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제43화,44화
?(중종 2) 중종이 살아가는 법
*그리고 조광조의 등장.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성대군은 변덕스러운 연산 형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고, 칼날 위에 선 것과 같이 극도로 조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법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진성대군(중종)은 왕이 되었으나 힘이 없기는 매한가지 였다.
중종은 서슬 퍼런 반정 중신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고, 그런 까닭에 중종의 살아가는 법은 바로,
“연산과 반대로 하기”였다.
사냥이나 연회를 피하고 학문에 열중했으며 신하들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중종의 모든 결정은 항상
“조정이 모두 반대하지 않으니 따르노라”식이었고, 왕의 주도 아래 전망을 갖고 추진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이 시기의 백성들은 연산 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달프기는 매한가지 였다.
개나 소나 공신이니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은 궁핍해지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 차지가 되었으며, 불안한 정국에 임금이 허약하니 관직사회의 기강 해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령들은 돈을 주고 관직을 샀으니 그 몇 곱절을 뽑으려 백성의 등골에 빨대를 꽂았고, 어사를 파견하여 적발하고 처벌을 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여기에 가뭄, 홍수, 우박에 지진까지 찾아오니, 고향을 떠나 떼도적이 되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다.
한편 기세가 왕 못지않던 반정공신들 중 박원종 등 반정 실세들이 중종 7년에 이르러 대부분 죽게 되자, 힘의 공백이 생겼고, 중종은 비로소 왕 노릇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혜성 같이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이 자가 바로 조광조이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의 수제자였다.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는데, 젊은 조광조는 두 번의 사화와 스승의 죽음 그리고 중종반정을 목도하면서,
"임금과 신하가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근본을 바로 세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조광조는 29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성균관 생도들 역시 다른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본질을 공부하고 실천하려하기 보다는 보신과 출세와 요령 취득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연산 시대를 거치면서 온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것이지요 .
조광조는 처음부터 의관, 자세, 언행 등 모든 면에서 성리학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했고, 처음에는 비웃던 자들도 조광조의 반듯함이 진정성 있게 지속되자 자연스럽게 조광조를 주목하고 따르게 되었다.
반듯한 자세, 성리학의 깊은 이해와 원칙 견지, 유려한 말솜씨, 진정성에 성실함까지 임금과 함께 하는 경연장은 곧바로 조광조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다음 제44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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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44화
?(중종 3)조광조의 개혁.
중종은 조광조의 학식과 됨됨이에 반해 조광조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게 되었고, 급기야 과거 급제 2년도 되지 않아 조광조를 홍문관의 수장인 부제학에 올려놓았다.
아울러 조광조가 몰고 온 바람은 조정 안팎의 젊은 선비들을 매료시켜 이들 역시 조광조를 진심으로 따르는 지경이 되었고, 대신들도 가급적 조광조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조광조는 중종과 선비들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몽주의 신원을 회복하여 문묘에 종사하도록 함으로써 조광조가 사림의 정통 학맥을 잇는 선비임을 대외적으로 공인받았다.
이어서 조광조는 기존의 과거제가 시나 문장, 즉 사장(詞章)에 능한 사람을 뽑을 뿐 성리학의 본질에 부합하고 덕이 있는 자를 뽑지 못한다는 등의 이유로 현량과의 실시를 강력 주장하였고, 중종은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훈구파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받아들였다.
※ 현량과 : 중국 한나라 때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따서 만든 것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에 의해 대책(對策) 만을 시험보고 채용하는 제도
또한 조광조는 나라에 천재지변이 생겼을 때 일월성신에게 도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관청인 소격서의 폐지를 강력 주장하여 이를 관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중종이 반대 의사를 여러 번 밝힌 일로써, 이로 인해 중종과의 유대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는데, 조광조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여기에 더해 조광조 세력은 성리학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한 강한 목적의식에 따라 훈구파들을 사장, 즉 시나 문장만을 일삼는 소인배, 구세력이라는 이유로 탄핵해 유배 등의 조치를 취하는 등 속도조절보다는 가속 페달을 더 깊숙히 밟았는데, 이로 인해 훈구파들의 불만이 소리 없이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러한 것들 역시 소인배들의 전형적 형태로만 여겼을 뿐 그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
중종의 강력한 신임을 바탕으로 여러 개혁조치를 강행하면서 조정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광조 세력은 성리학의 이상을 따르는 철인군주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신하와 백성이 될 수 있는 제도와 현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어느 정도의 가시적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며, 이와 같은 조광조의 노력이 더 계속된다면 조광조의 이상국가 건설이라는 꿈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을 것으로 볼 여지도 상당했다.
암튼 중종의 신임과 조정 안팎의 지원을 바탕으로 힘을 최대한 비축한 조광조 세력은 드디어 이 시대의 가장 예민한 부분에 칼을 대기 시작했다.
이것은 바로 중종반정 때의 정국공신 117명중 무려 76명에 대해 이들이 연산군의 충신인데다 아무런 공도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하여 작위를 삭탈하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 등도 모두 국가에 귀속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이었다.
조광조의 종말을 가져오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막이 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현량과 실시!
~~
기존세력에 크게 대립하거나, 대항하게되면 , 되려 다치는 경우가 많은듯
~~,
이것이 지도자로서 가장 큰 고난 중 하난데~~
내가 다치던 상대가 다치던, 필시 짚고 넘어야할 산이란건 분명하였다.
탕평책을 써도 그시대만 조용하지 결국은 왕도 독배를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음 제45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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