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한나절의 문화산책을
고궁박물관 특별전 "류큐 왕국의 보물"로시작합니다.
일시: 2015년 1월 22일 목요일 오후 1시 40분부터 ~ 5시
모이는 장소: 고궁박물관 로비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
일정: 오후 2시 ~ 4시 강연
14:00~16:00 국립고궁박물관강당)
• 류큐 왕국의 왕성, 슈리성
우에즈 야스유키 上江洲安亨| 슈리성공원관리부 주임연구원
• 에도 시대의 류큐 취미
박수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오후 4시 ~ 5시 정순희 고궁박물관 해설사님의 해설과 함께 "류큐왕국의 보물"을 관람합니다.
류큐 왕국의 보물
- 2014 년 12 월 9 일 ~ 2015 년 2 월 8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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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오키나와沖繩제도에는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일본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역사를 형성한 ‘류큐 왕국琉球王國’이 존재했다.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현인 이 지역은 8~9세기부터 농경사회에 접어들었으며, 12세기부터 지방호족들이 등장하여 이합 집산을 지속하였다. 15세기 초에 쇼하시尚巴志(재위 1422~1439년)가 호족 세력을 모두 통일하면서 ‘류큐 왕국’이 성립되었다. 류큐 왕국은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잇는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15세기에는 중계무역으로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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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특별전은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여러 기관과 일본의 국립박물관에서 온 류큐 왕국의 보물을 통해 과거 동아시아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누린 류큐 왕국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한다. 우리나라는 늦어도 14세기 이전부터 류큐 지역과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조선 건국 후 류큐 왕조에 대한 교린交隣정책을 통해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조선은 류큐에 불교 경전·사서 등의 서적과 사원 건축술을, 류큐는 조선에 희귀 동·식물과 병선兵船제조술을 전해주는 등 활발히 교류하였다. 또,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서 양국 모두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오키나와에는 약 3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 전후 ‘아지按司’라 불리는 지도자가 각지에서 나타났다. 1429년 쇼하시尚巴志가 호족 세력을 모두 통일하면서 ‘류큐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류큐 왕국은 중계무역으로 번성하였으나 1609년 사쓰마번薩摩藩의 침입으로 막부의 간섭을 받다가 1872년 일본에 병합되었다. 1879년 오키나와현沖繩縣이 설치되면서 ‘류큐’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슈리성은 류큐 왕국의 제1대 왕이 즉위한 1406년부터 일본에 병합되는 1872년까지 왕실의 주거 및 왕의 집무와 의례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 중 대부분 전소되었으나 1992년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 20주년을 기념해 주요 건물을 재건했다. 성곽 일대는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70여 년간 류큐 왕국을 통치한 세력은 쇼씨尚氏였다. 쇼씨 왕조는 나하의 항구를 통해 각국에서 수입한 다양한 재료를 구하여 왕실의 고급 생활용품에 사용하였다. 쇼씨 왕조의 유물은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남방제국 등의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독자적으로 발달한 류큐 왕국의 미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특히, 나하시역사박물관 소장 ‘쇼씨 왕조의 전래품’은 2006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류큐의 미술은 일본과 중국에 원류를 두고 조선과 동남아시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류큐 미술품으로는 왕실의 공예품 제작을 담당한 관서인 가이즈리 부교우쇼貝摺奉行所에서 제작한 칠기, 관요官窯성격의 쓰보야壺屋에서 구운 자기 등이 있다. 회화는 16세기 중국화풍 도입으로 본격 제작되다가 17세기 이후에는 일본화풍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류큐의 음악은 왕조 문화가 성숙한 17세기경 완성되어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향유되었다. 류큐의 전통 악기는 궁정 의식 또는 에도江戶에 사절로 갈 때 궁정 악사와 악동자樂童子에 의해서 연주되었다. 류큐의 각종 의례에서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람은 여성이었으며 고대의 모계제도가 남아 여성이 군역·농업·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류큐의 여성은 옷차림, 비녀, 반지 등으로 왕족, 사족, 평민의 신분을 구분하였다.
류큐 왕국은 1372년 중국과 공식외교관계를 맺은 이후 중계무역을 통해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누렸다. 류큐는 조선을 중요한 교역국의 하나로 여겨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유교경전과 대장경 등을 구하는데 힘쓰는 한편 희귀 동·식물과 병선 제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1609년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 이후에는 일본 에도 막부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일본과 중국에 모두 조공을 바치는 양속兩屬체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외교 관계는 류큐 왕국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270년간 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