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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임진년 섣달

碧空 2012. 12. 3. 22:22

        壬辰年 섣달

                                                                                      金 英 男

 5년내 사망률 93% 생존율 7% 내게 지워진 굴레다, 2012년 그 경계선을 넘어가는데 달력은 한 장만 남았다. 시간 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일주일 한달 참 빨리도 간다. 아들네 집에 손녀 보러 아침저녁 출근하고, 체력 관리하러 도봉산에도 다녀오고, 글도 써보고 싶고, 생전에 수필 100편은 써보려는데 마음만 바쁘다. 그러나 숨쉬고 살아 있으니 기쁘고 감사한다.

 

 금년은 임진왜란 발생 420년, 임진년 섣달이다. 요즘 왕이된 남자 영화가 인기가 있는 모양이나 아직 관람하지는 못했다. 광해군 이야기라는데, 임진왜란을 수습한 공이 큰 왕자였지만 폭군으로 왕위에서 쫒겨난 임금 정도만 알고들 있다.

선조시대는 200년간이나 지속되는 평화에 젖어 전쟁준비를 잊고 지낸 시기다.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판단에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을 보내 그곳 동향을 살피도록 했으나 이듬해 돌아온 두 사람은 상반된 보고를 한다. 설마 하며 무사 안일에 젖은 조정은 전쟁 대비를 안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왜는 힘이 넘치자 이웃 나라를 침략한다. 1592년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명분으로 처들어 왔다. 왜군의 조총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조선, 부산포에서 한양까지 20일 만에 왜군이 한양을 점령 했으니 변변한 전투 한번 못해 본 것이다.

 

 밤중에 몰래 도망간 선조, 경복궁은 왜군이 불태운 것이 아니었다. 분노한 백성들이 경복궁에 불을 지른 것이다. 큰아들 임해군은 왜군에 포로가 되었고 선조는 피난 다니기 바쁘고 전쟁을 치루는 몫은 광해군이 해낸다. 전쟁이 불리해 지자 할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전란을 수습한다. 실용주의 정책으로 정국을 안정시킨 세자를 불신하며 선조는 마음이 변한다. 정비 인목왕후 소생의 어린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려다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자 광해군은 겨우 왕위에 오를수 있었다. 함경도 피난길에 선조 임금의 일화, 배고프고 지처 있을 때 백성이 올린 생선을 맛있게 드시고 생선 이름이 묵이라 하자 그 맛에 감격해 이름이 천하니 銀魚로 하라는 왕명을 받는다. 도성으로 돌아오자 그 생각이 나고 동해안에서 어렵게 어렵게 마련해온 은어, 피난시절 그 맛이 아닌지라 도로 묵이라 하라 하게 된다. 그 후 발음이 변해 도루묵이 되고 헛수고를 뜻하는 상징어가 된다.

 

 전쟁중 왜는 전과를 입증하기 위해 조선인의 귀를 베어갔다. 그것을 모아 놓은 무덤이 교토의 한 공원에 있다 사실은 코 무덤이다. 새 정권으로 바뀐 왜는 납치한 조선인을 통해 성리학을 알게 되고 도자기, 인쇄술 등을 발전시킨다.

중국 대륙도 요동치고 있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와 실리주의 중립외교로 국제정세 변화에 무사하게 지낼수 있었으나 명나라의 지원군 요청에 할수 없이 광해군은 친위부대를 보내 강홍립 장군에게 싸우는 척하며 상황을 보아가며 청나라에 항복하도록 한다. 친위부대 파병은 도성을 수비하는데 결정적 허점이되 궁궐수비 병력과 내통한 반군은 힘들이지 않고 도성을 점령한다.

 1623년 3월 선조의 5남인 정원군과 구씨(인헌왕후)사이 출생인 능양군의 반정 명분이다.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하고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을 괴롭히는 폭군이었으며, 두마음을 품어 오랑케에게 항복하고 명나라를 배신 하였다하여 무력정변으로 쫒겨난다. 선조 사후 끊임없는 왕권 도전세력에 시달린 광해군 과연 폭군일까? 태종 이방원은 부왕의 후처 소생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권에 도전하는 형제들과 추종세력도 죽였다. 세조 수양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복위를 꾀하든 신하들을 죽였는데 폭군이라 하지는 않는다.

주색을 즐기기 위하여 전국에서 여인을 징발 하기위해 채홍사를 동원하고 사냥에 지장이 된다하여 백성들의 집을 헐어내고 어머니가 사약을 받은 원한에 2번의 士禍를 만들어 나라를 멍들게 한 연산군과 같은 존재란 말인가?

 

 서인과 인조는 친명 사대주의와 청나라를 배척하는 외교로 노선을 변경하면서 조선의 수난을 자초한다. 왕권을 차지한 반정 세력들은 중국대륙 정세를 모르고 대명 사대주의만 고집하다, 병자호란을 자초하고,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은 더욱 어려워저 굶어 죽어갔다. 청나라는 당시 50만명을 잡아 갔으며 당시 인구의 10%로 추정한다. 한나라의 임금과 추종 세력이 국제 정세를 모르고 명분만 앞세우다 백성들을 노예로 만든 것이다. 이때 끌려간 여인들이 청나라에 몸값을 주고 돌아왔으나 이미 노예와 같은 포로 생활로 성적 타락과 도덕적으로 문란해저 왔으니 화냥년(還鄕女)의 본디 말이 그들을 멸시하는 말이 되고, 그중에 임신한 여성들도 있어 이들이 낳은 아이를 호로 (胡虜)자식이라 부르고 지금도 쓰이는 슬픈 역사의 유산이다.

 

 광해군을 폭군이라고 몰아낸 인조는 어떠했는가?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부를 통해 서양문물을 접하고 실용외교를 경험하며 10년만에 귀국 청나라 내부 사정과 신문물을 가져와 새로운 세상을 부왕께 알려주려 하자, 삼전도에서 굴욕적 항복을 당한 치욕으로 분노에 찬 인조는 옆에 있던 벼루로 세자 얼굴을 내리 첬고, 미움을 받아 귀국 후 2달 만에 의문의 병사를 한다.

 왕손이 죽을 경우 문책 받게 되어있는 의관을 전혀 문책하지 않았고, 염습을 지켜본 종실 진원군에 의하면 세자의 온몸은 흙빛이고 배에서 피가 쏱아저 나왔다고 전한다. 그후 세자빈도 사약을 받았고 손자들도 제주도에 귀양가 병에 걸려 죽었다. 이러한 정황은 세자가 독살 되었슴을 뜻한다. 종법을 따르면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왕위가 계승되어야 하나 인조는 차남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넘긴다.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을 도입하고 실용주의 사상으로 조선을 변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 하였으니,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원인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실용주의 사상과 신문물을 도입 개화 하였다면 뒷날 일제의 침탈에 맥없이 굴복하는 불행은 없지 않았을까? 임진년 섣달에 생각해본다. 역사의 패배자가 된 광해군 재평가 되어야 한다.

출처 : 전력통신회
글쓴이 : 김영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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