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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미공개 사진들

碧空 2012. 2. 13. 20:22






 

안녕하세요?

봄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우리에게 닥아오는 것 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뜻대로 이루시고, 가내  행복과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정부인사드림니다

 

 

 

중국에 기댈래 일본과 손 잡을래 묻는 미국과 한국 정치

 

 조선일보 사설

입력 : 2012.02.10 23:29 | 수정 : 2012.02.11 01:03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국가 전략 문제의 태두(泰斗) 브레진스키가 가까운 미래에 중국인도가 부상하고 미국이 쇠퇴하면서 '지정학적 위험'에 빠질 대표적인 나라로 한국을 꼽았다. 그가 최신 저서에서 세계 패권 국가의 질서 변화에 따른 영향을 가장 먼저, 그리고 직접적으로 받을 나라로 한국보다 앞서 든 나라는 구(舊) 소련에 속해 있던 인구 460만명의 소국(小國) 조지아와 대만뿐이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쇠퇴는 한국이 고통스러운 선택에 직면하도록 할 것"이라면서 한국 앞에 놓인 길로 '중국의 지역적 패권을 받아들여 중국에 더 기대는 방안'과 '역사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관계를 더 강화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그는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이 없을 경우 일본이 중국에 맞설 수 있는가는 회의적"이라면서 "한국과 일본 등은 미국의 쇠퇴로 미국이 제공해온 핵우산(雨傘)에 대한 신뢰 위기가 닥쳐올 경우 (미국이 아닌) 새로운 핵우산을 찾거나 스스로 핵무장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이 한반도 통일 문제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이 경우 한국은 '중국이 지원하는 통일'과 '한·미 동맹 축소'를 주고받기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브레진스키는 대한민국의 생존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국제 환경의 변화 시기를 중국이 경제적으로는 물론 군사적으로도 미국을 추월할 향후 20년 전후로 내다봤다. 세계의 패권 국가 미국이 태평양 건너편에서 자기들에게 맞설 수 있는 경쟁적 패권 국가 중국이 부상(浮上)하는 영향을 20년 후에 받게 된다면 중국과 육지와 바다로 접속(接續)돼 있는 한국은 그보다 훨씬 이른 앞으로 5년 10년 후부터 거대(巨大) 중국의 압박감을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절감하게 되리라는 말이다.

브레진스키가 이번에 내보인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세 전망은 노무현 정권이 전시작전지휘권을 한국에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미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응했을 때 이미 예견(豫見)됐던 일이다. 한국의 미래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물들과 차기 집권을 경쟁하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브레진스키의 냉혹한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그는 한국이 붙들고 주저앉히려 해도 미국이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 하는 시대가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상황에서 한국은 중국에 기댈 것이냐 일본과 손잡을 것이냐'고 묻고 있다. 중국에 기댄다는 말은 중국의 패권적 국제 질서 속에서 부속품처럼 굴종(屈從)하고 연명(延命)하면서 중국의 압도적 영향 아래 살아간다는 뜻이다. 일본과 손잡을 것이냐의 의미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여(與)든 야(野)든, 좌(左)든 우(右)든 한국 정치 세력은 이 상황에서 5000만 국민을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지를 대답해야 한다.

한국 정치 세력들은 브레진스키가 한국이 통일 과정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는 중국과 '한·미 동맹의 축소'와 '중국의 통일 지원'을 맞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한 지적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도 되새겨 봐야 한다. 미국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과 미국은 함께 피를 흘린 혈맹(血盟)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한국이 현재와 미래에 국익(國益)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주시(注視)하고 그에 따른 대응책을 숙고(熟考)해왔다. 미국 조야(朝野)가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하고 결론지은 한국의 과거 집권당 민주당이 한·미 FTA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폐기를 공식 선언하는 사태 앞에서 자신들이 한국에 제공해온 안보적 지원의 시효(時效)를 따져 본다고 해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브레진스키 마지막 질문에도 한국 정치 세력은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 핵우산을 제공할 미국이 아닌 다른 강대국을 찾을 것이냐, 아니면 한국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냐다. 이 문제 역시 한국의 안보적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계 '동맹의 역사'에는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이웃 국가에 흡수되거나 끌려다니지 않으려고 그 강대국의 영향력을 상쇄해줄 다른 동맹 상대를 찾으려는 중간(中間) 국가들의 고심(苦心)이 배어있다. 지난 60년간 미국이 그 역할을 해온 한국에도 결정적 국면이 다가오고 있다. 한국 정치 세력들은 나꼼수처럼 시건방지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나라와 5000만 국민이 위태롭다. 집권하겠다는 세력은 다가오는 국가 생존의 결정적 국면에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의 활로(活路)를 제시할 의무가 있다.

