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한독통일공감토론회 수석부의장 개회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김 현 욱
[서 론]
존경하는 Hans- Gert Pottering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총재님, 문태영 주독일 대사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한국과 독일, 독일과 한국의 통일 전문가 여러분, 오늘 우리 민주평통과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참으로 귀한 토론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민주평통과 공동으로 토론회를 열게 된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인간 불변의 존엄성, 권리와 의무를 핵심 가치로 생각하는 재단입니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이 추진하는 △사회 정의, △자유민주주의, △지속 가능 경제도 모두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가치들입니다.
제가 이 토론회 개회사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내용 또한 인간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입니다. 이 북한 주민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제가 통일운동을 하는 가장 큰 원인이고 동력입니다. 이것은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설립 취지와도 같은 영역입니다.
그동안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한독, 독한 관계에서 참으로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이 끼니조차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빈곤했던 1960년대부터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한국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을 양성하고 독일의 통일모델을 한국에 제시하는 등 한국에 기여한 공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운 일입니다.
[세션Ⅰ 설명]
통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오늘 첫 번째 세션인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한 경험 스터디는 참으로 소중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션 토론을 위해서 이 자리에는 국내 최고의 통일전문가인 통일연구원장 김태우 박사님과 동독 출신의 뤼디거 프랑크 오스트리아 빈대학 교수님이 발제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뤼디거 프랑크 교수님은 유럽 최고의 한반도 전문가이십니다. 이미 90년대 초반에 북한 평양의 김일성대학과 한국 서울의 고려대학교에서 한반도 통일문제를 연구하신 분입니다. 한국어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션Ⅱ 설명]
두 번째 세션인 ‘독일 통일 21년 통일 후 통합과정’에 대한 토론 또한 한국에게는 가장 절실한 주제입니다. 독일은 통일 이후 20여년 동안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여러 고비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통일을 민족의 절체 절명 과제로 두고 있는 한국은 독일이라는 ‘통일 선배’를 두고 있는 것이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은 독일과 같은 시기에 분단되었지만 아직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불행이지만 독일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우리는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는 점에서는 참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독일 통일의 당사자들에게서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런 측면에서 참으로 뜻 깊은 자리라고 할 수있습니다.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도 드러나듯이 한반도 통일은 밤도둑처럼, 산사태처럼 느닷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민주평통의 의장이신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강조하셨고 우리 민주평통의 과제이기도 한 ‘통일 준비’는 그런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입니다.
저는 느닷없이 찾아올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우리의 준비가 너무나도 모자라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통일 과정도 그렇지만 통일 이후 남북한의 사회를 통합시키는데 필요한 매뉴얼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독일이 통일 이후 지금까지 혼란을 겪었던 것은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그런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은 통일 이후 지난 21년 동안 이런 문제로 큰 혼란을 겪었고 통일을 ‘대재앙’으로 부르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 앞에는 △북한의 핵무기 통제, △북한의 사회혼란 극복, △통일 이후 북한 지역의 경제적 쇄신, △인구 변화, △사회보장, △노동 시장 변화, △체제 전환기의 사법처리, △난민과 이주 △교육 개혁, △에너지, △환경 개선, △보건, △공공기관 구조개혁과 공산당 독재 청산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첩첩산중으로 쌓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과제들이 제기될 것이고, 이런 문제로 남북한이 큰 혼란을 겪을 것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연구 자체를 회피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민주평통부터 이런 남북한 사회통합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통일독일의 시행착오를 배우고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소중한 자리입니다.
