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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 /광개토태왕릉

碧空 2012. 3. 4. 16:05


 
高句麗19대 廣開土大王,20대 장수왕릉및 새로운 고분들-꼭 읽으세요

 

                   

高句麗19대 廣開土大王,20대 장수왕릉및 고분들

고구려19대 광개토 대왕,20대 장수왕릉

한여름의 산뜻한 천지 얼굴

한국의 알렉산드로스’ 광개토대왕의 능과 비석,

벽화… 그 옆에 있는 장수왕릉

백두산 등정후 관람했던 광개토 대왕릉및 장수왕릉!!

내 팽개치듯 아무도 보살핌 없는 유역은 잡초만 무성하고 대왕릉의 봉분은 토사가 흘러내린채

방치된 모습을 보고 우리는 개탄 스러웠다.

중국의 동북 공정에 우리의 역사가 중국에 빼앗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명칭을 지워 버리고 중국 멋대로 명명했다가 자기 역사로 만들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광개토 대왕을ㅡ>호태왕

장수왕릉을-장군총

장수왕릉은 관리를 잘해서가 아니라 대형 돌과 바위로 봉분을 쌓기 때문에 그런대로 인데

광개토 대왕릉은 릉이라기 보다 버려진 토굴이나 흩어진 서낭당 돌더미 같아 주인 없이 버

련진 무덤 그 자체 입니다.우리에서 동물 한마리 없어져도 새끼 한두마리 낳아도 메스컴이

야단법석이며 두루미나 독수리 한마리만 이상이 생겨도 신문과 방송사가 시끌벅적이다.

하물며 민족의 조상이며 영웅이고 절대 통치권자인 왕 이었던 그분들의 무덤이 아닌가!

대한민국은 외교부도 문화재 관리국도 관광공사 까지 없는것인지!! 있는것인지!!안타깝다.

혹씨 유관 기관과 관련 있는분 계시면 고구려 유적지및 상해 임시정부 청사도 방문 하시어

민족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같도록 도움 주시기 바랍니다.

 

산수원 구로 연합카페 운영자,샛별과 등대카페 지기-선구자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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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을 피해 호왕,호태왕이라고 어물적 명명하고 장수왕은 왕명도 없이 장군총이란다.!

이나라 정부는 뭐하고 있으며 문화재 관리국은 왜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십노라.!

 

분노에찬 한말씀

 

‘한국의 알렉산드로스’로 불리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서양의 정복왕 알렉산드로스가 인도에서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지금 서양의 역사는 달라졌으리란 예상과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이 39세의 짧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아마 동아시아의 역사는 또 다른 판도로 전개되었을 것이란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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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와 호왕릉을 가리키는 비석이 있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 재위 391∼412)은 18세의 어린 나이인 391년, 제19대 고구려의 왕이 됐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최전방에 앞장서서 정복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북쪽으로는 연나라와 후연, 남쪽으로는 백제와 왜까지 무찌르며 중원 일부와 한강이남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넓혔다. 그가 정복한 고구려의 영토는 아들인 장수왕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가장 넓은 국토를 차지한 시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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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비석을 유리벽집을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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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본 광개토대왕비석. 사람 키와 비교해보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의 본명은 요즘 드라마에 하듯 담덕(談德)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 또는 호태왕으로 부른다. 호태왕은 주로 중국에서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재위 시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영락(永樂)'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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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을 가리키는 비석.

 

광개토대왕의 아버지는 드라마에서 보듯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의 바로 위의 왕이 바로 소수림왕이다. 소수림왕은 광개토대왕의 큰아버지인 것이다. 소수림왕이 아들 없이 죽자 동생인 고국양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고국양왕 3년에 12세의 나이로 태자로 책봉됐다. <삼국사기>엔 광개토대왕을 가리켜 ‘나면서부터 허우대가 컸으며, 뛰어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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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릉으로 알려져 있는 보잘것 없는 토릉. 고분 내부엔 벽화가 있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서 농부가 원체 큰 비석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비석이 바로 광개토대왕비석이며, 여기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무식하고 몰지각한 관광객  무리가 대왕의 봉분 위에 까지 올라가 희희 낭락이다.

