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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 김병연

碧空 2012. 6. 22. 18:19

김삿갓 가족사와 장원급제 문장

 

인간 영달을 단념하고 팔도 유랑의 길을, 오직 머리에 커다란 삿갓을 쓰고 단장을 벗삼아 오늘은

석양 비끼는 산그림자를 한탄하고 내일은 주막집에서 술을 마시며 行雲流水와 같이 일생을 방랑

하며 울분을 토했던 김병익, 一名김삿갓 시인. 김삿갓이라하면 조선근대에 이르러 모를 이가 없을만 한 방랑 세객으로 하나의 이름난 시광 이었다.

그는 조선왕조 23대왕 순조 7년(1807년) 3월13일 안동김씨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24세 손으로,

아버지 김안근(金安根)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안동김씨는 신라말기 전국이 분열되어 80여명의 군웅이 할거하던 때 안동 지방을 지하던 김선평의 후손이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일반 백성은 물론, 별안간 일어난 고을의 영웅들도 성이 없던 이 시대에 행세 한것을 보면, 김선평은 신라의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김선평은 고려태조

통일 사업에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다. 안동김씨는 조선왕조에 들어 와서도 명문이었으나, 특히

정조가 돌아가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외척 김씨는 천하를 주름잡게 되었다.이로부터

대원군이 등장 할때까지 60여 년간 천하는 그들의 세도 정치하에 있었다. 김삿갓은 이런 때에 이런 가문에서 태어났다.별난 일만 없었다면 김삿갓도 고관 대작으로 세상을 마쳤을 것이다.

김삿갓이 5세 때인 순조 11년(1811)11월, 평안도 용강에서 홍경래 난이 일어 났다.

서북 사람들을 차별한 데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이 난리는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 단시일 내에 가산(嘉山), 박천(博川), 곽산(郭山), 정주(定州)를 휩쓸고 선천(宣川)으로 육박했다.

공교롭게도 이때 선천 방어사가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었다. 그는 함흥 중군으로 있다가 3개월 전 전임해 왔다. 술에 취해서 곤드레가 되어 자다가 별안간 들이닥친 홍경래 군에 붙들려

뒷짐을 묶였다.

이고을에 난리가 나서 불길처럼 번지는 판에 방어사라는 자가 대책은 고사하고 술에 만취해서 적에게 결박을 당했으니, 그 자신으로 서도 창피 막심한 일이거니와 당시의 문란한 기강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술이 깬 그가 끝까지 버티고 적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면 동정의 여지가 있겠으나 순순히 항복하고 말았다.

이 홍경래난은 다음해 2월에 평정 되었다. 당연히 김익순의 책임 문제가 나왔고 그는 그해 3월 9일로 사형을 받았다.

역적에게 항복해서 협력했으니 죄는 당사자에게만 그칠수 없고, 그의 일가는 조정으로부터 폐가(廢家) 처분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삼족(三族)을 멸할 죄목이었으나, 이 정도에 그친것은 안동 김씨의 배경이

힘이 되었을 것이다.

김삿갓과 형 병하(炳河)는 종 김성수(金聖秀)를 따라 황해도 곡산(谷山)에 가서 숨었고, 여기서

공부했다.

그후 조정에서는 死罪는 김익순 자신에 한하고, 자손은 治罪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김삿갓은 과거를 볼 작정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아무도 그에게 자기 집이 폐가되어 과거를 볼

자격이 없단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의 母親은 옛날 조상의 이야기는 물론 가까운 조부의 말까지라도 한번도 들려 주지 않았다.

스물 세살이 되었을때 그는 과거를 보았다.

 

시제는 공교롭게도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

이었다.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음을 한탄 한다는 뜻이다.

정가산은 홍경래 란 때의 가산군수 정시인데, 그는 적과 싸우다 아버지 정어(鄭어)와 함께 전사한 사람이다.

김삿갓은 장원급제를 했다. 그러나 그가 김익순의 손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급제는 무효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제야 집안 내력을 알려 주었고, 그 때부터 그는 갈대로 만든 삿갓을 뒤집어 쓰고 天地에 차고도 남을 怨恨을 품고 외로운 인생길을 영원히 떠났다.