 

 

 
 

박근혜 위원장의 마지막 카드
6.15 선언 폐기, 세종시 건설 취소, 계파정치 사죄, 좌익정당의 연방제 폭로 등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백약이 무효이다.
문암(회원)
박근혜가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카드


한나라당이 당 쇄신을 위해서 비대위까지 결성하여 쇄신책에 몰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 연휴가 끝난 시점에서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민주통합당이 39.7%인데 비해서 한나라당은 29.1%로 시일이 지날수록 그 격차는 더 크게 벌어지고있다.

뿐만아니라 박근혜와 안철수와의 비교에서도 안철수가 56.4%로 상승하고 있는데 반해서 박근혜는 34.9%로 떨어져서 무려 21.5%로 격차가 벌어지고있다.

특히 박근혜는 전국적으로 널려 있는 박근혜 지지단체들의 고정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지율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박근혜로서는 충격적이다.



한나라당이 아무리 黨名을 바꾸고 人的 쇄신을 도모하며 마치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대두됐던 사회주의 정책으로 유권자들을 유혹하려던 사회주의자들의 복지정책을 흉내내며 파격적이고 강도높은 쇄신책을 내 놓더라도 이러한 정책이 현실성도 없으려니와 이러한 평범한 구호만으로는 이미 돌아선 민심을 되돌려 놓기에는 백약이 무효로 보인다.


따라서 양대선거를 총 지휘해야 할 박근혜의 책임은 자유대한민국의 존망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막중하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뿐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박근혜는 인생의 전부를 걸 책임과 아울러 그러한 중차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영예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필패나 다름없어 보이는 차기 양대선거를 반전시키기 위한 고륙책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첫째, 6.15선언 지지 발언과 김정일과의 약속인 연방제통일 지지에 대해서 통절한 對국민 사과와 더불어 좌익정당들의 연방제 통일을 추진하려는 망국적 흉계를 낱낱이 까발려 對국민 홍보에 주력한다.



둘째, 수도서울을 두토막내는 세종시 건설에 협력한 사실에 대해서 對국민 사과와 더불어 세종시는 가능한한 최소한의 행정복합도시로 축소시키면서 최첨단 과학도시로 육성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셋째, 지난 4년여 동안 이끌어오던 계파정치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죄하고 지금이라도 계파를 완전히 철폐하여 이 땅에서 다시는 국론분열과 소모적인 붕당질로 나라를 피폐케 하지 않는 풍토조성에 앞장선다.



사실 현재의 정세로 미루어보건대 박근혜의 비대위가 차기 양대선거를 반전 시키기에는 이미 시기적으로도 그리고 인적구성의 면으로 보더라도 역부족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비대위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면 그 위원장인 박근혜의 살신성인 이외에는 그 어떤 대안도 보이지않을 것이기에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자해지 차원에서의 박근혜의 마지막 카드에 희망을 걸어보는 것도 일책일 것이다.

종북좌파의 집권을 막고 자유대한민국의 國體를 지키는 일이라면 자존심 따위가 문제 겠는가?

 
이중국적 배진자 이런정치인 있나?( 박지원의원 스토리)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려는지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 입니다

바쁘셔도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동안 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 그 파렴치함으로부터
대북송금, 여성 편력, 사기행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보를 받는 과정에서
필자(筆者)는 박지원의 이중국적을 확인하였다.

박지원의 미국 영주권 번호는 A21-762-961이며,
그의 부인 이 0자와 딸 박0연, 아들 박0준은

모두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대한민국에는 주민등록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제보의 주된 내용이었다.


