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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의 길

碧空 2014. 1. 7. 22:54

이홍장의 길 [박찬승]

제 294 호
이홍장의 길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일본 시모노세키에 가면 ‘이홍장의 길’이라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이홍장은 1895년 3월 19일 청일전쟁의 강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청국의 전권대신으로서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청국과 일본의 강화회담은 다음 날부터 할팽여관의 춘범루라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의 전권대신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런데 3월 24일 이홍장은 회담을 마치고 숙소인 사찰로 돌아가던 중 군마현에서 온 한 청년이 쏜 총에 맞았다. 총알은 왼쪽 눈 밑에 명중하였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부상을 입은 이홍장은 보름 정도 요양을 하고, 4월 10일 다시 강화회담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홍장은 이때 위험을 피하기 위해 넓은 길 대신 산 쪽으로 난 오솔길을 통해 숙소에서 회담장까지 가야만 했다. 이 길이 바로 ‘이홍장의 길’이다.


  4월 17일 일본과 청국 사이에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은 청국은 조선의 독립 자주를 확인하고 조선의 청국에 대한 조공 등을 영원히 폐지하며, 대만·요동반도·팽호제도 등을 일본에 영원히 할양하고, 배상금 2억 냥을 일본에 지불하며, 중경·소주·항주 등을 일본에 개방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시모노세키의 춘범루는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를 호령해온 중국이 신흥 강국 일본에 무릎을 꿇은 현장이 되었다. 중국의 실력자 이홍장이 직접 일본에 달려와 일본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는 완전히 무너졌다.

무너지는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는 1879년 일본이 류큐 왕국을 병합하여 오키나와현으로 만들면서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류큐 왕국은 일본과 청국 양쪽에 조공을 바쳐온 나라였는데, 일본이 류큐를 강제 병합하는 것을 청국은 막지 못했다. 일본은 청국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류큐를 분할하여 3분의 2는 일본이 갖고, 3분의 1은 청국에 떼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이홍장 등 청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류큐로부터 청국에 망명한 이들이 이에 반발하자 청국 황제가 분할안을 거부하도록 지시하였다. 결과적으로 청국은 실리보다는 명분과 체면을 먼저 생각한 셈이 되었다.

  청국은 류큐가 일본에 병합된 뒤, 조선이 그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이홍장은 만일 조선까지 일본에 넘어간다면 청국의 안전도 위험하다고 보았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과 서구 열강 간의 조약 체결을 권장하여, 1876년에 이미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은 일본이 조선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또 조선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임오군란 때 청국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고, 갑신정변 또한 청국군으로 진압하였다. 그리고 이후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일일이 간섭했다. 그러나 이는 고종을 비롯한 조선 정부의 반발을 불러와 조선은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기도 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1894년 갑오년 조선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청국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곧바로 몇 배 더 많은 일본군을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청국에게 굴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일본은 10년 동안 절치부심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하여 이제 청국과 전쟁을 벌일 만한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이 조선의 내정개혁 공동지도 등 여러 구실을 붙이면서 청국과 전쟁을 벌이려 하자, 이홍장은 청국의 군사력이 열세라고 판단하여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황제 주변의 인물들은 일본에 강경하게 맞섰다. 결국 일본은 아산만의 풍도 앞바다에서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홍장이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졌고, 일본의 영향력은 극대화되었다.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걸림돌로 여겨진 동학농민군들을 학살했다. 조선 보호국화는 러시아의 견제로 일시 좌절되었지만, 10년 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결국은 병합하였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일 1880년대에 청국이 조선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묶어두려고만 하지 않고, 조선의 근대적 개혁과 군사력 증강을 지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렇게 했다면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농민봉기도 없었고, 이를 빌미로 청국과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청국은 조선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스스로를 지키고, 나아가 청국을 지킬 수 있는 튼튼한 울타리로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시모노세키의 굴욕적인 ‘이홍장의 길’에서, 이홍장은 혹시 자신의 조선정책에 대해 이렇게 후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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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교수
· 현 한국구술사학회 회장
· 편집위원
· 저서 :
마을로 간 한국전쟁』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1조 성립의 역사』
           『근대민중운동의 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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