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崔恒)을 사간원 우사간 대부(司諫院右司諫大夫)로,
홍원용(洪元用)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김진(金震)을 지좌헌납(知左獻納)으로,
권효량(權孝良)을 우헌납(右獻納)으로,
구인문(具人文)을 좌정언(左正言)으로,
김효급(金孝給)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삼았다. 이보다 먼저 사간(司諫)
이보정(李補丁)과
김구(金鉤) 등이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의 아들의 고신(告身)에 서명(署名)하지 않으니,
홍해가 임금에게 아뢰어 마침내 다 좌천(左遷)시키고
최항(崔恒) 등으로 이를 대체(代遞)시켰는데,
구인문이 얼마 안 있다가 어버이가 늙은 이유로써 사직(辭職)하고 돌아가니 그때의 평판이 이를 칭찬하였다. 임금이 즉위(卽位)하여서 집현전(集賢殿)의 유사(儒士)들을 많이 임용하여 관계(官階)를 승진시켜 대간(臺諫)에 포열(布列)시키니 조정과 민간에서는 장차 희망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술한 것이 모두 세쇄(細瑣)하고 진술할 만한 것은 말하지 않으니 사림(士林)들은 실망(失望)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날에 장령(掌令)과 지평(持平)을 겸무(兼務)시킨 것을 그만두게 하고 본직(本職)으로 돌아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