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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상공차관 (前 데이콤,파워콤 회장)박운서씨 제2인생 이야기

碧空 2006. 7. 7. 11:12
봉사 `늦바람` 필리핀의 코리안 농사꾼 [중앙일보]
`Salamat 타이거 박`

 

차관까지 해 봤지, CEO도 해 보고, 은퇴할 때 와달라는 곳 많았어
지금은 필리핀 촌구석의 농사꾼 … 그 놈의 정 때문에 여기까지 왔네


박운서(67)를 아십니까. 일명 '타이거 박'. 호랑이 같은 근성과 추진력으로 유명한 전직 관료이자 거물 기업인입니다. 1994년, 행정고시 합격 28년 만에 통상산업부 차관이 됐습니다. 공직 퇴임 뒤에는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사장으로 가 부실투성이 공기업을 여봐란 듯 살려냈습니다. 데이콤 회장 시절엔 또 어땠나요. 만성 적자이던 회사를 흑자로 돌려놨습니다. 2004년 은퇴했지만 와주십사 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는 거절했습니다. 쉬고 싶었습니다. 그만하면 열심히 산 인생이라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런 그가 사라졌습니다. 새 집 지으려 산 양평의 500평 대지, 노후 대비용이라던 골프장 회원권 3개, 찰떡 금실을 자랑하던 아내마저 남겨두고. 그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11개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그를 찾았습니다. 농부가 됐다 합니다. 바다 건너 필리핀, 전기 뚝뚝 끊기고 제대로 된 농기계 하나 없는 오지에서 논농사를 짓는답니다. 돈 더 벌려, 음풍농월 하려 그 먼 땅까지 갔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는 새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마음 가득 그들 생각뿐이라 떨어져 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적어도 팔십까지는 건강히 살아야 할 이유를 비로소 찾았다고 합니다.

궁금증에 못 이겨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비행기 타고, 버스 타고, 배 타고, 지프 타고, 오래 걸어서.

민도로<필리핀> 글.사진=이나리 기자

필리핀 민도로섬 칼라판 부두. 시계를 본다. 오후 1시13분. 약속한 시각보다 47분이나 먼저 도착했다. 박 전 차관은 "시간 지키려 애쓸 필요 없다"고 했다. "2시부터 나와 기다리겠지만 5시쯤에나 만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고속버스건 페리건 딱딱 맞춰 바꿔 타기 쉽지 않은 곳이 여기다. 그런데 운이 좋았다. 고속버스도 페리도, 딱딱 맞춰 와 주었다.

민도로는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 서남쪽에 있다. 필리핀에서 7번째로 큰 섬이다. 섬 중앙을 가로지르는 할 고트 산맥을 기점으로 오른쪽이 오리엔탈 민도로, 왼쪽이 옥시덴탈 민도로다. 박 전 차관은 제주도 2배 크기의 오리엔탈 민도로 남부, 로하스 부근에 산다고 했다. 정부군과 지주들이 고용한 무장 경호원, 그에 맞서는 사회주의 무장세력 신인민군(NPA.New People's Army)며 원주민인 망얀(Mangyan)족 사이 무력 다툼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부두 밖으로 나섰다. 뜨겁다. 태양도 호흡곤란을 일으킬 법한 날씨다. 우기 직전인 6월 초.중순께가 가장 덥다 했던가. 우리나라로 치면 도청 소재지 급이건만 햇볕 피할 곳 하나 마땅치 않다.

급한 대로 부두 앞 간이식당에 들어갔다. 필리핀인 대여섯 명이 점심을 먹고 있다. 좀체 보기 힘든 이방인의 출현에 눈길이 확 쏠린다. 콜라 한 병을 시켜 놓고 엉거주춤 앉았다. 열댓 살이나 먹었을까, 주인집 딸이 입은 7부 바지가 눈에 띈다. 한글이 프린트돼 있다. '정지' '보행자 출입 금지'. 요즘 또래 사이에 유행하는 스타일이란다.

박 전 차관과 어렵게 통화가 됐다. 그의 휴대전화는 하루 중 3분의 2 이상이 불통이다. 그만 해도 유선전화가 거의 없는 이곳에선 감사할 일이란다. 오후 2시, 그가 나타났다. 새까맣다. 그리고, 너무 말랐다.

"키 174㎝에 65㎏이었는데 55㎏이 됐어요. 더워 그런가 봐, 허허."

