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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희수 이야기

碧空 2015. 1. 7. 00:13

심희수(沈喜壽 1548∼1622)는 조선 선조 때 좌의정까지 지낸 분이다.

심희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한 어른이 없이 자라서

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심희수는 역시 벗들과 함께 재상집 연회에 가서 술 마시고 노니면서 기생을 희롱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대부분의 기생들은 인상을 찌푸리고 이들을 피하는데, 이날 모인 기생 중 단연

어난 미모와 가무를 겸비한 일타홍은 오히려 심희수의 희롱을 받아주기도 하고, 화장실

을 가는 척 하며 후일 만날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타홍은

약속한대로 심희수를 찾아가 함께 지내게 된다.

이때 심희수의 나이 15세이고, 일타홍의 나이는 분명치 않지만 17세 전후였는 가 보다.

심희수는 아직 결혼 전이었고, 이팔청춘에 일타홍과 꿈결같은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일타홍은 나이는 어리지만 기생으로는 이미 전국적 이름이 나 금산(錦山)에서 서울의

재상집 연회에까지 초대될 정도였다.

그녀는 미모로도 어우야담 등 여러 기록에 남아 있지만, 이미 시(詩)와 가무로도 경지

에 올라 있었나 보다.

그녀의 시 한 수를 보자.

長霖 (장림 : 장마) - 취연(翠蓮, 一朶紅)

十日長霖若未晴 십일장림약미청

鄕愁蠟蠟夢魂驚 향수납납몽혼경

中山在眼如千里 중산재안여천리

堞然危欄默數程 첩연위난묵수정

열흘 긴 장마 개일 기색 없는데

고향 그리워 꿈결에 달려갔다 놀라 깨이네.

옛 동네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길은 먼 천리 솟은 난간에 팔 괴고

가만히 고향 가는길 헤아려보네.

이러한 일타홍이 심희수를 만나 기생 생활을 청산하고 심희수와 살게 된다.

일타홍은 관상도 잘 보았는데, 심희수의 관상이 재상이 될 관상이었다는 설도 있다.

어찌되었든 일타홍은 심희수에게 글공부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였다.

심희수는 공부할 것을 결심하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이모부인 노수신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놀라운 것은 심희수의 어머니다. 명문가의 자제가 결혼도 전에 기생과 함께 사는 것을

허락했으니, 일타홍의 설득이 아무리 주효했다고 해도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넓고 열려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심희수는 노수신의 동생의 딸과 결혼을 한다.

일설에는 일타홍이 심희수에게 결혼을 할 것을 재촉하였다고 한다.

심희수가 정실부인과 혼인을 한 뒤에도 심희수는 일타홍만을 사랑했다고 한다.

이에 일타홍은 심희수에게 5일을 주기로 4일은 정실부인에게 가서 자고 자신과는 하루

지내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타홍을 너무나 사랑한 심희수는 이런 약속을 번번이 깨고 밤이면 밤마다

타홍을 찾았다고 한다.

일타홍은 심희수가 자신에게 너무나 빠져 있어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과거에 급제한

뒤에 나를 찾으라’는 편지를 두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이후 심희수는 공부에 더욱 정진해서 21세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25세에 문과에 급제

하여 일타홍과 다시 만난다.

그 후 다시 10년이 흘러 심희수는 35세 되던 해에 죄를 얻은 허균의 형 허봉을 두둔하

다가 금산(錦山)군수로 좌천된다.

금산은 일타홍의 고향이다.

그런데 일타홍이 금산에서 미미한 병에 걸리더니 고통도 느끼지 않고 숨을 거두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일설에는 자살하였다고 한다.)

‘인생의 생사장단은 한 가지이며 군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아 한이 없다.

낭군의 옆에 뼈가 묻혀 지하에서 다시 만나 모시는 게 소원이다.’

그리고 시 한 수를 남겼으니 유명한 상월(賞月-달구경)이라는 절명시이다.

이때 심희수의 나이가 36세이니 일타홍의 나이는 아마도 38세 쯤 되었을 것이다.

상월(賞月) - 일타홍(一朶紅)의 절명시

靜靜新月最分明 정정신월최분명

一片金光萬古淸 일편금광만고청

無限世界今夜望 무한세계금야망

百年憂樂幾人情 백년우락기인정

맑고 고요한 초승달 또렷하기도 한데

한 줄기 달빛은 천년만년 푸르렀겠지.

넓디넓은 세상에 오늘 밤 달을 보며

백년의 즐거움과 슬픔 느끼는 이 몇이나 될까.

심희수는 일타홍의 시신을 손수 염하여 첩을 귀장하는 예는 없으나 다른 연고를 대어

말미를 얻고 고양의 선영 안에 장사 지냈다. (일설에는 군수직을 사직하고 장례를 치뤘

다고 한다.)

심희수가 일타홍의 시신을 상여수레(?車)에 싣고 금강나루에 다다랐을 때 마침 봄비가

내렸다고 한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려 일타홍의 관을 덮은 붉은 명정이 젖는 모습을 보면서 심희수는

시 한 수를 읊는다.

그 시가 유명한 ‘이별눈물(有倬)’이다.

이별눈물(有倬) - 沈喜壽

一朶芙蓉載柳車 일타부용재유거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錦江春雨丹旌濕 금강춘우단정습

應是佳人別淚餘 응시가인별루여

한 떨기 연꽃은 버들상여에 실려 있는데

향기로운 영혼(香魂)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

비단강(錦江)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드니

아마도 고운 우리 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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