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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21화~22화

碧空 2022. 1. 18. 22:18

?조선왕조실록 제21화, 22화

?(세종, 문종 3) 새로운 카리스마

  *그리고 한글창제

태상왕 태종이 세상을 뜸으로써 세종은 진짜 임금이 되었습니다.
태종이 죽자 신하들은 은근히 세종 길들이기를 시도했으나 세종은 이를 알고도 그대로 넘어가는 등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새로운 제왕의 리더십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종에게는 세종의 부인 심씨 가문을 박살낸 사건의 전모를 새로 밝히는 방법으로 신하들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으나 이 카드를 끝까지 사용하지 않았고, 형님인 양녕에 대해서도 끝끝내 관용적 태도를 보였으며, 그러한 정치투쟁보다는 농업, 천문과 기상, 외국어, 악기, 북방 등 모든 분야에 있어 혁신을 기하기 위한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세종의 업적은 두루 나열하기가 벅차므로 모두 생략하고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가장 훌륭한 발명품인 한글창제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1443년 12월 30일, 세종은 그의 인생 최고의 걸작품이자 대한민국 역사의 최고 걸작품인 훈민정음, 즉 한글을 내놓았는데, 기이하게도 이날 이전의 실록엔 한글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동안 한글은 세종의 지휘 아래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것이 통설이나(한글 보급과정을 집현전 학자들이 도맡았으므로), 적어도 실록에는 집현전이 한글창제에 관여했다거나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글이 공포된 지 한 달 보름이 지난 후 최만리의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내용은 한글은 새롭고 기이한 기예일 뿐 한자 외의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사대에 어긋 나고 오랑캐와 다를 것이 없다는 취지의 것이었습니다.

최만리는 집현전의 실질적 수장이었
는데, 만약 집현전에서 한글 창제를 주도했다면 어떻게 최만리가 이러한 것을 모르고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 ㅔ라는 점,
당시 시대상황에서 세종이 어떻게 드러내놓고 한글창제를 시도할 수 있었겠는가? 라는 점,

한글 창제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문헌이 없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세종의 한글창제는 세종이 아들 수양대군 등 소수의 믿을 만한 사람들과 비밀리에 추진한 프로젝트
였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대목에서 비록 정설은 아니지만 한글 창제에는 신미대사라는 스님의 역할이 컸다는 주장이 최근 힘을 받고 있습니다.
신미대사는 범어,  티벳어 등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뛰어난 언어학자라고 하며 세종이 침실에 불러서 까지 법문을 들었다고 하니 이런 프라이빗한 곳에서 범어등 언어학 강의가 몰래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창제 직후 역경사업에도 큰 기여한 것으로 보아 "신미대사"의 역할은 절대적이었겠지만 당시의 숭유배불 사상이 팽배한 가운데 스님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기록에 남길 수 없었으리라 봅니다.

아무튼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만든 사람과 만든 때와 만든 이유가 자료
에 의해 명백히 증명되는 유일한 문자이고, 그 월등한 과학성은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이미 인정한 것으로, 세계문화유산에도 올라 있는데, 그 물리적 위대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그 정신, 즉 지배의 효율성이 아닌 백성의 이로움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5세만 되어도 전부를 깨우칠 수 있는 쉽고, 과학적이고, 철학이 있는 문자 한글!!!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문자를 쓰고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세종의 위대성에 감복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제22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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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제22화

?(세종, 문종 4)

   *비극의 서막

세종의 장자 “향”이 세자에 책봉된 것은 8세 때였습니다.
후일 문종 임금이 되는 세자는 아버지의 성품과 자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야 말로 성군 중의 성군이 될 자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종은 세자로 30년을 지내면서 세종으로부터 고품격의 왕위 수업을 받았으나,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단종을 남기고 죽으니, 이것이 비극의 서막입니다.

사람들은 문종이 요절한 것으로 많이 알고 있는데, 문종이 세상을 뜬 것은 39세로 성종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요절했다는 이미지를 갖는 것은 재위 기간이 위와 같이 매우 짧았던 데다가, 어린 단종을 남기고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구~ 애만 좀 일직 낳았어도...)

문종은 세자 시절, 두 번의 이혼을 하고(두 번째 세자빈의 폐출 사유는 동성연애였다고 합니다)
셋째 부인으로부터 아들을 얻었는데 산모는 바로 세상을 뜨고 맙니다.
단종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견인을 잃고 말았으니 단종의 앞날이 참으로 막막하기만 합니다.

세종은 과로에다 운동부족에 고기를 좋아하는 식성 때문에 소갈증(당뇨)
을 앓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그런 이유로 말년에는 문종에게 섭정을 시키고 뒷방으로 물러나 앉았습니다.

세종은 부인 6명에 18남 4녀를 뒀는데, 정비인 왕비 심씨가 낳은 아들은 8명이었습니다.
장자인 문종 밑으로 3, 4, 5살 등등 터울이 있었고, 하나 같이 총명하고 제주가 있었으나, 오히려 재주 있는 자식을 여럿 둔 것이 비극의 단초가 되고 맙니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과 달리 형제간의 우애를 매우 중시하여 자식들에게 일찍부터 각자의 능력에 맞는 일을 맡겼고, 나아가 자신의 명령을 신하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시키기 까지
하였습니다.

세종 입장에서 보면, 장성한 잘 준비된 세자가 있고, 세손이 잘 크고 있으며, 대군들도 아비와 형님의 말을 잘 들으니 자신의 병 말고는 걱정거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그렇습니까.
갑자기 다섯째와 일곱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세상을 떴고, 거기에 세자마저 등에
난 종기가 갈수록 커져 위험한 지경에 이르니, 세종의 걱정은 깊어만 갔습니다.

세종은 이와 같이 자식들과 부인의 죽음을 맞고 세자의 병을 걱정하다가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갑자기 세상을 뜨니, 향년 54세였고 재위기간은 31년이었습니다.

세종은 눈을 감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까요?

수양, 안평...이들이 설마...

?다음 제23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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