인간과 동물의 다름이 무엇인가를 망각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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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공사를 하는지 토릉 주변엔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고분으로 들어가는 입구.

 

광개토대왕비는 그의 아들인 장수왕 3년(414)에 세워졌다. 광개토대왕이 죽고 2년 뒤의 일이다. 비석의 높이는 6.39m, 글자는 모두 1,775자 정도 되는데, 이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제가 장난친 부분도 판독되지 않은 글자를 자의적으로 곡해한 부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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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으로 들어가면 암벽 바위가 내부를 굳건히 둘러싸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18년, 곧 408년에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다. 나중의 장수왕이다. 장수왕은 도읍을 지금 중국의 길림성에 있는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 그리고 백제를 남쪽으로 더욱 밀어내고 한강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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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 내부에 있는 고분 벽화.

 

그러나 광개토대왕릉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장수왕릉이 있다. 어찌된 일일까? 보통 도읍에 왕의 무덤이 묻히는 게 일반적이다. 아버지 광개토대왕 옆에 묻히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건 일시 남하정책을 펼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을까? 장수왕만이 알고 후대의 역사가는 모르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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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의 고분벽화엔 습지가 채여 원래의 모습이 점점 퇴색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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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가 더욱 채여 원형을 점점 퇴색시키고 있다. 원형보존이 시급한 실정이다.

 

광개토대왕릉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장군총이라 적힌 장수왕릉이 있다. 유일한 피라미드형 석릉이며 출입통제구역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 들여 가공한 절석을 8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은 무덤이다. 기간의 한 변 길이가 33m로, 가장 튼튼한 기하학적으로 쌓아올렸다고 한다. 무덤 주변엔 피라미드형 석돌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는 긴 바위가 여러 개 있다. 높이도 13m에 달한다.

 

더 중요한 대왕 릉은 페허로 버려둔체 비는 왜 보호를 하고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중국 당국의 속셈은 무엇일까?

앞의 언덕이 왕릉으로 보이십니까? 입장료는 챙기고 유적과 고분은 버리고...

비각의 이름이 고구려 제19대 광개토 대왕비 라고 쓰여저야 할것인데..우리정부는

왜 강건너 불인가?! 우리 유적지를 은페 하였다가 나중엔 자기네 것 이라고?

마치 독도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놈들처럼 나는 역사를 강도 맞을까봐 걱정  이랍니다.

 

 

 

조경수가 있어야 할곳에 무성한 뽕나무군이 이채롭다. 

버려진 성역은 망초의 잡초 군락으로  황페 되었다.

 

 

님의 릉에 붙이는 글

 

광개토대왕 하면 남북한을 통하여 그 함자와 용맹과 업적에 대하여

모른자 누가 있겠는가?

그냥 왕도 아니고 대왕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이국땅 에서

버려진채 얼마나 참아 왔던가! 인고의 오랜세월  동안 흔적 이라도

남아 있음은 천만 다행이라 할수 있겠다.그러나 나만의 욕심 일지!

그의 명성에 걸맞지않은 초라함!아니 초라함 이라기 보다 페허 그

자체다. 주변의 유역이 모두 잡초만 우거져 있는가 하면 봉분 위에

서 흘러내린 돌과 자갈로 입구의 길이 막히고 잡초는 봉분 위에까지

볼성 사납게 헛틀어져 있다.올라가는 목재로된 층대는 다 망가져 흔

들 거리고 삐걱 거린다.안본것만 못 하다는 말이 이럴때 두고 한말

인것 같다.별것 아닌것 같은 이글을 쓰면서도 때로는 눈물이 때로

는 한숨이 왜 나오는 것일까요? 대왕은 한민족이 공히 그의 후손이며

 북한은 중국과 맹방이니 혈맹이니 하면서 인접에 계시는 그분

을 어째서 버리고 있으며 대한민국은 중국과 수교를 맺은지 오래

되었으며 OECD국가니 세계10위의 경제 대국이니 외쳐 대면서 그

나라의 처분이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이 아닌지! 통탄을 금할수 없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지하철 1호선을 타시면 신설동과 제기동역 중간에 6호선으로 새