박지원이 미국 영주권을 얻게 된 사연도
기구한 일이었다.
60년대 도미(渡美)하였으나,
부친 박종식의 좌익 경력에 따른

연좌제로 인해,

 

영주권을 받지 못하다가 20여년 후

전두환 정권이 연좌제를 폐지하자,

1981년 미국영주권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가족들이 우리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라는,
대한민국의 법 밖에 존재하는,
그리하여 납세의 의무도,
국방의 의무도 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박모 군도

대한민국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며, 한마디로 미국과 한국에 양다리

걸친 박지원을제외한 가족 전체가 그마저도 대한민국 이중국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단일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면서 박지원은 현직 국회의원이며,

전직(前職) 대통령 비서실장과 문화부 장관이었던 셈이다.

 

이런 사람이 보훈연금까지 받고 있으며,
심지어 그의 자식

미국인 박모 군에게까지 3대에

보훈연금이 지급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평범한 보통사람들보다 보다 더 잘 사는,
보다 더 많은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법과 원칙의 평등을 주장한다.

그러나 박지원은 평등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등을 공유할 사람도 아닌 것이

그의 이중국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쥬”라는 말을 한다.
‘노블레스’는 귀족이란 뜻으로 사회적 상층을 가리키고,
‘오블리쥬’는 동사로서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노블레스 오블리쥬’란
‘사회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를 의미한다.
고위공직자를 비롯하여 사회지도층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집단이니만큼 사회적 의무에 대해서도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에서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

천년을 지탱해준 철학은

‘노블레스 오블리쥬’’라고

지적한다.

 

로마의 노블레스(귀족)는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칼을 들고 피를 흘렸다고 한다.

 

로마귀족들은 노예와 귀족의 차별성을 사회적
책임이행 능력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 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오랫동안 거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도 이런 사회지도층의

역할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고위공직자나 정치인,
오피니언 리더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가 극심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금언(金言)이 아닌가 싶다.

 

특히 우리 사회 상층의 도덕적 해이는

자식의 병역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의 상층은 사회적 의무에 대해

솔선수범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병역면제를 받으면 ‘神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런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상 네이버 지식 에서)


그러므로 박지원은 민주당의 대표이면서 神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의 자식들은 神의 자식이 되어,
대한민국의 온갖 의무에서 빠져나갔다.
박지원은 최근 북한인권법을 반대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종북주의자며 빨갱이’라는 발언에서
박지원의 정체성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말과 글이 표현이란 생각이 없이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평소 박지원은 자신의 언행이 종북주의자
빨갱이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러므로 필자(筆者)는 이 모든 것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을 바로 잡고자 한다.



정재학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사무총장,
전추연 공동대표,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 데일리안 편집위원,
인사이드 월드 논설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2012 한독통일공감토론회 수석부의장 개회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김 현 욱

 

[서 론]

 

  존경하는 Hans- Gert Pottering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총재님, 문태영 주독일 대사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한국과 독일, 독일과 한국의 통일 전문가 여러분, 오늘 우리 민주평통과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참으로 귀한 토론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민주평통과 공동으로 토론회를 열게 된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인간 불변의 존엄성, 권리와 의무를 핵심 가치로 생각하는 재단입니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이 추진하는 △사회 정의, △자유민주주의, △지속 가능 경제도 모두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가치들입니다.

 

  제가 이 토론회 개회사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내용 또한 인간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입니다. 이 북한 주민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제가 통일운동을 하는 가장 큰 원인이고 동력입니다. 이것은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설립 취지와도 같은 영역입니다. 

 

  그동안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한독, 독한 관계에서 참으로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이 끼니조차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빈곤했던 1960년대부터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한국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을 양성하고 독일의 통일모델을 한국에 제시하는 등 한국에 기여한 공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운 일입니다.

 

[세션Ⅰ 설명]

 

  통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오늘 첫 번째 세션인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한 경험 스터디는 참으로 소중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션 토론을 위해서 이 자리에는 국내 최고의 통일전문가인 통일연구원장 김태우 박사님과 동독 출신의 뤼디거 프랑크 오스트리아 빈대학 교수님이 발제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뤼디거 프랑크 교수님은 유럽 최고의 한반도 전문가이십니다. 이미 90년대 초반에 북한 평양의 김일성대학과 한국 서울의 고려대학교에서 한반도 통일문제를 연구하신 분입니다. 한국어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션Ⅱ 설명]

 

  두 번째 세션인 ‘독일 통일 21년 통일 후 통합과정’에 대한 토론 또한 한국에게는 가장 절실한 주제입니다. 독일은 통일 이후 20여년 동안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여러 고비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통일을 민족의 절체 절명 과제로 두고 있는 한국은 독일이라는 ‘통일 선배’를 두고 있는 것이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은 독일과 같은 시기에 분단되었지만 아직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불행이지만 독일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우리는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는 점에서는 참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독일 통일의 당사자들에게서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런 측면에서 참으로 뜻 깊은 자리라고 할 수있습니다.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도 드러나듯이 한반도 통일은 밤도둑처럼, 산사태처럼 느닷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민주평통의 의장이신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강조하셨고 우리 민주평통의 과제이기도 한 ‘통일 준비’는 그런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입니다. 

