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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시대 슬픈 서예

碧空 2006. 5. 19. 22:04
컴퓨터 시대, 슬픈 서예



   기고자 : 정재숙
 


신용카드 영수증에 서명하는 일 말고는 글씨 한 자 안 쓰고 넘어가는 날이 늘어간다. 컴퓨터 자판 위를 더듬고 다니는 두 손이 어째 남의 것처럼 낯설다. 글씨를 쓸 때 손은 몸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컸다. 요즈음도 원고지에 손으로 쓰기를 고집하는 소설가 조정래씨나 김훈씨의 고집은 그래서 이유 있어 보인다. 모니터에 찍힌 활자체 글자와 종이에 제 나름 필체로 쓴 글씨는 다르다. 컴퓨터를 쓰고 난 뒤 글이나 문체가 달라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글씨체는 사람 됨됨이를 담고 있는 생각의 분신이었는데 기계로 찍은 글씨는 공장에서 제조된 사물 같다. 기계화된 현대인의 한 징표가 '필체의 사라짐'이다.



지금 서울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시(詩).서(書).화(畵)에 깃든 조선의 마음' 전에 가면 우리 선조가 남긴 글씨를 넉넉하게 볼 수 있다. 의병장이 나라를 걱정하며 쓴 시, 선비가 벗에게 보낸 편지, 지인들이 멀리 출장 가는 관리에게 준 송별시, 사대부가 모임에서 지은 즉흥시 등 다양하다. 10년 긴 시간을 바쳐 출품작의 한문을 한글로 풀어온 하영휘 아단문고 연구실장은 "붓을 잡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만큼 붓글씨가 생활 자체였던 조선 양반의 글씨는 그래서 소탈하고 자연스럽다"고 설명한다. 수없이 반복된 연습을 통해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현대 서예의 '작품'과는 다르다. 붓 가는 대로, 생각 흐르는 대로 써 내려간 글도 마찬가지다. 글씨의 형식과 글의 내용이 한 몸을 이뤘으니 좋을 수밖에.



올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한문 입상작 가운데 글자나 내용이 틀린 것이 여러 점 있다는 한학자 윤의원씨의 지적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뜻이 통하지 않는 엉뚱한 한자를 쓰거나 문법에 어긋난 대구를 단 것은 결국 무슨 글인지 모르고 글자만 베꼈다는 방증이다. 어떤 사상과 정취를 품고 있는 글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모양새만 흉내 낸 관행이 빚은 촌극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삶에서 우러나온 글을 담지 않고 스승이 써 준 본만 닮게 쓰거나 서첩(書帖)을 모방한 작품은 한낱 종이조각일 뿐이다. 흰 종이와 검은 먹만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리 멋진 글씨를 써 대통령상을 타고 특선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이런 코미디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윤의원씨가 올해까지 25회에 걸친 수상작 도록을 살핀 결과 오자와 오류가 증가 추세였다. 서예계 일부에서는 심사의 불공정함을 의심한다. 흡사한 서체가 연거푸 상을 타고, 똑같이 틀린 글씨가 또 나오니 '제자의 작품을 봐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써 준 것을 뽑는다'는 말까지 나돈다. '서예학원을 차리기 위한 면허증 발급'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들린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기에는 한국 서예사의 빛나는 전통이 아깝다.



이동국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번 미술대전 서예부문 한문 수상작의 오류를 "한국 현대 서예가 당면한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글쓴이의 마음이 닿지 않는 글씨가 아무리 멋진들 껍데기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한문 붓글씨가 생활이었던 조선 양반의 글씨와 한문 쓸 일이 거의 없는 현대 컴퓨터 세대의 글씨를 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 서예가 대중과 멀어져 오직 서실(書室)에서만 가능한 예술로 전락한 이유가 여기 있다.



겉만 흉내 낸 붓글씨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찍은 기계글씨와 같다. 중국과 일본 서예계를 바짝 엎드리게 한 석봉(石峯) 한호(韓濩)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후손으로서 서예계가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베끼기 전에 생각하는 서예, '필체의 사라짐'을 보완하는 생활로서의 서예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