그가 몰고 온 승합차에 올랐다. 2시간30분은 더 달려야 한단다. 그런데 뜻밖에 일행이 있었다. 그의 큰 아들 찬준(37)씨와 며느리 정효경(33)씨였다.

"베트남에서 직장생활 하고 있는 걸 제가 지난해 말에 불러들였어요. 당최 혼자 감당할 수가 있어야죠."

아버지가 부르자 찬준씨는 두말 없이 휴직계를 내고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신혼의 며느리도 조용히 짐을 쌌다. 효경씨는 지금 임신 12주째라 했다. 내심 혀를 찼다. 식구들까지 이게 웬 고생이란 말인가.

"글쎄 말이에요. 그런데 정말 처음엔 이럴 생각이 아니었거든요."

어쨌거나 시작은 2005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들하고 부부동반 필리핀 골프 여행을 갔어요. 제 아내가 목사거든요. 2년 동안 지원해 온 선교지가 있다기에 한번 방문해 봤죠."

로하스 개척 교회를 둘러본 다음 산 속 망얀족 마을까지 가 보기로 했다. "솔직히 짜증나데요. 덥지, 교통 불편하지, 벌레들은 마구 덤벼들지…. 이런 데까지 끌고와 고생시킨다고 아내한테 신경질도 많이 냈죠."

하지만 로하스에서 다시 비포장 도로로 2시간, 차에서 내려 3시간을 걸어 들어간 산 속에서 그는 딴 세상을 봤다.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저렇게들 살아야 하나 …"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 개처럼 돼지처럼."

망얀족은 15세기 스페인 정복 이전부터 필리핀에 뿌리박고 살던 원주민이다. 스페인 지배 300년, 미국 지배 100년 동안 극심한 박해에 시달렸다. 시련은 지금도 끝나지 않아, 필리핀인들도 망얀족이라면 같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먹는 건 바나나, 고구마, 소금 약간이 전부예요. 댓잎이랑 야자나무 잎으로 얼기설기 엮은 움집에 사는데, 아이들은 왜 또 그렇게나 많이 낳는지. 열 낳으면 그중 살아남는 건 한 둘. 때론 살기 막막해 태어나자마자 산에 버리거나 아예 숨 끊어 땅에 묻어버리는 일도 있어요."

평균 수명 40세. 학교도, 경작할 땅도, 미래의 희망도 없다 보니 사람들은 게으르고 의욕이 없었다. '문명세계'와의 접촉이란 간혹 읍내 시장에 가 싸리 빗자루나 바나나를 파는 것이 전부. 생명줄인 소금과 등유를 사기 위해서였다. "아이들 맑은 눈망울을 보니 별 생각이 다 나데요. 다 같은 사람인데 너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니…."

먹먹해진 가슴은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대로였다. 그는 깊은 묵상에 잠겼다. "40년을 나와 가족을 위해 일했으니 남은 생은 이웃을 위해 살아도 좋다 싶었어요."

2004년 5월 다시 필리핀에 가 '모리아자립선교재단'을 설립했다. 7월에는 아주 짐을 쌌다. 아내도 따라 나섰다. 로하스 읍내에 방 한 칸짜리 아파트를 빌렸다. 열흘 뒤 아내가 쓰러졌다. 더위와 벌레, 부실한 음식 탓이었다. 그 홀로 남았다. 이를 악물었다.

현장 조사 끝에 쌀농사를 짓기로 했다. 젊은 망얀족 부부들을 데려다 일꾼으로 키우고, 학교.고아원.병원 등을 설립하는 베이스 캠프로 삼기 위해서였다. 재단 이름으로 논 16㏊(5만 평), 그에 딸린 망고나무 밭 1㏊(3100평)를 샀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먼저 물소 500마리를 끌어다 경지 정리에 나섰다. 폭풍에 쓰러진 망고나무로 그득했던 땅도 깨끗이 손을 보았다. 농장 안에 300m 길이의 도로를 만들고 다리도 두 개 놓았다. 전문가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뛰었다.

9월 말 게스트 하우스 건축을 시작했다. 양평에 지으려던 집 설계도를 가져와 썼다. 자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제발 단단하게 구워 달라고 부탁한 블록도 슬쩍만 힘을 주면 부스스 부서졌다. 업자 보는 앞에서 두 트럭 분량을 깨버렸다. 비로소 제대로 된 물건이 도착했다. 전주 9개를 세워 전기를 끌어오고 지하수도 개발했다. 위성인터넷 안테나도 세웠다. 통신.도로.수도.전기. 사람 모여 사는 곳이라면 꼭 있어야 할 인프라를 모두 제 손으로 만들었다. 그 모든 일을 불과 6개월 만에 해냈다.

