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 1383(우왕 9)∼1462(세조 8). 조선 전기의 문신.
♣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직지(直之), 호는 귀산(歸山).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 1416년(태종 16)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 1435년(세종 17)에 종학박사(宗學博士)에 제수되었다.
♣1439년 눈병으로 사직하자 종친인 경녕군 비(敬寧君?) 등 19인이 상소해 한관(閒官)에 서용되었다.
♣1446년 사성으로 있으면서 종학 교수들이 다른 직책을 겸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소를 올렸다.
♣1448년에는 상주목사로 나갔다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내직에 임명되어 사서언해(四書諺解)의 번역을 담당하였다.
그 해에 불당의 설립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고, 후에 사간이 되었으나,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의 아들의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해서 좌천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성·부제학에 제수되고,
♣1454년(단종 2)에 예문제학이 되었다. 그 해에 다시 내불당(內佛堂)의 혁파를 건의하는 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55년(세조 1)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제수되었으며, 1458년 이승소(李承召)와 함께 최선복(崔善復) 등 12인을
거느리고 『초학자회(初學字會)』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1459년에는 군기부정(軍器副正) 김석제(金石梯)와 함께 새로운 진법(陣法)을 의논하였다.
♣ 1461년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 등 9인과 함께 『손자주해(孫子註解)』를 바르게 고쳐 정리하는 등 한문 국역에 공이 컸다.
♣1462년 아산현을 회복하고자 도모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고신(告身)이 삭탈되었다.
♣ 죽은 후 성균생원 이고소(李古紹) 등의 상언(上言)으로 관직과 과전을 돌려받았다.
♣김말(金末)·김반(金?)과 함께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특히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당시 성균관에서 후진에 전념해 학문 발전에 큰 성과가 있어,
♣‘삼김(三金)’·‘경학삼김(經學三金)’ 혹은 ‘관중삼김(館中三金)’이라 불렸으며,
많은 명사를 배출하였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해동명신전(海東名臣傳)』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전고대방(典故大方)』
-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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