로 생긴역 동묘역 이라고 있습니다. 동묘가 무엇인지 아는분은 아

실 겁니다.한참 떨어진 곳에 동묘라 하는 사당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관우 장비중 관우의 사당 입니다

그곳은 관리인 두고 관리 잘하고 있으며 역명 까지도 사당명을 따

서 인근이 아님에도  동묘역 이라 명명 하고 있다면 사고력이 있

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 칠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여론을

상기시켜 공감을 형성 해야겠죠!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널리널리 알려 우리의 자존심과 국위를 선양 합시다.

             선구자가 울분을 전합니다.018-216-7470

 

 

 

 

 

 

 

 

 

 

 

 

 

 

이름도 없이 태왕 릉이나 태왕비라 하면 먼훗날 그나라의 역사로 변질 시켜

후일에 교과서 내용 바꾸고  성대히 축조하여 자기네 조상이라고 하면 어떻게 할것인가.

동쪽의 어떤놈들 처럼 독도를 지거라고 교과서 까지 바꿔놓고 내땅이니 한번 가

보겠다고 떼쓰는 놈들하고 무엇이 다르다는 말 입니까.

동북 삼성 이라는곳 모두 우리 선열들이 찾이하고 가꾸어온 땅들 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만리 장성 하고는 전혀 다른곳에 있음에도 호산장성이라 명명 하여

작은 산에 성을 아담하게 축성 해놓고 만리장성 시작이라고 선전 하고 있으니 언젠

가는 자기 뜻대로 하겠지요.정말 안타까운 것은 북한이 민족의 얼을 주장 하면서

주체 사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그러데 왜 혈맹의 나라에 모셔있는 광개토.장수왕

릉을 페허로 팽개쳐 있는 것을 강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는 것인지! 꿀먹은 벙어리

라는 말이 있는데..............

 

 

 

 

장수왕릉의 위용

 

 

 

 

 

 

 

 

 

 

 

 

 

 

 

장수왕릉 뒷쪽에 있는 고인돌:주군을 성실히 모셔왔던 장수의 무덤이

아니겠는가! 하는 추론 

 

 

 

05_장수왕릉_07.JPG

 

장수왕릉으로 알려져 있는 석릉 장군총. 주변 큰 돌이 피라미드형의 왕릉을 떠받들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기하학적으로 계산해서 쌓았다고 한다.

 

아직까지 일부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을 헷갈리고 있는데, 대체적인 의견으로는 토성인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으로, 석릉인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장수왕릉인 장군총엔 출입금지라 볼 수 없으며, 광개토대왕릉 내부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중국 당국의 관리부실인지, 사람들 출입이 너무 잦아서 그런지, 벽화에 습기가 차서 계속 손상되고 있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벽화 내용은 중국 말로 설명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길 부탁드린다.

 

SANY0031.JPG

고구려20대 장수왕릉에 들어가는 입구엔 "국가문화재 장군총"이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위의 국가 문화재 란?ㅡ우리나라가 아니라 중국 이라는 뜻이 아닌가?

중국의 동북공정 정책으로 남의 역사를 어물적 하고 있다가 꿀꺽 하는게 아닌가!하는

염려가 현실화 되는것 아닌가.! 빨리 힘을 모아 바로 세워서 후손들에게 브끄럽지 않게

물려 주어야 하는 것은 이시대의 우리의 의무이다.국내외를 막론하고 한반도의 모든

우리 동포들 에게 빨리 그리고 널리 알려 ,힘을 모읍시다.