"와서 보니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직파법(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것)을 쓰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이앙법(모판에서 싹을 틔워 논에 옮겨 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모내기는 인건비가 문제인데, 저야 일자리 만들러 온 사람 아닙니까."

이앙법을 주로 쓴 결과 두 번 추수로 45㎏들이 쌀 3400가마를 생산할 수 있었다(여기는 이모작 지대다). 이웃 농부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앙법 외에 생산량을 늘린 또 하나의 '비법'은 성과급제였다. "붙박이 일꾼 세 명에게 '㏊당 100가마 이상 생산하면 임금을 80% 더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새벽 4시만 되면 삽 들고 나섭디다, 허허."

하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돼 간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망얀족들을 데려다 일꾼으로, 재단의 리더로 키우려던 꿈은 몇 년 뒤로 미뤄지게 됐다. 농사짓는 법은커녕 기본 교육조차 받지 못해 도무지 농장 일에 적응하지 못했다. 대신 어렵게 살던 필리핀인 농부 셋을 불러들였다. 농장 안에 집부터 지어 주었다. 아이들을 포함해 17명이 그의 새 가족이 됐다.

하지만 그가 한 '진짜 큰일'은 할고트산 중턱 티나와간 평야에서 피비린내를 지운 것이다. "720㏊나 되는 땅이에요. 정부가 한 지주에게 50년 임대를 해줬죠. 근데 망얀족은 그 땅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자기들 터전이라 생각해요. 자연히 지주의 사설경비대와 정부군, 망얀족과 그들 편인 NPA 사이에 소규모 전투가 끊이질 않았죠."

중재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지주와 정부, 망얀족과 NPA 측을 두루 만나 협상을 이끌어 냈다. 지주에게 6000달러를 줘 임대권을 포기하게 하고, 지방정부와 협상을 통해 장기적으로 그 땅이 망얀족의 자립 터전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고 산 깊숙이 숨어 살던 망얀족들도 티나와간 쪽으로 서서히 근거지를 옮기고 있다.

호랑이에 비견될 만큼 강골이라 하나, 왜 그라고 힘든 순간이 없었겠는가. "세 번 보따리를 쌌습니다. 때론 모든 일이 불가능하게 느껴져 견디기 참 힘들더군요. 그때마다 가족의 격려와 기도가 큰 힘이 됐어요."

이제 민도로에서 그는 유명인사다.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지금도 몇몇 교회며 학교, 망얀족 마을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고 있지만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노 워크, 노 페이(No Work, No Pay). 일하지 않는 자를 거저 도울 수는 없습니다. 전 농장 도로를 이용하려는 이들에게도 '공짜는 없다, 돌 하나라도 날라 오라'고 주문해요. 진정한 자립이란 당장의 호구를 넘어 정신을 바로 세우는 데 있으니까요."

간혹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e-메일을 보내온다. "어떤 놈은 미쳤다 하고, 또 어떤 녀석은 신선놀음 한다 그래요. 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죠. 노년의 안온한 삶을 버린 게 아쉽기도 하지만 사실 흡족함이 더 큽니다. 제가 지금 한국 있으면 뭐 하겠어요. 골프 치고 술 마시고 여름이니 개고기나 먹으러 다니고, 정부 욕하다 정치인들 욕하다 날 다 새지 않겠어요. 입으로 짓는 죄를 피한 것만도 큰 복이지요."

한시름 놓은 그는 요즘 또 새 사업을 구상 중이다. 중국 진항도에 하층민을 위한 자립 재단을 만들려는 것. 오래 전부터 연을 맺어온 조선족 선교사 부부가 이미 기반을 닦고 있다.

"10월이 돼 아들 부부가 돌아가고 대신 아내가 합류하면 이곳 생활도 더욱 안정될 겁니다. 그럼 중국 쪽 일에 매진해야죠. 뭐 팔십 살까지야 안 살겠습니까. 죽는 날까지 두 팔 두 다리, 놀리지 않으렵니다."

 
2006.07.06 17:01 입력 / 2006.07.07 06:15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