  저는 느닷없이 찾아올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우리의 준비가 너무나도 모자라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통일 과정도 그렇지만 통일 이후 남북한의 사회를 통합시키는데 필요한 매뉴얼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독일이 통일 이후 지금까지 혼란을 겪었던 것은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그런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은 통일 이후 지난 21년 동안 이런 문제로 큰 혼란을 겪었고 통일을 ‘대재앙’으로 부르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 앞에는 △북한의 핵무기 통제, △북한의 사회혼란 극복, △통일 이후 북한 지역의 경제적 쇄신, △인구 변화, △사회보장, △노동 시장 변화, △체제 전환기의 사법처리, △난민과 이주 △교육 개혁, △에너지, △환경 개선, △보건, △공공기관 구조개혁과 공산당 독재 청산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첩첩산중으로 쌓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과제들이 제기될 것이고, 이런 문제로 남북한이 큰 혼란을 겪을 것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연구 자체를 회피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민주평통부터 이런 남북한 사회통합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통일독일의 시행착오를 배우고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소중한 자리입니다.

 

[‘헬싱키 프로세스’]

 

  지금부터는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지난 1월 중순에 저는 서울의 외교구락부에서 주한 독일 대사,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 주한 슬로바키아대사, 주한 EU 대사 등 유럽의 주한 외교사절과 식사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사님들은 동서독과 서유럽이 동독과 동유럽, 소련을 통합한 모델인 ‘헬싱키 프로세스’를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헬싱키 협정은 미국, 캐나다, 소련 및 유럽국가를 포함한 총 35개국이 참여하여 3년에 걸쳐 진행된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CSCE)로 1975년 8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된 다자간 협약을 말합니다. 이 협정은 안보, 경제협력, 인권이라는 세 분야와 관련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안보 관련 분야는 △제 1 바스켓(Basket Ⅰ), 경제 분야는 △제 2바스켓(Basket Ⅱ), 인권 분야는 △제 3바스켓(Basket Ⅲ)으로 구분 짓습니다. 이 협정 이후 이들 국가들은 협정의 충실한 이행을  감시하고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려고 조약 내용을 재검토하고 재협상해 나갔습니다. 이런 전 과정을 ‘헬싱키 프로세스’라고 부릅니다. 헬싱키 협상과정에서 지금의 북한처럼 소련은 안보와 경제 협력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동구권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의 군사 점령 아래 들어가면서 소비에트 체제로 편입되었습니다. 동유럽 주민들의 인권 상황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그런데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인권 보장과 개선에 대한 구체적 합의가 없을 경우 안보와 경제협력에 관해 소련과 협력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굳게 지켰습니다. 결국 소련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인권조항이 포함된 헬싱키 협정은 소련과 동유럽 주민들의 인권 개선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또 소련 내부의 유태계, 독일계 소련인들의 외국 이주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과 서부유럽은 헬싱키 협상과정에서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초지일관 밀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끝내 소련의 양보를 받아냈습니다. 이는 공산권 주민의 인권개선 뿐만 아니라 동서 냉전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결론: 북한 인권과 ‘서울 프로세스’제안]

 