산수원 구로 산악회

산수원 노래교실

산수원 구로연합 인터넷카페

"샛별과 등대" 인터넷카페

 

선구자(권죽실)-근상

 

018-216-7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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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고구려의 고분벽화     
           
 
고구려 장군총의 전경.
 고구려 옛 수도 집안에 있는 장군총은
 초기 피라미드형과 아주 유사하다
 
 
 
 
장천 1호분 전실 서쪽벽을 가득 채웠던 생활풍속도 부분.

 
중국 지안시 장천1호분 벽화 중 전실의 귀부인 나들이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1고분 삼삭형 천장 받침돌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 1호분 전실 왼쪽 벽의 생활 풍속도.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묘실 정면의 천장으로 올라가는 부분.
 탑 모양으로 차츰 좁혀 올라가는 다섯개의 계단에 온 세상을 담은 듯,
각종 동식물과 인물 형상이 가득 그려져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벽화에 등장하는 수렵도.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밑 층급받침돌 벽화의 용을 탄 신선도와
 태양의 상징인 세발 까마귀,
소머리 형상을 한 농사의 신 등이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의 벽화 그림.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천장 벽화중에 말 그림.
 오른쪽에 세계의 선으로 연결된 것은 별이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
 고구려인들의 습속을 그린 그림의 한장면인데
 화살촉이 석류처럼 생겼다.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①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밑 층급받침돌 벽화의 용을 탄 신선도와
 태양의 상징인 세발 까마귀,
소머리 형상을 한 농사의 신 등이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천장 받침돌 그림.
 학과 용을 타고 승천하는 신선과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묘실
 벽면의 부채를 든 귀부인의 인물도.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받침돌의 용그림.
 용의 몸뚱아리가 적-황-청의 보색대비로 그려져있으며
 비늘은 지금도 선명하다.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②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묘실
 천장 받침돌에 그려져있는 달의 신.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수레바퀴 만드는 신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하늘을 나는 신선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고구려 벽화 중 `해의 신.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
 천장 밭침돌 벽화에 등장하는 농사의 신.
 소머리에 벼이삭을 들고 질주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의 묘실 천장과
 계단식 천장받침돌 벽화.
 오회분 4-5호묘는 사신총과 함께 7세기 고분에 속한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의 묘실 입구로부터
 묘실 전체를 담은 사진.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배치상태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①

 
삼실총 제1실 남쪽벽의 행렬도.
 
 
삼실총 제1실 천장 고임면에 있는 주작(남쪽을 지키는 신) 그림.
 
 
도굴당한 뒤 고분 입구에 두껍게 시멘트를 바른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삼실총의 최근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벽화의
 신수 백호의 머리부분과 용의 몸통부분이 결합된 형상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에 삼실총에 나오는 새 그림.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②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의 고구려 여인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의 인물상.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제3실 서쪽 입구 벽의 역사(力士)상.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긴 칼을 찬 무장이
묘실의 무덤 주인을 보호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행렬도의 남자 인물상.
11명으로 구성된 행렬도의 10번째 위치하는 것으로 봐서
평민으로 보인다
.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행렬도의 평민 복장 여인.
 오늘날의 애교머리를 닮은 특이한 헤어스타일이 재미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통이 넓은 바지는
고구려 평민들의 전형적인 복식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총의 묘실에서 연도 쪽을 바라다 본
면의 그림.  삼각형 천장 받침대가 만나는 부분을 귀면 판석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벽화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벽화.
 저고리와 바지를 입은 전형적 옷차림의 고구려여인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의 벽화.
 쪽구들에 앉은 부인들과 맨바닥에 의자를 놓고
 걸터앉은 남편이 상위에 차린 음식을 즐기며 담소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묘실 왼족 벽면의 말과 마부.
 말의 등에는 안장이 놓여있고 마부의 손엔 채찍이 들려있다.
 
