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부터 국사까지 임금이 손수 쓴 일기장
국보 153호 일성록(2329책)
정조는 조선의 국왕 중 여러 면에서 모범을 보인 인물이다. 그 중에서도 매일 일기를 쓰고 이것이 국정의 기록으로 이어지게 한 점은 국왕으로서 정조의 능력을 다시금 새겨 보게 한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써 온 일기는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783년(정조 7) 이후에는 신하들이 기록하는 방식으로 정착되었지만, 이후의 왕들 역시 정조를 모범 삼아 국정 일기를 써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모인 책이 '일성록(日省錄)'이다. 하루에 세 번 살핀다는 '논어'의 글귀에서 그 제목을 따 왔다. '일성록'은 정조부터 마지막 왕 순종까지 150년간에 걸쳐 기록된 232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보 153호로 현재 규장각 국보 서고에 보관된 '일성록'을 통해 조선시대 기록 문화의 또 다른 면모들을 만나보기로 하자.
#'일성록'을 만들기까지
'일성록'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쓴 일기인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였다. 정조는 증자가 말한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五身·나는 매일 나를 세 번 반성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정조가 '일성록' 편찬을 명하면서 증자의 이 글귀를 인용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1785년(정조 9) 정조는 그가 탄생한 후부터 '존현각일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과 즉위한 후의 행적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등을 기본 자료로 하여 중요 사항을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왕의 일기를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 규장각의 신하들이 실무를 맡았고, 1760년(영조 36)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의 기록이 정리되었다. 책의 제목은 증자의 말에서 따와 '일성록'으로 정해졌고, 조선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151년간에 걸쳐 '일성록' 편찬은 이어졌다.
이처럼 '일성록'은 정조의 세손 시절의 일기에서부터 출발했지만, 정조가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국정의 주요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당시 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하는 '승정원일기'가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승정원일기'와는 다른 방식의 편찬을 지시했고, 결국 '일성록'은 주요 현안을 강과 목으로 나누어 국정에 필요한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표제(表題), 요점 중심의 기록
'일성록'은 국왕 주변에서 매일 매일의 일들을 요점 정리 방식으로 간추린 기록이다.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비롯하여, 국왕의 동정과 윤음(綸音·임금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말), 암행어사의 지방 실정 보고서, 가뭄·홍수에서의 구호 대책, 죄수에 대한 심리,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왕의 행차에서의 민원 처리 사항 등이 월, 일 별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주요 현안을 요점 중심으로 정리하고 기사마다 표제를 붙여서 열람에 편리를 기하였다. 예를 들어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4일의 경우 '강계의 삼(蔘)값과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도록 명하였다'는 표제어를 기록하여 이 날의 주요 현안이 환곡 문제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성록'의 첫 부분은 날씨다. '일성록'의 날씨 기록은 '승정원일기'의 그것과 함께 조선시대 기상 상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어쩌면 오늘날 어린이 일기에도 날씨를 꼭 쓰는 것도 이러한 전통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한 글자 한 글자 붓으로 써 내려간 이 책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용어가 나를 지칭하는 용어인 '여(予)'이다. 일인칭 한자인 '予'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국왕을 지칭하는 '상(上) '과 대비되면서, 왕 스스로가 쓴 일기임을 확실히 증명해 준다.
'일성록'에는 위민 정치를 실천한 정조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격쟁(擊錚·꽹과리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함), 상언(上言)에 관한 철저한 기록이 그것으로서, '일성록'에는 1300여 건 이상의 격쟁 관련 기록이 실려 있다. 정조는 행차 때마다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그 해결책을 신하들에게 지시하였다. '일성록'에는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없는 내용들도 다수 수록되어 있고, 국정의 참고를 위해 자주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성록'에 기록된 수치들이 매우 구체적인 것은 선례를 참고하여 국정을 원활히 이끌어 나가기 위함이었다. 또한 '고종실록'이나 '순종실록'이 일제의 주도 하에 편찬되어 그 한계가 많은 점을 고려하면 '일성록'의 기록들은 매우 의미가 있다.
#칼에 잘린 흔적이 있는 까닭
'일성록'은 원칙적으로 국가의 주요 정책이나 전례의 고증이 필요한 경우 왕실의 열람을 허용했다. '왕실의 비사(秘史)'로 인식하여 보관에 주력한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일성록'은 국정 참고용 기록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성록'은 큰 수난을 당하였다. 최고의 집권자 측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불리한 기록을 오려내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현재 '일성록'에서 오려진 곳은 정조 10년 12월 1일부터 정조 23년 11월 5일까지 총 635곳에 달한다.
누가 왜 '일성록'을 오려낸 것일까? 그것은 19세기 세도정치기 왕을 마음대로 즉위시킨 외척 세도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헌종 사후 왕을 임명할 수 있는 최고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순원왕후(순조의 비) 김씨였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로, 헌종의 후계자로 강화에 귀양을 가 있던 이원범(후의 철종)을 지명하였다. 이원범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후손으로, 은언군은 정조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귀양을 왔다가 결국 천주교 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 원범은 은언군의 아들인 전계군의 셋째 아들로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양을 온 선대를 따라 조용히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원범에게 갑자기 왕의 자리에 오르라는 조정의 분부가 떨어진 것이다. 19세기 후반 추락하는 조선 왕조의 단면을 보여주는 해프닝이지만 어쨌든 얼떨결에 원범은 조선의 25대 왕 철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원범의 선대가 역적이라는 점은 철종을 왕으로 지목한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마침내 '일성록'의 정조시대 기록 중 원범의 선대와 관련된 주요 기록이 도삭(刀削·칼로 삭제됨)되었다. 도삭된 날짜를 '철종실록'과 비교하면 대부분 은언군이나 상계군과 관련된 기록으로 도삭의 정치적 배후에는 순원왕후를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세력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현재 '일성록' 원본에는 칼로 잘려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일성록'이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씁쓸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 조선시대 일기문화
- 전쟁·질병·풍속 등 자세한 기록
조선시대 선비들 역시 꾸준히 일기를 썼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유희춘의 '미암일기', 이귀의 '묵재일기', 오희문의 '쇄미록(鎖尾錄)', 이필익의 '북찬록(北竄錄)', 유만주의 '흠영(欽英)' 등 많은 일기류 자료가 남아 있다.
이순신은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한 줄 한 줄 일기를 써 내려갔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정리하는 한편 새로운 전쟁을 준비해가는 방편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난중일기' 외에도 '용사잡록', '난중잡록', '고대일록' 등 임진왜란과 관련된 일기가 다수 남아 있다.
'쇄미록'은 임진왜란 중 민간인 오희문이 겪은 상황을 일기로 정리한 점에서 주목된다. 유배일기도 눈에 띈다. 바쁜 관직생활 보다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던 유배기가 오히려 일기쓰기에 전념하게 한 셈이다. '미암일기'에는 꿈이나 질병, 지방의 풍속 등 저자의 일상사에 관한 기록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16세기 생활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며, '북찬록'은 이필익이 안변에서의 유배 생활을 일기로 기록한 것으로서 북방지역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흠영'은 유만주(1755~1788)가 21세부터 33세로 요절하기까지 1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144권의 일기라는 점이 주목된다. 자신이 공부했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것과, 생활사에 관한 기록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18세기 지성들의 학문적 수준을 파악하는 데 중요 자료가 된다.
국왕 정조의 일기가 모태가 된 '일성록'부터 전쟁 일기, 유배 일기, 생활 일기 등 다양한 일기류 자료들을 통하여 전통시대 선조들의 투철한 기록 정신과 함께 생생한 삶의 현장들을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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