  여러분, 저는 북한 인권 문제 또한 헬싱키 프로세스의 소중한 경험을 통해 풀어야 한다고 봅니다. 북한은 현재 20만 명 이상되는 주민을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실제 또는 날조된 반체제 인사뿐 아니라 김일성이 제정한 연좌제로 노인과 아동을 포함한 그 가족까지 감금되어 있습니다.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배급을 받고 가혹한 여건에서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이 수용소에서는 사소한 위반행위를 저질러도 고문 또는 처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북한의 수용소에서는 40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북한 문제 하면 핵문제와 식량 문제, 한반도 평화체제와 통일 문제 등 다양한 주제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핵문제를 풀기 위해 남북한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참여하는 6자회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EU와 6자회담 당사국 모두가 참여하는 서울 프로세스를 한반도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로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에 핵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를 억압하는 북한 인권문제야 말로 저는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 내부와 국제사회에서도 북한의 인권 문제 거론은  ‘내정 간섭’이며 북한 자신들이 알아서 풀 문제라는 시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은 헬싱키 프로세스의 과정에서도 제기되었던 꼭 같은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헬싱키 프로세스 과정에서 유럽은 이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고 해결해 나갔습니까? 그 소중한 경험과 논의과정을 우리는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반도 통일과정에도 적용해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해결해나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폴란드가 소련의 공산주의 압제에 시달리던 1978년,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58세라는 젊은 나이에 교황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2세가 조국을 방문하자 폴란드 국민들은 열광했습니다. 교황은 이후 세계 각지를 순방하며 인권보호를 강조했지만 남미에서 유행하던 해방신학 같은 진보 운동은 교황의 인권 메시지를 배격했습니다.

 

  공산주의의 폐단을 잘 알고 있는 교황은 서방 지식인들의 좌경화를 우려했습니다. 교황은 폴란드 자유노조 대표 바웬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그에게 거액의 활동자금을 비밀리에 전달했습니다. 1981년 5월 1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암살자의 저격까지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1987년 교황이 폴란드를 다시 방문하자 자유노조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얼마 후 공산정권은 붕괴했습니다. 이어 동유럽과 소련의 공산정권이 몰락했으니 교황이 역사를 바꾼 셈입니다.

 

  저는 우리가 오늘 토론하고 있는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도 교황청과 교회의 역할이 막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한반도 통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지극한 인간 사랑, 북한의 고통 받는 주민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제가 특정 종교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동양 불교의 성인인 석가 세존이 출가해서 고난의 길을 가는 것도, 유학의 공자가 천하를 방랑하는 것도 모두 지극한 인간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인간 사랑은 제가 모두에서 강조했던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설립 이념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제한된 관계로 이만 말씀 줄이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 자리에 참석한  Hans- Gert Pottering 콘라드 아데나워재단 총재님, 문태영 주독일 대사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한국과 독일, 독일과 한국의 통일 전문가 여러분, 그리고 독일의 한국 동포 여러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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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열애 22살 연하!
 알고보니 "한국계" 미녀

【서울=뉴시스】박영주 기자 = 한국계 필리핀인인 방송MC 그레이스 리(30·이경희)가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52) 필리핀 대통령과 열애 중이다.

"그레이스 리와 아키노 대통령이 저녁을 함께하며 데이트를 했다.
리가 대통령과의 만찬 분위기를 매우 재미있게 이끌더라.
디너 후에 그들은 커피를 마셨다. 이어 아키노 대통령이 리를 집까지 데려다줬다"는 현지인의 SNS 글이 퍼지면서 필리핀의 미디어도 두 사람의 관계를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그레이스 리는 지상파 GMA7 TV프로그램 `쇼비즈센터`와 89.9s `모닝 라디오쇼 굿 타임스` 등을 진행 중이다. 리의 방송사 동료들에 따르면, 미혼인 아키노 대통령은 틈틈이 그레이스 리를 찾아오고 있다.

세부어와 타갈로그어, 영어가 유창한 리는 지난해 12월23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아키노 대통령을 단독 인터뷰하기도 했다.

리와 아키노 대통령의 만남은 7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키노 대통령은 작년 6월27일 한국전력이 주도한 200㎿급 석탄 화력발전소인 세부발전소 준공식에서 그레이스 리와 눈이 마주쳤다.
리는 이날 현장에서 관련 이벤트의 사회를 봤다.

아키노 대통령은 당시
"손님들이 모두 아름답지만 그 중 그레이스 리가 가장 아름답다.
그레이스 리가 필리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사람이었다.
필리핀을 방문하는 다른 한국인들도 다 아름답다"고 말했다.
세부 주지사의 부인 옆에 있던 아키노 대통령은 한국 전통의상 차림의 리에게 이렇게 첫눈에 반했다.

