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박세채(朴世采)가 군주와 신하가 지성(至誠)으로 서로 도와야 하는 뜻을 아뢰었다. 또 말하기를,
“우리 조정에서 내수사(內需司)를 설치한 것은 이미 제왕은 사사(私事)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궁가(宮家)의 훈척(勳戚)과 좌우(左右)의 근습(近習)들을 치우치게 보호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궁가(宮家)를 영조(營造)하는 일을 대신(臺臣)들이 간쟁(諫爭)하였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대로 감독하여 만들었으니, 이는 성상께서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관(政官)을 등용(登用)하고 버리는 것이 그 사람의 현명함과 우매함에 있지 않고, 다만 청탁(請託)이 있고 없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대간(臺諫)과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혹시 사람의 옳음과 그름을 의논하게 되면, 그 친척(親戚)이나 친구(親舊)들이 떼지어 일어나 변명하여 구(救)하여서 공의(公議)를 펴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더욱 큰 근심입니다.”
하니, 임금이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내가 마땅히 깊이 생각할 것이나, 조정의 신하들도 이를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박세채(朴世采)가 또
세종(世宗) 때에는
김구(金鉤)·
김말(金末)을,
중종(中宗) 때에는
윤탁(尹倬)을,
인조(仁祖) 때에는
정엽(鄭曄)을 사유(師儒)로 삼아서 권장하여 성취하였던 일을 인증(引證)하여, 대사성(大司成)을 지극히 정밀하게 가려 뽑아서 교육에 전심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언로(言路)가 열리지 아니하는 폐단을 말하기를,
“김익훈(金益勳)은 어제 대신의 말로 인하여 참작하여 처리함으로써 거의 귀착(歸着)될 곳이 있게 되었으니, 이후로 대신들이 반드시 대각(臺閣)을 도와서 정과 뜻이 서로 맞기를 힘쓴다면 나라의 일이 매우 다행하게 될 것입니다. 또 성상께서는 묘당(廟堂)과 대각(臺閣)에 대하여 차별이 있게 보시는 듯합니다. 나이 젊고 의기(意氣)가 날카로운 사람은 말하는 것이 모두 이치에 맞지 않거나 또 과격(過激)한 실수도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공정(公正)에서 나오는 것이니, 또한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여 재납(裁納)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윤증(尹拯)은 겸손(謙遜)이 지나쳐서 마침내 임금의 명령에 응하지 않았으니, 성의를 다하여 불러오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받아들였다. 박세채(朴世采)가 또 말하기를,
“어제 대신들이 송시열(宋時烈)의 휴치(休致)의 청을 참작하여 뜻에 맞게 허락하기를 주달(奏達)하였습니다만, 당초에 간청(懇請)하였는데도 윤허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니, 지금에 와서 병이 조금 나은 뒤에 어찌 경솔히 윤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앞서는 그의 병세(病勢)를 보아서 처리하려는 것이었으니, 오늘날에 와서 경솔히 허락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대개 이때에 송시열(宋時烈)이 여러 번 휴치(休致)를 청하기를 매우 힘써 하니, 김수항(金壽恒) 등이 병세를 보아 윤허하여서 병중의 생각을 위로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박세채(朴世采)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6장 B면
【영인본】 38책 631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