 
서역인과 고구려인이 씨름하는 모습을 그린 각저총 벽화.


[고구려 고분벽화] 북한 송죽리 고분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 고구려 벽화 고분에서
 1600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고구려인의 모습
.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
부리부리한 눈의 고구려 호랑이.
훼손으로 인해 주위는 떨어져나갔다.

[고구려 고분벽화] 쌍영총

 
평남 남포시 쌍영총의 8각기둥과 주두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제1호분

 
황해도 안악 제1호분 벽화의 주두.

 

[고구려 고분벽화] 덕흥리 고분

 
평남 대동군 덕흥리 고분의 주두.
 
현재 북한에 있는 덕흥리 고분 전실 벽화.
왼쪽에 묘지 주인공이 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방에 앉아 있는 보습을 그렸다.
위에는 주인공의 신상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이름이 진이고,
 요동태수와 유주 자사 등을 지냈으며 77세에 죽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제3호분

 
현재 북한에 있는 안악 3호분의 마구간 그림.
 주인공의 생활 면모를 그린 동쪽 측실 벽화 가운데 하나다
마구간 구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말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대륙을 달리던 고구려인들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수산리고분 현실 북쪽 벽에 그려진 귀신 얼굴모양 부채.
 묘지 주인공 부부의 시종들이 들고 있던 것으로,
부채 혹은 햇빛가리개의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
 귀신밑으로 S자 비슷한 손잡이까지 달려있는 것이 특 징
 고구려 벽화에서 보는 유일한 형태이다
 
안악 3호분 전실 동쪽 벽면에 있는 수박놀이하는 역사(力士) 그림.
상투를 머리 뒤로 묶고 아랫도리 일부만을 가린채
금방이라도 한번 맞붙을 기세다
. 역사들의 체구와 몸짓을 다소 희화적으로 과장되게 그렸다.
 
고구려 안악 3호묘 왕비복식

 

 

고구려 유물들 ①

 
금동여래입상
 
평양 동암리 고구려 고분벽화에 의복그림일부로 보이는 파편조각
.
 
 
고구려 유물.
 
일본 나라 박물관 특별전에 전시된 고구려 승려화가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법륭사 금당벽화 비천도 진본.
 
서기 756년 일왕 성무(聖武) 사후 작성된 법륭사 헌물장의 일부.
왼쪽에서 네번째 줄 아랫부분에 "고구려 비단(高麗錦)"이란
구절이 보인다.

 

고구려 유물들 (2)

 
1940년 평양에서 병기창공사를 하던 중 발견한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상"(왼쪽)과 6세기쯤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반가사유상"

 
 
1998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의 흉상.
 .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층이었던 말갈족 주거지로
추정되는 마리아노브카 토성에서 나온 삽 등 철제 유물들

 
옛 고구려 영토였던 중국 동북평원의
왼쪽에 위치한 대싱안링의 고구려시대 흔적인 돌절구.

 
일제 어용학자들이 식민사관에 근거로 이용한 광개토대왕비,
일본인들이 비문을 조작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복제품 진품운 평양박물관

 
경복궁내 신축한 국립중앙박물관이
 1996년 12월 13일 개관을 앞두고 6일 미리 공개됐다
. 사진은 고구려실에 전시한 금동투조장식 복제품.
 진품은 평양 진파리 1호분에서 발굴돼
현재 평양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높이 14cm, 너비 23cm. 고구려하면 대륙적이고
강인한 것만을 연상하지만,
 이 유물은 고구려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을 지닌 국가였는가를
보여주는 명품이다.

 
보장왕21년(서기662년)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은
평양 부근 사수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을 격파했다.

 
고구려 소수림왕의 삽화.

 
 
갑주를 입은 고구려 보병의 복장을 고증을 거쳐 재현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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