특히, 리가 한국어가 아닌 타갈로그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는 것에 끌렸다.
아키노 대통령은 리가 방송프로그램 진행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행사 후 리를 불러 "필리핀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
"어떻게 필리핀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지" 등을 물으며 관심을 표했다.

한편, 서울에서 태어난 리는 사업을 위해 필리핀으로 이주한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민했다.
아테네오 드 마닐라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하고 2007년부터 `쇼비즈센터`와 QTV `스위트 라이프` 등의 토크쇼에서 한류를 소개하고 있다.
과거 자신의 프로그램 제작진과 내한, 탤런트 지진희 김래원 정경호 윤세아와 가수 미나 등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Whenever, Wherever (어느 때나, 어디서나)
현란한 춤과 노래무대 (msn 제공)



 
오늘도 즐거운 시간을.. 안녕히 !!
 
일 "게이샤" 의 세계


 
짙은 화장의

일본 "게이샤" 의 세계


게이샤(일본어: 芸者), 또는 게이기 (일본어: 芸妓)

는 예능에 종사하는 일본의 전적인 기생이다. 이들은 전통 음악 연주, 전통 무용 공연, 作詩와
같은 여러 가지 일본 예술에 능숙하다.
 
 
단순한 매춘부는 아니였지만, 요정이나 여관에 

호출되어 시간을 정해 고객의 이야기 상대를 해주거나
노래나 춤으로 흥을 돋구는 일을 하고, 때로는 성매매를 하기도 했다.
 
 

"게이샤"라는 단어는 일본 한자로 "예술"을 

뜻하는 芸 (게이)와 "사람"을 뜻하는 者 (샤)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술의 달인"이라는 뜻이다. 게이샤는 일본인에게 존경을 받으며, 정식 게이샤가
되기 위해서는 힘든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이샤를 부르는 다른 말로는 게이코 (芸子)가 

있는데, 이는 교토에서 만들어져 그곳에서 쓰이는 말이다. 교토는 길고도 영향력 있는 게이샤 전통을 가진 도시로, 이곳에서 전문직 게이샤 (게이코)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5년의 수련을 거친다.
 
 
견습 게이샤는 마이코 (舞妓)라고 부르며,  
이 말은 일본 한자로 "춤"을 뜻하는 舞 (마이)와 
"아이"를 뜻하는 妓 (코)가 합쳐진 단어이다.
 
 
게이샤의 전통적인 모습으로 떠올리는 흰 화장과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의 기모노 차림은 사실 마이코의 

모습으로, 완전한 게이샤는 단순한 색상의 기모노를
입고 화장도 특별한 때에만 하얗게 칠한다.
 
 

다른 도시에도 게이샤가 있지만 교토와는 많이 다르다. 
도쿄에서는 정식 게이샤가 되기 위해 6개월에서 1년 정도 
소요된다. 도쿄의 견습 게이샤는 "한교쿠" (半玉),  또는

술 접대부라는 뜻의 "오샤쿠" (御酌)로 부른다. 도쿄 게이샤는
교토 게이코보다 나이가 많은 것이 보통이다.
 
 

현대 게이샤는 오늘날까지도 "하나마치" (花街,  꽃마을)에

지어진 "오키야"라는 전통 게이샤 저택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나이를 먹은 성공한 게이샤들은 대부분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게이샤가 속하는 고상한 세계를 "카류카이" (花柳界, 화류계)라고 부른다.
 

19세기에 들어서 게이샤는 일반 여성보다 나은 지위를

갖게 되었으나, 일본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때때로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딸을 하나마치 찻집으로
팔아 넘겼다. 단나 (후원자)로 불리는 부유한 남성이 게이샤
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여 개인적인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게이샤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단나를 두어 

지출을 충당해야만 했다. 다른 남자들은 많은 돈을 지불하여
새로운 게이샤의 처녀성을 사는 경매 의식인 미즈아게를
치르기도 했다. 게이샤에 대한 평판과 존중은 메이지
유신이 진행되면서 다시 상승하였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게이샤를 보호하는 법이 만들어지면서 더 이상 소녀들이 

찻집에 팔리는 일이 없어졌고, 어린 게이샤의 처녀성이 팔리는
일도 사라졌다. 이때부터 게이샤가 되고 싶어하는 여성만이
게이샤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게이샤의 활동
대부분은 교토, 도쿄의 하나마치에서 이루어진다.
 
