】의 적자(嫡子)로서 이미 어질고 또 장성하니 전하여 이음이 오직 마땅하다. 이에 특별히 봉하여 조선 국왕을 삼는다. 아아! 오직 공경(恭敬)하여야 사대(事大)를 할 수 있고 오직 어질어야 민중을 어루만질 수 있으며, 오직 국경을 보호하여야 나라를 편히 할 것이고, 오직 순정(順正)하여야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행실을 따르면 거의 조정에서의 어진 이를 권장하는 뜻을 맞출 것이다. 가서 공경히 힘쓰고 짐의 훈계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이다.’ 하고, 조(詔)에는 이르기를, ‘짐이 공손히 천명(天命)을 받아 만방(萬邦)을 주재(主宰)하고 제후(諸侯)를 봉건(封建)하여 멀고 가까운 곳이 하나로 뭉치니, 이는 국가의 대전(大典)이며 조종(祖宗)의 이룩한 법이다. 하물며 조선국은 예(禮)를 지키는 나라인데 그 백성을 통솔하는 데 어찌 군장(君長)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고(故) 국왕【성휘(姓諱).】은 선대(先代)의 벼슬을 이어받아 하늘을 섬기고 사대(事大)하는 데 정성이 시종여일하였고 능히 공경(恭敬)하고 어질어서 멀고 가까운 곳에서 함께 칭찬하였다. 이제 훙서(薨逝)함을 당하여 마땅히 뒤를 이음이 있어야 한다. 세자【휘.】는 왕의 적장(嫡長)으로서 성품이 충효(忠孝)하고 국론(國論)이 일치하므로 이제 내관(內官) 김유(金宥)·김흥(金興)을 보내어 칙서(勅書)를 가지고 가서 조선 국왕을 봉하여 이어서 나라의 일을 주장하게 한다. 무릇 너희 나라 대소 신민(大小臣民)은 밤낮으로 오직 공경하여 마음을 다해 도와서 예분(禮分)에 따르기를 힘쓰고 혹시라도 참람(僭濫)함이 없게 하며 길이 충순(忠順)한 마음을 굳게 하여 영구히 태평한 복을 누리게 하라.’ 하였다.”
위와 같이 이미 천자(天子)의 밝은 명을 받았고 열성(列聖)652) 의 큰 기업(基業)을 이어서 진실로 무강(無彊)653) 한 휴조(休兆)이니 어찌 유신(維新)의 은택(恩澤)을 펴지 아니하겠는가? 경태(景泰) 3년 윤9월 17일 매상(昧爽)654) 이전의 모반(謀反)·대역(大逆), 자손(子孫)으로 조부모나 부모를 모살(謀殺)한 것과 구매(敺罵)한 것, 처첩(妻妾)으로 남편을 모살한 것, 노비로 주인을 모살한 것, 모고 살인(謀故殺人), 고독(蠱毒)·염매(魘魅)를 제외하고 다만 강도·절도를 범한 외에는 이미 발각된 것이나 발각되지 않은 것이나 이미 결정(結正)된 것이나 결정되지 않은 것이나 모두 용서한다.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발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줄 것이다. 아아! 봉작(封爵)을 받고 차례를 이어서 이미 신인(神人)655) 의 군주(君主)가 되었으니 허물을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어 백성에게 복을 고르게 한다.”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18장 B면
【영인본】 6책 542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語文學) / *의생활(衣生活) / *무역(貿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