그 뒤로부터 그는 제 본이름을 숨기고 남들이 부르는 그대로 別號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장원 급제 문장을 소개 한다.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

 

대대로 이어 온다고 말하는 나라의 신하 김익순아

정공(가산 군수 정시)은 하찮은 벼슬아치에 불과 하였다.

 

도리 장군(중국의[이 릉(李 陵]이 농서 땅에서 항복해 버리니

도리어 열사[중국의 악 비(岳 飛 )]가 공명을 받든 그림에서 높더라

 

견주건데 선천 부사 겸 방어사 김익순은 李陵과 같고,

겨우 가산 군수에 불과한 정시는 岳飛와 같다.

 

시인도 이에 이르메 의분이 솟구치고 비통해져서

차단한 가을 강가에 칼을 만지며 非歌를 뽑는다.

 

선천 땅은 예부터 대장이 맡는 도읍이라

가산 땅 같은 데 비기면 먼저 대의를 지킬 땅이 아니냐,

 

서로(김익순과 정시)가 맑은 조정 한 임금 밑의 신하로서

죽는 마당에 가서 목숨을 건지려 두 마음을 품은 녀석이었단 말가.

 

그 저 평화로왓던 세월 신미년에

서관(관서지방 평안도)에서 풍우(난리)가 일어남은 이 무슨 변고 인고.

 

주(周)나라를 받잡는 데는 노 중 련 이 있었고

한(漢)나라 보필하는 데는 제갈 양 같은 이 많았다.

 

마찬 가지로 우리 조정에도 정충신 같은 옛 신하 있어

맨손 바닥으로 풍진(난리)에 맞서 순국 절사하였어라

 

가산 땅 벼슬아치 이름을 높이 걸어

가을 하늘 푸른 날에 빛을 내게 하도다!

 

그 혼백 남무(남녘 밭이랑)에 가도 악비(岳飛 )와 더불어 볼 것이며

그 뼈 서산에 묻혀도 백이(伯夷)와 나란히 하리라.

 

서쪽에서 들려오는 소식 분통하고 아찔한데

묻노니 누구집 녹을 먹는 신하냐.

 

가문도 이름난 장동(안동) 김씨 으뜸가는 갑족(甲族)에

이름자도 장안의 순(淳)자 항렬이로다.

 

가문이 이러해서 성은 거듭 내렸거늘

백만 대군 앞일 지라도 대의를 굽힐손가.

 

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의 때를 씻고

철옹산 푸른 숲엔 활이 나뭇가지 마냥 걸려잖은가!

 

그럼에도 조정을 들여나며 삼가던 무릎

등돌려 어이없이 흉적앞에 끊다니!

 

죽은 혼백일지라도 저승엘랑 가지 마라 .

그곳엔 먼저 가신 임금님이 계신다.

 

신하가 임금을 잊은 날은 제 어버이 또한 잊은 거니

한 번 죽음은 만번 죽어 마땅하다.

 

춘추 필법 똑바름을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일을 바로 적어 우리 역사에 전하리라.

 

 

결국 김병연이 김삿갓으로 변장해서 집을 떠나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가 된 과시는 문체나 깊이 , 그리고 드넓은 비유와 멋에서 과시중 단연 최상급의 백미편(白眉篇)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실로 기구한 역사의 인물, 위대한 평민 시인, 눈에 띄는 것과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조리 시의 소재로 삼아 단숨엔듯 해학과 풍자와 경세(警世)의 잠계(箴誡)와 비탄과 정념(情念)과 일아(逸雅)의 시로 엮는 초인적 시인 .

게다가 감히 상상키도 어려운 기상 천리한 행적, 곳곳을 누비며 남긴 일화

빌어 먹으면서도 초지 일관 선비의 지개(志槪)를 그가 짚고 다닌 대토막 처럼 굽히지 않으면서 모든 인간사, 세속사를 괘히 내던진 초월자, 세상의 쓴 맛 매운 맛 등등을 골고루 다 맛보면서 이를 관후한 너털 웃음 속에 속시원히 털어버리는 조선 왕조의 멋쟁이 걸물, 그래서 그의 사후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수 많은 백성들의 사랑과 아낌을 내처 받고 있는 불망비(不忘碑)의 사람이다.

출처 : 고려문학사 2008년1월 15일. 발행자 윤 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