 
 
1920년에는 80,000명이 넘는 게이샤가 일본에 있었
으나, 오늘날에는 이보다 훨씬 적은 수만이 남아있다. 게이샤
감소에 대한 주요 원인은 서양 문화의 유입을 들수있다.
게이샤의 정확한 숫자는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1, 000명에서 2, 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게이샤가 되고자 하는 어린 여성은 보통 중학교나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한 후 수련에 들어가며, 직업
활동은 어른이 된 이후에 시작한다. 게이샤는 전통 가요와 샤미센, 샤쿠하치, 북과 같은 전통 악기 연주, 일본 전통 무용, 다도, 문학,
작시 등을 배운다.
 
 
 
게이샤의 딸은 게이샤로 교육을 받는 경우가 

흔했다. 수련의 처음 단계는 "시코미"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소녀가 처음 오키야 (찻집)에 도착했을 때 하녀로 일을 시작하거나 할수있는 모든 일을 했다. 이 일은 매우 고되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수행을 그만두는 소녀도 많았다.
 
 
저택의 연소자 시코미 대부분은 연장자 게이샤가 
밤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새벽 두 시나 세 시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이 수련 단계 동안 시코미는 하나마치의 게이샤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현대에 와서도 이 단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과거에 비해 힘들지는 않다.
 
 
게이샤 예술을 완벽히 숙달하고 마지막으로 고난도의 무용 

시험을 통과한 견습생은 수련의 두 번째 단계인 "미나라이"로
진급하였다. 미나라이부터는 더 이상 가사 노동을 하지 않았다. 이 단계 또한 오늘날 존재하는데, 과거에 비해 훨씬 기간이
짧다. 미나라이는 현장에 직접 참여하여 배운다.
 

짧은 미나라이 기간이 끝난 후에는,  세 번째이자 
가장 잘 알려진 단계인 "마이코" 수련을 시작한다. 
마이코는 견습 게이샤로서,  수련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수 있다. 마이코는 연장자 게이샤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며, 이들이 공연시 수행을 하고자 따라간다.
 
 
오니상과 이모토상 (언니와 동생)의 관계는 매우 중요

하다. 오니상은 하나마치에서 게이샤 활동에 대한 모든 것을 마이코에게 전수하는데, 차를 내오는 법, 샤미센을 연주
하는 법, 무용을 비롯한 이키의 예술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
 
 
마이코는 얼굴에 하얀 분을 두껍게 칠하고,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며,  거의 언제나 입술을 칠한다. 
기모노와 오비는 정식 게이샤들이 입는 것에 비해 
다양한 색깔이 많이 들어가며,  화려한 무늬도 

수놓아져 있다.
 
 
여섯달 (도쿄), 또는 5년 (교토)의 수련 기간이 

지난후, 마이코는 정식 게이샤로 승격하게 되며, 일한
시간만큼의 충분한 화대를 지급 받을수 있다.
 
 
 
게이샤는 색상이 적은 기모노를 입으며,  마이코일 때보다
성숙해졌기 때문에 일을 하거나 무용을 할 때만 화장을 하고, 
자연미를 돋보이게 하고자 단순한 스타일을 취한다.
게이샤는 보통 은퇴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한다.
 
 
 
 
 
 
 
 
 
 
 
 
 
 
 


 
 
 
 
 
 
 
 
 
 
 
 
 
 
 
 
 
 
 
 
 
 
 
 
 
 
 
 
 
 
 
 
 
 
 
 
  
 
오늘도 즐거운 시간을.. 안녕히 !!
 
한국전쟁. 미공개 사진들
 
 이 나라를 지켜주기 위하여, 이역만리에서 부름을 받고, 목숨을 받쳤던,
위대한 영웅들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닌가!
우리의 말에, 어려울때 도움을 준 사람을 모르는 인간은'
 "인간의 기본이 안된 사람"이라고 말을 하면서,
나는 그러한 사람은 아닌가??? 
 
 
한국전쟁. 미공개 사진들(출처:미국립문서 보관청)
한국전쟁. 미공개 사진들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것이 아닙니다
(출처:미국립문서 보관청)


 
62년전 낯선 이국에서 숨져간 미국 을
비롯한 U N 참전용사들에게
무한 감사와  명복을을 빕니다