[‘헬싱키 프로세스’]
지금부터는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지난 1월 중순에 저는 서울의 외교구락부에서 주한 독일 대사,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 주한 슬로바키아대사, 주한 EU 대사 등 유럽의 주한 외교사절과 식사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사님들은 동서독과 서유럽이 동독과 동유럽, 소련을 통합한 모델인 ‘헬싱키 프로세스’를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헬싱키 협정은 미국, 캐나다, 소련 및 유럽국가를 포함한 총 35개국이 참여하여 3년에 걸쳐 진행된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CSCE)로 1975년 8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된 다자간 협약을 말합니다. 이 협정은 안보, 경제협력, 인권이라는 세 분야와 관련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안보 관련 분야는 △제 1 바스켓(Basket Ⅰ), 경제 분야는 △제 2바스켓(Basket Ⅱ), 인권 분야는 △제 3바스켓(Basket Ⅲ)으로 구분 짓습니다. 이 협정 이후 이들 국가들은 협정의 충실한 이행을 감시하고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려고 조약 내용을 재검토하고 재협상해 나갔습니다. 이런 전 과정을 ‘헬싱키 프로세스’라고 부릅니다. 헬싱키 협상과정에서 지금의 북한처럼 소련은 안보와 경제 협력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동구권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의 군사 점령 아래 들어가면서 소비에트 체제로 편입되었습니다. 동유럽 주민들의 인권 상황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그런데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인권 보장과 개선에 대한 구체적 합의가 없을 경우 안보와 경제협력에 관해 소련과 협력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굳게 지켰습니다. 결국 소련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인권조항이 포함된 헬싱키 협정은 소련과 동유럽 주민들의 인권 개선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또 소련 내부의 유태계, 독일계 소련인들의 외국 이주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과 서부유럽은 헬싱키 협상과정에서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초지일관 밀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끝내 소련의 양보를 받아냈습니다. 이는 공산권 주민의 인권개선 뿐만 아니라 동서 냉전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결론: 북한 인권과 ‘서울 프로세스’제안]
여러분, 저는 북한 인권 문제 또한 헬싱키 프로세스의 소중한 경험을 통해 풀어야 한다고 봅니다. 북한은 현재 20만 명 이상되는 주민을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실제 또는 날조된 반체제 인사뿐 아니라 김일성이 제정한 연좌제로 노인과 아동을 포함한 그 가족까지 감금되어 있습니다.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배급을 받고 가혹한 여건에서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이 수용소에서는 사소한 위반행위를 저질러도 고문 또는 처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북한의 수용소에서는 40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북한 문제 하면 핵문제와 식량 문제, 한반도 평화체제와 통일 문제 등 다양한 주제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핵문제를 풀기 위해 남북한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참여하는 6자회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EU와 6자회담 당사국 모두가 참여하는 서울 프로세스를 한반도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로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에 핵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를 억압하는 북한 인권문제야 말로 저는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 내부와 국제사회에서도 북한의 인권 문제 거론은 ‘내정 간섭’이며 북한 자신들이 알아서 풀 문제라는 시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은 헬싱키 프로세스의 과정에서도 제기되었던 꼭 같은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헬싱키 프로세스 과정에서 유럽은 이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고 해결해 나갔습니까? 그 소중한 경험과 논의과정을 우리는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반도 통일과정에도 적용해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해결해나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폴란드가 소련의 공산주의 압제에 시달리던 1978년,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58세라는 젊은 나이에 교황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2세가 조국을 방문하자 폴란드 국민들은 열광했습니다. 교황은 이후 세계 각지를 순방하며 인권보호를 강조했지만 남미에서 유행하던 해방신학 같은 진보 운동은 교황의 인권 메시지를 배격했습니다.
공산주의의 폐단을 잘 알고 있는 교황은 서방 지식인들의 좌경화를 우려했습니다. 교황은 폴란드 자유노조 대표 바웬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그에게 거액의 활동자금을 비밀리에 전달했습니다. 1981년 5월 1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암살자의 저격까지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1987년 교황이 폴란드를 다시 방문하자 자유노조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얼마 후 공산정권은 붕괴했습니다. 이어 동유럽과 소련의 공산정권이 몰락했으니 교황이 역사를 바꾼 셈입니다.
저는 우리가 오늘 토론하고 있는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도 교황청과 교회의 역할이 막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한반도 통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지극한 인간 사랑, 북한의 고통 받는 주민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제가 특정 종교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동양 불교의 성인인 석가 세존이 출가해서 고난의 길을 가는 것도, 유학의 공자가 천하를 방랑하는 것도 모두 지극한 인간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인간 사랑은 제가 모두에서 강조했던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설립 이념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제한된 관계로 이만 말씀 줄이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 자리에 참석한 Hans- Gert Pottering 콘라드 아데나워재단 총재님, 문태영 주독일 대사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한국과 독일, 독일과 한국의 통일 전문가 여러분, 그리고 독일의 한국 동포 여러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