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제101화,제102화
?(영조1)영조와 사도세자
조선의 왕 중 아들을 죽인 이가 있어요.
누굴까요?
바로 영조입니다.
영조는 조선 제21대 임금으로 장장 52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뤄 낸 임금이다 .
그는 탕평책으로 붕당 간의 갈등을 완화시켰으며, 역대 어느 임금보다 백성의 삶을 몸소 챙겼던 명군주였다.
하지만 천민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태생적 한계로 항시 번민해야 했으며, 극심한 콤플렉스 속에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속에 가둬죽였지요.
왜 그랬을까요?
영조와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초청하여 그들 사이의 갈등과 번뇌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영조(1694~1776)는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정치를 하려 했으며,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붕당 간 갈등을 완화시켰다.
인품은 평소에는 자애로웠으나,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으며, 좋고 나쁨이 지나칠 정도로 명확하여 편애가 심했다.
사도세자(1762-1765)는 영조 말년에 정치를 주도할 기회가 있었으나, 집권 세력인 서인을 적대시하다가 그들의 교묘한 반격으로 죽어야 했다.
기본 자질은 훌륭했으나,
매사에 엄격한 아버지로 인해
자기 능력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으며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말년으로 갈수록 주변 사람을 많이 괴롭혔다.
아버지와 아들의 기이한 인연!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 자리를 지켰던 임금인 제21대 영조...
그는 1724년 이복형 경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이후, 무려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며
또한 그는 조선 임금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왕이기도 하다.
1694년에 태어나 1776년에 죽었으니, 무려 여든세 해를 살았다.
조선 후기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40대 후반이었으니, 영조의 명이 길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세상을 길게 살다 간 영조에게 라이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
‘아니!
아들이 웬 라이벌?’
하면서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영조에게 아들 사도세자는 철천지 원수보다도 더 지긋지긋했던 한맺힌 라이벌이 었음이 분명합니다.
?다음 제102화 계속~
------------------------------------
?조선왕조실록 제102화
?(영조2)
경종시절 연잉군(영조)이 세제에 봉해졌을때 노론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청했다.
왕을 무시하는 건의에 마지못해 청정을 수락했지만 심기가 편치 않던 경종은 소론의 시기상조론과 성균관 및 팔도유생들의 반발을 명분으로 친정을 재개했다.
이때 대대적인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경종시해 모역에 왕세제가 가담했다는 음모로 신변에 위협을 받은 연잉군은 계모인 인원왕후에게 달려가 세제자리를 물리쳐 달라고 호소했고,
평소 연잉군을 감쌌던 대비는 정황을 간파해 왕세제를 보호하라는 한글교서를 내려 상황을 무마시켰다.
이러한 때 경종이 갑자기 후사 없이 요절하게 되면서 오랜 세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던 연잉군이 마침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요절한 경종죽음에 대한 의혹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과 그의 어미가 노론의 지원을 받은 천한 무수리 신분으로 노론의 한 세력가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풍문까지 퍼졌는데,
출생에 대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영조로서는 참기 힘든 낭설이었다.
군왕을 음해하는 이러한 요인들이 지나친 당쟁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한 영조는 붕당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국정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영조는 그가 왕세제로 책봉된 이후부터 더욱 격화된 노소론의 당론으로 수차례 당쟁에 휘말려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기 때문에 정국안정을 위한 탕평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1725년(영조1) 영조는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 과격파를 숙청하고 노론을 다시 정계로 불러들이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영조가 의도하였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노론 내 강경세력인 준론자(峻論者)들이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자 1727년 노소론의 강경파를 축출하는 정미환국을 단행하였다.
이 무렵 그는 국왕이 정국을 주도해야 요순시대처럼 탕평의 치세가 실현될 수 있다는 의지를 강력히 주창하며 이를 따르는 탕평론자를 등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조는 왕위 정통성확보와 탕평정국을 조급히 서두르다가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 과격세력과 갑술환국 이후 소외된 남인 반발세력이 연합해 그의 왕위를 부정했던 이인좌의 난(1728년)을 맞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추대한 반란은 그 규모가 20만 명에 이르렀다.
영조가 이인좌를 친국했으나 그는 왕이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다가 참살됐다.
이인좌의 난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영조는 이후 열등감이 더해져 훗날 자신의 자식까지 죽이는 비극을 낳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조는 노소론 중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들을 고르게 등용하며, 당파 간 서로 견제하도록 하여 정권을 독점할 수 없게 했다.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소론만 등용했으나 이후 탕평책이 안정되자 당색을 초월해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4색을 고르게 등용하며 탕평정국의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숙종이 환국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해가며 조선후기를 열었던 반면, 영조는 요순시대의 치세를 목표로 탕평정치를 통해 조선사회를 개혁했던 계몽군주이었다.
그는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워 자신의 의지를 알리고 붕당갈등의 중심인 이조전랑 통청법을 철폐하였다.
이조전랑은 삼사(三司)의 언관들이 인사권을 장악하며 집권세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악용돼 왔기에 혁파가 불가피했다.
요순의 임금을 이상형으로 한 탕평론의 왕도정치를 펼치려면 왕이 신하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영조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높은 학식의 신하들과 강론하는 경연을 재위 52년간 무려 3,400회 이상을 열었다.
월평균 5.5회에 달하는 경연 횟수는 조선조 최다의 기록이다.
?다음 제103화 계속~
'역사·정치·경제·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실록105-106 (0) | 2022.02.24 |
---|---|
조선왕조실록 103-104 (0) | 2022.02.24 |
조선왕조실록99-100 (0) | 2022.02.24 |
조선왕조실록 97-98 (0) | 2022.02.24 |
조선왕조실록 95-96 (0) | 2022.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